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와 함께한 시간
제임스 캔턴 지음, 리모 김현길 그림, 서준환 옮김 / 한길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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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억이 시작되는 다섯 살 무렵을 고흥군 금산면에서 보내서 그런지,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어 도시에 오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시골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20년 전 쯤 금산의 풍경은 애니메이션 '토토로' 속 사츠키와 메이가 살던 마을과 닮았다. 거대한 고목 나무가 있고, 어딜 가나 벌레 투성이고, 슬리퍼 차림으로 시내를 터벅거리는 아이가 있는 곳.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고등학교의 등교길에는, 가로수로 벚나무와 동백나무를 심었는데 봄이면 벚꽃이, 겨울이면 동백꽃이 장관을 이루었다. 잎이 아닌 꽂 자체가 낙화하는 동백꽃을 보면서는 어린 마음에 충격도 받았다.


원고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츠키와 메이의 아버지처럼, 나 역시 먼 훗날 도시에서 시골로 돌아가 자연을 '벗 삼아' 살 수 있길 바랐다. 그런데 4년 쯤 전에, 아버지의 차를 타고 다시 다녀온 금산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다섯 살 내게 거대하기만 했던 벚나무는 평범하기 그지 없었고, 다리가 생긴 뒤로 관광객도 사람도 많아져 예전의 적막함은 사라졌다. 언제나 어린 시절의 낙원을 그리워하던 나보코프가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고향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이해된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일까. 그래도, 시골을 떠올리는 요소들은 언제나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었다.


낮은 산을 앞뒤로, 논과 밭이 즐비한 호남의 평야는 이따금 오가는 트럭을 제하면 손님도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다. 올해 초 담양 일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더더욱 느꼈다. 코로나에, 사무치는 계절에, 더욱 줄어드는 관객과 제멋대로 문을 여는 가게. 롱패딩을 입고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고 있으면 (점심 시간엔 한가해서 주로 산책을 했다) 가까이선 물까치가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저 멀리서는 딱따구리 소리가 나고,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무를 뚫고 있는 소리인걸 알게 되면 보이지는 않아도 많은 생물이 살고 있구나. 감탄하게 됐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지만 무수한 나뭇잎 아래서도 그 말이 통용되던가. 더운 여름 날, 햇빛 대신 하늘을 뒤덮은 푸른 잎사귀 속을 거닐다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조용히 또 불현듯 슬픈 기분이 든다. 어쩌면 그것이 제임스 캔턴이 말한 사토리悟り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아내와의 파경을 앞두고 복잡한 심정으로 호니우드 오크를 찾은 작가 제임스 캔턴은 처음에는 나무에 기대다가, 상수리 나무 속에서 살아가는 수십 수백가지의 곤충들, 그 곤충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새와 어치, 딱따구리 같은 벌레들을 발견하고, 영국인의 삶과 신화 속에서 상수리 나무가 얼마나 밀접한 존재로 함께 살아왔는지를 되새긴다. 나무를 빼놓고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북유럽 신화의 이그드라실도 커다란 물푸레 나무이며,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자살자들의 영혼이 갇힌 곳도 나무이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서부터 전쟁사까지 나무는 그 성질이 그렇듯 말없이 또 고요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랜다. 800년의 세월 동안 겨울이 되면 시들었다가, 봄이 되면 싹이 돋아나 너른 그늘을 만들어주고, 애벌레, 벌이 윙윙 오가는 집이 되고. 까칠까칠한 나무 껍질에 손을 대고 있으면 새끼손가락만 한 개미가 줄기를 타고 오가는 장면을 제법 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나무가 별과 같은 원리로, 그곳에 있어주기 때문에 위로가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상수리 나무와 함께한 시간』은 나무의 인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숲을 보호해라, 산림을 사랑해라 따위의 지겨운 이야기를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 그루의 외로운 호니우드 오크와 숲을 지켜보면서, 아주 오랫동안 시간을 걸쳐 나무를 바라보고 숲을 바라보고 새를 뜯어보며 그를 아끼고 보호하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줄기에 손을 대고, 말도 할 수 없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전부인 그 나무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그런데도 우리는 숲과 나의 연결감을 느낄 수 있다. 느끼게 된다.



숨 쉴 틈도 없이 사람들이 쏟아졌던 도쿄, 아름답지만 외로웠던 요코하마, 메뚜기 떼 같은 관광객이 쓸고 지나가 더는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고향, 못지 않게 외로운 도시 서울…… 눈 깜짝 할 새 바뀌어 있는 가게와, 장식처럼 존재했던 나무들로는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을 독서를 통해 느끼게 되다니. 어쩌면 독서도 나무처럼, 거기에 있는 것을 읽어내리는 과정이라 즐거운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적 글쓰기의 전문가인 작가의 역량일 수도 있고, 아무튼 참 신기한 일이다 싶었다. 그저 읽는 것 만으로도, 브리튼 섬의 어느 벤치에서 오크 나무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나는 책을 읽으며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겸재 정선의 그림처럼 마른 가지에 눈이 쌓인 산을 바라보았던 날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루트처럼 팔과 다리에 잎이 돋아난 존재로 멈춰버리고 싶었던 마음을. 숲을 사랑하는 것은 현실 도피나 도망일 수도 있다. 나쁠게 뭔가. 세우고 허무는 인간의 건물에 마음을 기대기엔 우리는 너무도 투명하고 연약하다. 튼살처럼 흉터를 간직한 나무 줄기를 쓰다듬는 작가처럼, 나도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때때로 쉬어가고 싶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벚나무를 바라보던 기억을 잊지 않고 싶다. 비록 고향의 벚나무는 폐교와 함께 영영 사라져 다섯 살 꼬마의 마음에만 존재하게 되었더라도, 책갈피처럼 눈을 감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은 모든 게 벌거벗겨지는 한순간이다. 바로 이 순간 평범한 일상의 흐름이 얼어 붙는다.대신 다른 존재 감각이 나와 이 세계를 송두리째 장악해서 뒤흔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찰나를 사토리‘satori, 깨달음‘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존재의 허울이 벗겨져 우리가 그 너머를 보게 되면서 깨달음의 가능성을 여는 순간이다. 우리는 한평생 동안 나름대로 매일 매일의 일과를 계획하고 꾸려 나간다. 어떻게 살아야 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 안다는 믿음 속에서 저마다 살아간다.하지만 어쩌다 경이로운 순간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마냥 시선을 고정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일상을 볼 수 없다. 그저 우리가 여기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공기만큼 가볍다는 것을, 이 지구상에서 깃털 정도에 지나지 않을 우리의 존재가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볍씨만큼이나 덧없고 연약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P30

나는 벤치 위의 눈을 쓸어낸 후 뼈에 사무치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 잠시 걸터앉아 있기로 한다. 왜 그런지 몰라도 이런 한겨울 날씨에는 상수리나무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잎사귀가 다 지고 생명체가 자취를 감춘 탓일까. 상수리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존재의 중핵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증발해버려 잔뜩 움츠러든 것 같다. 혼자만 동면하며 어둠 속에서 몇 달을 보내는 여왕벌이 되고자 벌의 군집 전체가 희생을 감수하는 것처럼.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 또한 겨울 내내 새봄의 햇살이 우리를 다시 바깥으로 끌어내기 전까지 스스로의 내부에만 깊숙이 파묻혀 있곤 하니까. - P110


상수리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본다. 그 느낌, 거기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오랜 상수리나무에 손을 대고 있는 동안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 느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 생물 종과 다른 생물 종, 한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에 이뤄지는 접촉에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생물 종과 접촉할 때 전해지는 생명력의 감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익숙하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 감각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갈 때 그 감각이 가장 강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고양이나 반려견을 손으로 쓰다듬을 때 그 감각을 가장 잘 알게 된다. 우리는 부엌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새 모이 판에서 날마다 지저귀는 개똥지빠귀를 볼 때도 그런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내 손을 상수리나무에 가져다 댈 때도 마찬가지다. - P117

"…그러다보니 우리는 그런 면에 대해 태생적인 경의 같은 것을 품게 되는 거겠지요. 제 생각에는 상수리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도 거기서 비롯된 것 같아요. 상수리 나무 한 그루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여러 세대를 거치는 인간들과 만나지요. 그래서 우리가 슬플 때 나무를 찾아가는 것도 어쩌면 나무가 듬직하게 우리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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