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 문학사상사 / 1980년 9월
평점 :
절판


어찔어찔 내려간다
긴 회랑의 늪을 타고 정신 없이
밑바닥에 고인 맑은 물
달빛과 풀벌레 울음과 이슬에 넘친 물
가을 밤에 물을 긷는 일은 행복하다

물통 속에 달이 뜨는 일은 행복하다
人共時代에 줄창 같은 아들 셋을 잃고
투신 자살한 귀덕할미 죽은 넋이 울 듯
도르래는 운다만
數世紀의 어둠 속에 고이고 고여서
솟아나는 한 모습의 물과
입 맞추는 일은 행복하다

물통 속에 기러기떼가 뜨는 일은 행복하다.

-「우물 긷기」 전문

송수권의 시가 전통서정시를 물려받고 있지만 그의 특별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에 있다. 그리고 그 사상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는가를 아는 일이 恨으로 머물지만 않고 힘을 획득하고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우물 긷기」는 송수권의 시창작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에서 우물을 긷는 자는 시인 자신이다. 그리고 시인은 우물 안의 ‘數世紀의 어둠’을 길어 올려 입을 맞추는 행위를 너무도 행복하게 여긴다. 왜 이 시인에게 ‘數世紀의 어둠’과 만나는 일이 행복한 걸까? ‘數世紀의 어둠’으로 불리는 민중의 울음 소리가 시인에게 마음이 가는 요소이다. 송수권은 자신을 ‘뜨거운 핏줄을 밝히는’ ‘상놈의 피’가 흐르는 자(「燈 盞」), ‘여기서 나고 여기서 자라 죄 짓지 못한 착한 백성’(「回文里의 봄」)으로 인식하고 있다. 뼛속 깊이 민중인 송수권이 바라보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민중의 모습을 담고 있다. 탐관오리의 횡포로 옥에 있는 춘향이(「춘향이 생각」), 동학군으로 안핵사에게 혀를 뽑힌 장쇠아범(「茁浦마을 사람들」), 임금의 오해로 참살당한 사공 손돌(「겨울 江華行」), 그리고 ‘우리들의 잊혀진 고향’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3부 보름祭에서 연작되고 있는 보름祭에 행해지는 가랫불 넘기, 부럼 까기, 솟대놀이 등이 민중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 그가 ‘數世紀의 어둠’라고 불리는 민중을 바라보는 것은 그 ‘數世紀의 어둠 속에 고이고 고여서 솟아나는 한 모습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을 길어 올리는 일도 시인 자신의 몫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송수권이 길어 올린 ‘數世紀의 어둠 속에 고이고 고여서 솟아나는 한 모습의 물’이란 것은 무엇인가?

옛날, 할아버지 살던 茁浦마을은 그렇지, 한틀 지게를 엎어 놓으면 꼭 맞는 말일지도 몰라. 두 개의 山脈이 지게 목발처럼 내려 앉아서 지게 고작처럼 휘어들더니, 바다의 중동을 자르고, 애타게 만나질 듯 만나질듯 마주친 두 개의 지네 대궁지처럼 물 속에 자물리고 있더란다. 보름 사릿물이 오를 때쯤은 지네발로 두 대궁지가 달싹달싹 일어서는 것이 눈에 역력하더란다.
또 바다는 蓮꽃 시벙글어, 지듯, 風月導師의 손끝에서 떨어진 부채마냥 폈다 오물리면서 마치, 할아버지의 째진 말총갓 구멍으로 드나드는 겨울 호리바람처럼
피꺽피꺽 여러 마리 산새를 울리기도 하더란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옇든 산농민의 상놈의 도둑놈의 떠돌이의 반생으로, 동학군이 날개가 잘리면서 어느 안핵사에게 호되게 걸려, 혀를 뽑힌 채, 한 패거리들로 숨어와 터를 잡았더라는데 할아버지가 보기는 갈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근동에서는 씨종에서 씨文書를 가진 벙어리 쌍것들로 구메 혼인에도 가마에 흰 띠를 못 얹혔다지만, 그래도 귀 떨어진 葉錢 하나는 꼭꼭 때워 쓰는 착한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읍내 장터거리 그 쇠전머리 윷판막의 말뚝을 뛰어 올라 반벙어리 장쇠아범이 혀를 집게로 뽑혀도 쌍놈의 말은 쌍놈의 씨로 남는 법이여. 그라믄 쓰간다. 그래도 우리 동학장이들이 바구미같이 바글바글 끓던 그때 그 장날이 멋이었당깨. 이러고서는 한참 외장을 놓더라는 것이다.
아 동헌 마루를 우지끈 부수고 알상투를 끌어내어 수염을 꼬시르고 깨를 벗긴 채 볼기를 쳐 三門밖으로 내쫓았더니 그래도 양반 때는 알았던지 옴팡진 씨암탉처럼 두 손으로 쇠불알을 끄슥드랑깨. 활텃거리에서 작것 竹槍 끝에 안 걸렸드랑가. 뚝 소리 내고 떨어졌당깨. 옴마. 그란디 한 여편네가 엎어지드니만, 옴마, 이 작것, 이 작것. 우리 딸니미 잡아 먹은 갓끈 딸린 이 작것 하드니만 치마푹에다 싸들고 줄행랑을 쳤드랑께. 혀는 뽑혀도 말은 바로 허지만 말이여. 내가 그 달딴 녀석 아닌가 말이여. 알긋써. 이러더니란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늘 조금때쯤 바다는 복날 개 혓바닥 빠지듯이 그 길게 뽑힌 혀를 두 지네 대궁지 사이로 밀어놓고는 혀 뽑힌 茁浦마을 사람들처럼 궁궁을을 궁궁을을 궁궁을을 맨날 이러더라는 것이다.

-「茁浦마을 사람들」전문

「茁浦마을 사람들」이 시는 언어 뿐 아니라 시 전체가 민중 삶의 힘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시이다. 시는 처음에 시의 화자인 할아버지의 茁浦마을을 살아있는 듯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두 산맥 사이 바다가 있고, 그 바다가 빠질 때는 갯벌이 있는 茁浦마을은 시의 시작부터 사내의 살에서 솟아 있는 힘줄처럼 생동하고 있다. 또한 茁浦는 역사적으로 동학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남도는 조선후기 우리나라 최대 쌀 생산지로 대지주의 봉건적 수탈이 다른 곳보다 심했고 또한 줄포는 강경, 법성포, 논산포와 함께 포구, 개항장으로 대일 미곡 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대일 미곡 수출로 득을 얻는 것은 가진 자들이었고 민중들은 더욱 핍박받고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한 불평등에 저항했던 것이 바로 동학혁명이었다. 이 시에서는 이미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난 뒤 그 벌로 ‘혀를 뽑힌’ 사람들이 茁浦에 살고 있다. 그들은 그 전보다 더욱 궁핍하고 핍박을 받고 있었겠지만 동학혁명은 장쇠아범 같은 궁핍한 삶을 사는 민중에게 그 삶을 이겨내는 신명을 주는 경험담, 모험담, 자랑거리가 된다. 기댈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민중들이 살아온 이 작은 힘이 바로 송수권이 민중에게서 발견하고 길어 올린 ‘數世紀의 어둠 속에 고이고 고여서 솟아나는 한 모습의 물’이다. 이 힘은 ‘늦가을 뜨거운 불을 뒤집어쓰고 목을 떨군 채/ 단근질’(「江」)하는 모습이며 끊임없는 삶의 줄넘기를 자꾸 넘게 하는 ‘아, 뿌리 속 알 수 없는 힘’(「줄넘기」)이다. 이 힘으로 민중은 ‘산이 제 골짜기로 깊어지면서 한 시대의 적막한 물소리’(「江」)를 만들어 내듯 ‘장대같이 살아 눈부시게’(「江」)흘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 김현은 시인이 ‘한의 밑바닥에서 솟는 힘의 근원이 순전성’ 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송수권의 시가 恨으로 침몰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퇴행이냐, 초월이냐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황지우는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퇴행이나 현실 너머, 즉 초월을 꿈꾸는 모습을 시 곳곳에서 보이게 된다.

울 엄니 일 나가고 안 계시면 혼자서 마당에서 해 보고 놀았더랬습니다. 오래오래 보고 있으면 해는 똥그란 물이었다가 환한 구멍이었다가 장광에도 토방에도 정재에도 돌아다니는 빛 솜사탕이드라고요. 잡으면 제 꼬막손 밖에 또 나타나는 해, 저는 해 잡으로 종일토록 집 안을 갈고 다녔지요, 뭐.
그러다 어느 날 울 엄마 보따리 인 이마에 노을을 밀고 집에 들어오셨을 제, 제 눈에선 누런 진물이 났고, 눈이 퉁퉁 부어 보이지 않던 날, 엄니 절 업고 시내 병원엘 갔죠. 눈을 까뒤집고 들어오는 안과의 빛, 포르말린 냄새나는 엄청나게 큰 해가 제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만큼 울었습니다.
그날 밤 엄니 품에서 잘 때 제가 쪼물딱쪼물딱 만진 울 엄니 젖, 제가 잡은 해.
-「太陽祭儀」부분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중략)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숨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가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幸運木; 나는
이 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부분

「太陽祭儀」에서 화자는 어린 화자이지만 시인이 시적 소재를 선택할 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본다면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현재의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어린 시절의 자신은 가지고 있기에 시적 소재로 선택한 것이다. 바로 ‘해’와 ‘어머니’가 지금 현재의 나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어린 시절의 내게는 있었던 것이다. ‘해’와 ‘어머니’는 완전한 존재로 시적 화자가 원하던 바를 무엇이든 충족시켜주었다. 아버지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남의 집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의 고통이 있던 어린시절이었지만 그 고통을 달래주는 엄마의 품이, ‘쪼물딱쪼물딱 만’지며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어머니의 젖이, 완전한 따스함의 상징인 해가 있었던 것이다. 「살찐 소파의 日記」에서 화자는 아내에게 어머니와 같은 완전함을 바라는 욕망을 담아 ‘아내를 껴안으면서 ꡒ엄마ꡓ라고’ 부른다.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엄마가 아이에게 그렇듯 아내가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즉 자신이 행하지 않았기에,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존재이기에 아무 책임질 필요도 없는 아이가 되고자하는 퇴행의 욕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어머니는 시적 화자를 감당하기는커녕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기고 오히려 시적 화자에게 ‘당신의 밑’을 씻는 행위‘까지 의지하고 있는 ’꼬마 계집아이‘(「안부1」)가 되어버렸다. 그와 반대로 시적 화자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식물인간처럼 살아간다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자아인 어른이 되어있다. 아내와 책임질 아이들까지 있는 자신이 어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의 퇴행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음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이와 반대로 초월을 꿈꾸기도 한다.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물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절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等雨量線1」부분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름다운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아직은 바깥이 있다」부분

「等雨量線1」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현실 세계, 부정하고 싶은 그 세계가 좁다고 느껴질 때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바깥은 안과 대립하는 바깥이며, 삶과 대립하는 죽음의 세계이다. 안과 삶에 존재하는 시적화자는 그것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이는 곧 초월의 욕망을 일컫는다. 그들은 안과 삶에 존재하는 시적화자가 볼 때 자신의 삶과 너무도 달리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는 듯 느껴져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삶에서 좌절되어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 굶주림과 권태를 동시에 넘어선 곳;/ 난 거주할 수 있는 낙원을’ 자신의 죽음 이후의 생에서 찾으려 한다.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고 말하며 그리하여 ‘불티 같은 꽃잎들 머리에 흠벅 쓰고’ ‘서울서 벗들 오면/상처받은 사람이 세상을 단장한다/ 말’해주고 ‘그들이 돌아갈 땐/한번 더 뒤돌아보게 하여 저 바짝 藥오른 꽃들,/눈에 넣어주리라’(「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고 소망한다.
하지만 퇴행할 수 없듯 초월도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황지우는 알고 있다. 자신은 분명히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처럼, ‘문 안’에 있는 ‘검은 소’(「바깥에 대한 반가사유」)와 같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자이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자에게 바깥은 ‘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가는 것처럼 스칠 때만 존재하는, 스칠 때만 아름다운 것이다. ‘스치기만 한다면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等雨量線4). 하지만 생은 스치듯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치기만 하면서 보는 바깥은 ‘다 재가 된/ 숯덩이 정원’이며, ‘한낱 광희에 불과’(「섬광」)한 낙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죽음 뒤에 무엇인가’ 있는지, ‘죽음 뒤에 정말로 아무것도 없’(「햄릿의 진짜 문제」)는지 살아있는 자신은 알 수 없기에 현재의 삶과 대립되는 죽음으로서의 바깥 역시 자아 부정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퇴행과 초월 모두 현재의 자아 부정으로 생겨난 순간, 스치듯 지나는 것이다. 결국 황지우는 시집 『어느 날…』에서 퇴행도 초월도 자아 부정 상태의 대안으로 선택하지 않고 자아 부정 상태의 자신을 손에 쥐고 직시한다.

제비들, 돌아가려고 흐린 날에도
나가서 편대 연습하고 돌아오는데
방죽에 억새 덤불이 뒤집히면서
일제히, 풀잎 뒷면의 은빛을 드러낸다
저기 멀리 오키나와 섬에서 바람이 불고 있을 거다
초록빛 방죽 물의 거죽, 心亂하다
그리고 축 처진 하늘을 이고서 몸부림치는 풀밭;
방금의 生을 잊어먹은 듯
흑염소가 거기서 목놓아 울고 있다
저기 묶은 밧줄을 더 세게 끌어당기면서
-「흑염소가 풀밭에서 운다」전문

이 시에서 등장하는 제비, 억새, 흑염소 모두 퇴행과 초월의 욕망을 함께 가진 존재들이다.
제비의 날개, 억새의 풀잎, 밧줄에 묶인 흑염소는 퇴행과 초월의 양면을 표현한다. 그 둘을 선택하지 않기에 흑염소는 밧줄을 끌어당기며, 고통스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흑염소 상태로 황지우는 『어느 날…』에서 시적 화자의 모습을 나타넨디/ 퇴행과 초월의 순간은 섬광처럼 지나가는 아름다움으로 기록될 뿐 자아 부정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어느 날… 』은 시집 전체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초기 시보다 시적 긴장은 증폭하고 있다. 초기 시에서 사회와 자아의 갈등으로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어느 날…』는 사회와 자아가 갈등하고 있으며 그에 더하여 자아 안에서 퇴행과 초월이 부딪히며 긴장이 더욱 중첩되고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황지우의 『어느 날…』을 읽는 내내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영원과 하루’의 한 장면이 떠나질 않는다. 국경지대에서 사람들이 철조망에 넘어가지도 도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매달려 있는 모습을 흑백으로 처리한 장면이다. 황지우가 유지하고 있는 『어느 날…』에서의 시적 긴장은 그토록 처절한 모습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섬진강 창비시선 46
김용택 지음 / 창비 / 200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에 묻어 흐르는 이야기들

김용택 시인에게 섬진강은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주는(「섬진강1」)공간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공간에서 민중들은 이름 없는 들풀과도 같이 숨죽여 살아가지만 섬진강만은 그들을 감싸 흘러간다. 그들의 삶을 보듬어 준다. 시집 ꡔ섬진강ꡕ에 흐르는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물 깊이 그리움을 심‘(「섬진강3」)는 누님이 있다. 누님이 기다리는 이는 표면적으로 ’그‘로 표현된다. 하지만 누님의 기다림은 세속적인 욕망의 기다림이 아니다. 나이 들어 누님이 가고, 누님의 기다림의 자리를 마주하게 된 화자는 말한다. 누님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바라봄‘이며 ’세월의 따뜻한 깊이‘로 깊어져갔던 섬진강의 다른 이름이다. 말없이 흐르는 그 섬진강의 깊이를 누님은 아픈 세월을 통해 얻었다. 이제 그 기다림의 자세를 살아있는 화자에게 전해준다. 화자는 그 기다림의 자세를 등불 삼아 살아간다.

기다림의 자세를 등불 삼아야 하는 누님의, 나의 아픈 세월은 뭘까? 만약 그의 시가 섬진강 시편에 정체모를 슬픔만을 담았다면 이것은 김용택의 시가 아닐 것이다. 섬진강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다른 서정시와 다름없는 시가 될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 그 전 세대부터 섬진강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시인의 섬진강 연작은 농민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한 시절 뼈 빠져라 지어 놓은 쌀은 똥값으로 팔리고, 더 이상 농촌에 사람들은 없다(「섬진강7」). 다시 돌아오는 자들은 중동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와도 남는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섬진강8」)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예전에는 다 제 몫을 해내던 사람들이다. 시「섬진강13」은 그러했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생긴 모양대로/이러저러한 이름이 생겨/사람들 살 비벼 살’던 곳. ‘질서가 걱정 없’이 정해지고, ‘두레와 품앗이’로 서로를 돕던 곳. 농사 일이 다 끝나면 다들 모여 고됐던 몸을 추스렸던 곳. ‘일과 놀이에 구색이 맞아/자연스럽게 다 소용되는 삶들이니/ 다 사람 구실을 하고/서로서로 사람사람을 다 귀하게 여기니/동네방네 일에 아귀가 맞아/다 사람 대접을 받았’었던 곳. 80년대 모두가 외치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던 곳이었음을 시인은 말해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민주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외면하는 공간인 농촌에서, 땅의 역사에서 이미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산업화, 도시화를 추진하면서 가난한 자들만 떠도는, 이제 무덤 같은 공간이 되어버린 농촌. 그 곳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자들은 제 몫을 다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잊지 못하기에 더욱 서럽다. 「섬진강16」은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쓸쓸한 가슴을 앉고 살아가야 하는 현재 농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나 둘 씩 떠나고 비어가는 농촌, 남은 자는 그들이 살았던 자리가, 그들과 햇빛 궁그러지게 웃어대던 날들이 한없이 그립다. 누님의 아픈 세월과 그 세월을 넘겨받은 시적화자를 마주하며 우리는 그리움의 정서를 느끼는 것이고, 그것은 설움의 다른 이름이고, 기어코 전 세대에게 얻었던 땅의 교훈으로 살아내려는 자세이다. 이 시에서 그리움은 허공에 떠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설움을 지그시 삶의 바위로 누르며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살아 움직이는 정서이다. 이 정서는 섬진강처럼 끊임없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다.

김용택의 시에서 나오는 농촌은 전에 읽었던 유하와 함민복의 시에서 나왔던 유년의 공간과는 다르다. 물론 그들의 삶의 장소와 자세에서부터 그들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과의 대비로 김용택이 섬진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왜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그리움과 기다림, 깊이 바라봄의 자세를 누님에게 얻었던 화자가 바로 김용택이다. 시인은 기어코 땅을 믿으며, 땅을 믿는 사람들을 믿으며 살아가려는 것이다. 소외되어 가는 농촌은 점점 설움의 공간이 되어가지만 시인은 설움의 공감에서도 땅을 일구며, 빚으로 농사를 지어도 땅을 믿는 그 사람들이 있기에 결코 농촌을 단절, 소외의 공간으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시를 쓰고 있다.

이러한 생생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내는 김용택은 사람이 사는 마을 주위를 따라 흐르는, 사람들의 삶을 비추는 섬진강을 닮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맑은 날 창비시선 56
김용택 지음 / 창비 / 198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러움과 맑음의 강물

시집 ꡔ섬진강ꡕ에서 그리움 같은 서정성이 강했다면 시집 ꡔ맑은 날ꡕ은 분노가 시집 전반을 흐르고 있다. 이는 농촌의 현실과 맞물려 있는 감정이다. 농촌은 점점 노인과 아이들만 남는 공간이 되고 모두들 도시로 향한다. 이러한 상황을 김용택은 ꡔ맑은 날ꡕ에서 죽음으로 그려낸다. 「섬진강24」와 「섬진강25」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시다. 특히 「섬진강24」는 할머니의 죽음부터, 초상까지, 그리고 초상 뒤 남은 사람들의 모습까지 자세히 그려낸 시이다. 두 시에서 늘 떠나는 자인 우리는 남는 자들의 모습에 마음이 저린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치러지는 초상이 서울내기들에겐(떠나는 자) 치러야 할, 조금은 귀찮은 ‘일’이지만 할머니, 아버지로 상정되는 전 세대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고, 삶을 살아온 화자와 화자의 어머니에게 두고두고 전해오는 슬픔이며 문득 가슴을 칠 쓸쓸함을 남긴다(‘우리 어렸을 적 할머니와 화로 곁에 모여앉아 놀았던 벽 무너진 쇠죽방을 쳐다보며 나는 쓸쓸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손주 하나가 소주병에 덜 핀 진달래 몇송이를 꽂아 할머님 사진 앞에 놓고 있었습니다.’(「섬진강24」)). 농촌에는 죽음의 흔적만 자욱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은 어머님의 통곡처럼 가슴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들, 전 세대의 죽음이 쓸쓸함만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이 겨레가 생긴 이래/의인들이 목숨을 던져/나라를 지킬 때/아버님들은 이 땅의 논밭에서/곡식으로 나라를 지키며/의롭게 싸우셨습니다./아버지,/이 땅의 의로운 이들의 무덤은/아버님의 무덤처럼/아직 이름 없이 남아 /이 땅을 이땅으로 지키십니다.’ 이렇듯 그들이 살아왔던 자세는 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서 남은 자들을 살려내기도 한다.

그렇게 힘을 내어보지만 그들은 이제 일년 농사를 지어봐야 빚 탕감 하는 것에서 끝이 나고 남는 것도 없다. 뿌리면 뿌리는 대로, 자신이 노동을 한 만큼 돌아오던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다시 일년 농사를 짓기 위해 빚을 져야하고 그러한 일은 매년 반복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라는 안보와 경제를 이유로 민중들에게 특히 농민들에게 내핍을 강조한다. 시「풀피리」에서는 남한 땅의 권력자가 ‘군수’로 등장한다. 기름 낀 얼굴로 자신도 농민의 자식이라며 벼 한번 베고 땀을 흘리는 ‘군수’의 모습, 그러면서 뼈 빠지게 고생하는 농민, 저보다 더 나이 드신 어른들을 세워두고 소비 절약하고 근면 검소 하라는 ‘군수’의 모습에 읽는 이가 분노가 치미는 이유는 농민들의 분노가 그대로 이 시에서 전달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을 잊어버리고 저 잘났다고 나불대는 도시에 있는 배웠다는 것들은 권력과 돈에 미쳐 가는 모습. 농촌의 사정이 어떤지도 모르고 ‘평화롭다’며 흥취에 겨운 사람들을 향한 분노는 시집 ꡔ맑은 날ꡕ에서 거세게 흐른다.

거세면서도 넉넉한 것이 땅인가? 「풀피리」에서 ‘군수’의 모습을 조롱하던 사람들은 그래도 심은 대로 나는 땅만 보면 좋다. 땅을 보며 ‘우리가 언제/너그 믿고 살았드냐/심은 대로 다 거두는/저 땅 믿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농민들을 보며 시인 김용택은 자신은 결코 땅에서 멀어지는 배운자들이 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자세는 앞 시집 ꡔ섬진강ꡕ에서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땅을 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에게 전해준 자세일 것이다.

죽음과 분노가 가득한 이 시집을 시인은 왜 ‘맑은 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인가? 누군가 평화롭게 보인다고 말하는 그 날은 농민에게는 너무도 맑아 텅 빈 농촌을 환하게 보여주는 공간이고, 그리고 떠나간 자들이 살다간 모판 같은 맑은 날을 생각나게 하는 서러운 맑은 날이며,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없어도 서로 평등한 사람들이 다시금 뿌린 대로 거두며 살아갈 그 맑은 날을 기다리는 자세로 맑은 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곡식 익어가는 저 들녘이 너무도 눈부셔 서러운 시인의 마음이 찰랑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대는 배후가 없다 세계사 시인선 23
임영조 지음 / 세계사 / 1992년 10월
평점 :
품절


염소를 찾아서

‘개같이 아부할 줄 모르고/돼지같이 과욕할 줄 모르고/고양이같이 교활할 줄 모르는/그래서 늘 외롭고 검소한 축생’이며 ‘완강히 저항하는 외고집’(「염소를 찾아서1」)을 가진 염소는 현재 부재중이다. 시집에서는 시적화자가 납부금을 내려고 새끼 밴 염소를 몰래 내다팔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이상 염소가 풍월을 읊으며 고독을 즐기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기본적인 자신의 백면서생의 성품을 살아갈 수 없기에 ‘그만 탈출하고 싶다/검은 절망의 외투를 벗고/구닥다리 수염도 깎고/이 외진 마을을 떠나고 싶다’. 이제 시인은 안다. 자기가 납부금을 내기 위해 팔아버린 그 염소는 자기가 정작 찾고 싶은 자아였다는 것을.

이 시집을 읽기 전 ꡔ귀로 웃는 집ꡕ을 먼저 읽어서 인지 ꡔ귀로 웃는 집ꡕ에서 나오지 않던 현실 공간이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시인은 ꡔ귀로 웃는 집ꡕ에서와 같이 초월적 자아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면서생의 성품을 지니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과 자아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시인의 지향점이 시인이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 현실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대만원인 서울의 파편처럼 생겨나는 경기도의 도시들(「果川別曲」), 그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울이라는 중심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서울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고 있고,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옭아매며 노예처럼 바쁘게 끌려 다닌다(「넥타이」). 시 「회전문」에서는 빡빡하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시인의 눈에 회전문을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하루를 거대한 공룡의 아가리에 전신을 구겨 넣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가시만 남은 채 분해 되고 밤이 되면 납작한 오징어가 되어 거리로 토해진다.

이런 공간에서 시인은 ‘노란 티켓 한 장 사들고/하행선 열차를 기다리는 사십대’(「안전선 밖에 서서」)의 자신의 삶이 서럽고 부끄럽다. 자신이 원하는 자아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ꡔ갈대는 배후가 없다ꡕ에서는 자기를 지우고 싶어 하는 시인의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눈 오는 날에」에서는 ‘이미 잘못 산 생애와/스스로 절망한 자는/과거를 표백하듯 망각’ 하고 싶어하고 「권태를 위하여」에서는 ‘꾸벅구벅 졸다 가다가/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누」에서는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자신에 삶에 대한 부끄러움은 자신을 지우고 싶은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 대상들에게 끝없이 연민하기도 한다. 불구된 아이들이 황홀한 부채춤을 추는 모습은 시인을‘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고 ‘내 멀쩡한 四肢’를 부끄러워하게 한다(「채송화」). 그리고 ‘돈만 주면 언제든/ 제 몸속 피까지 파는 사내’를 욕하기보다 시인이 사는 시대에 그 사내와 자신이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연민을 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정은 하지만 그의 ‘염소’를 찾고 싶은 열망에 의해 늘 보류된다. 그래서 시인은 늘 ‘한가닥 희망과 만나기 위해/오늘도 낯선 길을 헤’(「미로찾기」)매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온갖 애증을 지우고’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12월」)를 찍자고 한다. 이 마침표는 끝으로 가는 망막함이나 슬픔이기보다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행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