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의 잠 문학과지성 시인선 105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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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된 사람들
-김기택,『태아의 잠』과 『사무원』


시인과 언어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 언어에 대한 감각이 천부적인 사람이 있다. 그는 능숙하게 언어와 함께 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언어와 놀 수는 없어도 그에게 세상은 자꾸만 시로 기록하라고 말한다. 김기택은 후자에 속하는 시인 같다. 그에게서는 언어를 쉽게 부리며 노는 여유로운 모습을 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시는 산문시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풀어지는 언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들은 단단하게 묶여있다. 그의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의 노력, 즉 대상을 면밀하게 관할하는데서 나오는 듯 하다. 특히 사람들의 자그마한 행동, 딸꾹질이나 걸어가는 모양새 그리고 웃는 모습 등을 그리는 시는 생생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의 섬세한 언어들은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기만을 벗겨내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는 기교를 보기 힘들다. 그는 성실하게 대상을 바라보며, 언어 역시 성실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성실함 때문인지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현대인들을 비판의 초점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자신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비판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루하지만 생동하는 것들을 그려내기도 한다.

축소된 현대인들1-기만
현대인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서로를 기만한다. 그들은 독립된 공간을 갖고 살아왔으며, 누구도 그 공간을 접근하길 꺼려한다. 가족마저도 말이다. 사실 그것은 독립되었다기보다 서로를 소외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들은 가까운 이들도 서로 경쟁상대로 인식하며, 자신을 꺼내 보이는 일은 상대에게 흠을 잡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블로그, 싸이라는 인터넷 공간에 개인 매체가 생겼다. 그들은 서로의 일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들 역시 가려 쓰거나, 비밀글이 되어 있다. 때론 너무 생활공간이 가까운 사람들은 그곳에서 접하는 일을 꺼리기도 한다. 그러한 현대인들의 서로를 향한 기만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일이다.

『태아의 잠』중에서「너무 웃으면 얼굴이 찌그러진다」은 늘 웃음을 습관처럼 흘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자세한 관찰을 통해 그들이 정작 웃고 있지 않음을, 오히려 억지로 웃어야 하는 상황에 지겨워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일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혹 「너무 웃으면 얼굴이 찌그러진다」를 읽고 있는 거의 모든 독자들이 자신의 상황이다! 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인지 우리는 억지웃음을 늘 짓고 있다. 별로 웃기지 않은 상사의 말에, 아버지의 말에, 선생님의 말에, 어른의 말에 예의로 웃고 있는 사람들. 그것을 우리는 가식이라고 말한다. 가식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포착해내면서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김기택의 정직한 언어는 적절하다.

축소된 현대인들2-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서로를 소외시키는 현대인들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다. 김기택의 미세한 관찰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 화석이 되가는 현대인들을 끄집어낸다. 그의 시「사무원」,「화석」,「조성환의 죽음」,「껌뻑이 兄」들이 그에 속한다. 그들은 모두 말단 직원이거나, 껌뻑이 형처럼 한번도 제대로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햇빛을 보지 못했다함은 자신의 가치를 그렇다하게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갔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조성환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조성환처럼 이미 죽었거나 죽어간다. 시에서 보자면 조성환은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소시민이다. 그가 결국 어떤 위치에도 자리잡아보지 못하고, 혹은 그래서 짝도 없었으며, 그렇기에 자식조차 없는 그래서 정말 아무도 그의 죽음을 모른 채, 버려지듯 죽어갔을 수도 있다. 이는 상상이지만 현대사회에서 그리 비상식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들었거나 봐왔다. 우리가 만든 물건을 우리가 버리듯이 그렇게 우리 역시 죽어가고 있다. 김기택은 그렇게 버려져버린 그들의 비극을 오히려 희극적으로 표현하여 우리에게 깊은 비극으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김기택의 언어는 우리를 비극으로만 몰고 가지 않는다.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그것 속에 작은 움직임을 김기택은 표착해낸다. 「다리 저는 사람」이나 「대칭-사팔뜨기」가 그러하다.
「다리 저는 사람」에서 살펴보자면 그는 다리가 불구인 사람이다. 김기택은 그의 걸음걸이를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과 비교해 춤추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다리 저는 사람의 신체는 그의 다리 한쪽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의 균형을 위해 온 몸이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 이를 춤추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의 시선의 교정을 요구한다. 「대칭-사팔뜨기」역시 한쪽의 장애를 위해 온 몸이 균형을 잡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을 그려내는 김기택의 언어에서 우리는 빈 곳을, 부정을 매꾸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들의 생동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걷는 것에 대해, 땅에 발 디디고 사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감각 없이 살아가는 우리가 죽어있는 몸을, 죽어있는 생각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다.

『태아의 잠』에서『사무원』으로 이행
특히 작지만 이렇듯 생동하는 생의 감각을 포착해내려 하는 김기택의 노력은『태아의 잠』에서보다『사무원』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동물이나 곤충에 관한 그의 시와 잠에 대한 생각은 두드러지게 변화했다. 『태아의 잠』에서 동물이나 곤충에 관한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는 꼬리가 없는 불구의 모습이었고, 무료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축장에서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당당하게 태어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무원』에서 그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여전히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텅 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없는 공간을 스스로 밀어 나아가며, 죽기 전까지 은빛 비늘을 튕기며 저항하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저항은 닭살로 남아있다.
그리고 『태아의 잠』에서 잠은 연탄 가스를 마신 상태와 같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했었다. 그래서 생명이 태동한다는 태아마저 무료한 죽음의 잠을 자는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사무원』에서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 잠을 자는, 생이 꼼지락 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무원』에서 잠은 잠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울음소리, 말랑말랑한 말소리로도 변화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위와 같은 면에서는 변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김기택이 포착해내는 사물들은 섬세한 관찰 탓인지 비극과 희극의 모습을, 부정과 긍정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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