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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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에도 없는 곳
'에레혼' 처음 봤을 때 정말 낯선 단어였다. 사실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어색한 이 단어는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세상이다.
작가인 새뮤얼 버틀러가 "Nowhere(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영어 단어를 뒤집어 조합해 "Erewhon(에레혼)"을 만들어냈다. 
분명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도 않은 이 책의 특징은 독자를 매료시키며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주체가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떠한 캐릭터도 에레혼이라는 세상보다 독자에게 더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에레혼이라는 세상의 관습,
가치관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세상에 없는 곳에 대한 SF소설을 써냈고 많은 명작들이 탄생, 다수의 소설의 배경은 상상 속의 동물들 또는 신비한 마술을 통해 구현했지만 에레혼의 세상에서 그런 것은 없다. 책에서도 서술하듯이 그 곳에선 우리와 같은 인류가 살고 생활양식 또한 유럽의 시골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었던 많은 상상 속의 장소중에서도 에레혼은 단연 가장 신기하고 기묘하다.

  2. 불운한 죄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자신이 불행하다거나 운이 없다고 생각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불운함이 죄라서 재판에 기소된다면 어떨까?  정말 말도 안되는 발상이라 여길지 몰라도 에레혼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에레혼 사람들은 신체적 질병에 대해서는 크게 잘못된 죄악이라 생각하면서
정작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위는 책 10장 '당대의 의견들'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구절로 에레혼의 기본적인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몸이 아픈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치료받아야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우리의 일반적인 세상에서 범죄와 질병을 바꿔서 생각하면 이해하기에 좀 수월하다. 에레혼에는 의사가 없지만 범죄행위를 교정해주는 교정관이 존재한다. 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재판에 기소되고 아픈 정도에 따라 형벌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조절할 수 없는 질병을 죄악으로 여기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에레혼의 재판관 또한 아픈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아픈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불운 그 자체를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불운하여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된다면 그 또한 그 사람의 죄악인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에레혼은 우리의 세상과는 상반되는 개념들이 참 많다. 사후세상을 믿지는 않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세상이 있을 것이라 믿고 그의 부모를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재산상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축복이 아닌 비난을 한다. 비이성을 가르치는 대학에서는 확실한 언어가 아닌 가설의 언어를 가르친다. 기계문명이 발달했었지만 기계의 진보가 두려워 전부 없애버린 곳. 정말 터무니없어서 이런 나라는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작가가 서술한 에레혼은 꽤 체제 안에서 잘 돌아가고 있다.   

3. 우리 세상 속의 에레혼
  이 곳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사실 아예 말도 안되는 발상은 아니다. 책에 나온 예시를 들어보자면 인간들은 뱀을 뱀이라는 이유로 죽일 때가 있다. 뱀이 죽는 이유는 독을 가지고 있어서, 어쩌면 그냥 뱀이라서이다.
이 부분은 뱀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고 뱀이 인간을 만난 건 우연에 의한 일이지만 그것을 다 알면서도 우리는 뱀을 죽이고 나서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지는 몰라도 보편적으로 죄의식을 크게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다른 생명체들에게 종종 그렇게 굴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우연을 이유로 해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는 까닭은 당한 쪽이 재수없어서,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되버린 것이라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에레혼이 다른 종이 아닌 내 주위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을 적용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에레혼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남의 고통에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사회에는 건강한 사람들만이 남겨져 있고 아픈 사람들은 감옥에 가 있기 때문에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혼란스럽고 정말 어디에도 없는 곳을 작가가 상상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우리의 세상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점점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거나 어쩌면 못하게 되어버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에레혼에서 질병은 죄악으로, 범죄는 치료대상으로 여겨졌듯이 나는 도덕의 기준이 엉뚱한 곳에 세워진 또 다른 에레혼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그 곳에선 아무리 비도덕적인 일을 해도 힘있는 다수의 집단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해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부도덕적인 일을 한 이유를 어떻게해서든 피해자로부터 찾아내어 많은 이들이 그것에 공감해줬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운이 없어서 여유롭지 못한 집에서 태어났거나 여자로 태어났거나 혹은 둘 다거나 등등 그들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을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해도 결국은 불운한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곳 또한 이 가치관에 맞춰 에레혼처럼 나름대로 잘 돌아가는 곳이였다. 아마 내가 겪은 것 말고도 분명히 사회 곳곳에서 '에레혼스러운' 장면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에레혼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따로 내리지는 않는다. 나 또한 에레혼과 같은 사고방식이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건강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선악을 가리다 보면 남의 고초에 공감하지 못하게 될 뿐더러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도 결국 비겁한 다수의 변명이다. 아픈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격리시키는 속 뜻이 남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주 조금은 병에 대해 안심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4. 기계의 책 
서문을 주의깊게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작가가 신문에 기고한 기계에 대한 글을 토대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 내용을 근간으로 에레혼이라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기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바로 23장부터 3개의 장에 걸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파이프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파이프 대통 바닥에 작게 튀어나온 돌기를 보고 무척 재미있어 하면서
흔적기관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작가는 기계에 흔적기관이 있다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흔적기관은 진화론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용어인데 기계에 그 개념을 접목시켰다는 것이 충격적이였다. 작가가 빅토리아 시대, 다윈이 진화론을 창시한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시점에서 기계를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심지어 증기기관이 인간처럼 음식(연료)을 섭취하며 신진대사를 한다고 여기며 기계가 또다른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생식의 기능 또한 갖추고 있다고 보고있다.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기계가 인간처럼 의식을 갖지는 못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진화는 시간만 흐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자극하는 요인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 요인이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  증기 기관의 도입으로 인구수는 크게 증가했다. 한편 이렇게 증가해버린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인류는 더 발전된 기계가 필요하다. 발전된 기계는 인구수를 더욱 늘리게 되며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크게 보면 그것이 기계의 진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딱딱하지 않고 차근차근 작가는 자신의 주장을 조리있게 서술했고 이 장을 읽는 내내 감탄을 하면서 읽었다. 책 속의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의 진화가 두려워 기계 문명을 말살시키고 만다. 어쨌든 우리 세상에서는 작가가 예언한대로 흘러왔다. 실제로 증기기관, 하버-보쉬법의 발견 이후 인구수는 큰 폭으로 증가했고 인류가 증가하는 속도에 발맞춰 과학기술 또한 급격히 발전해왔고, 현재 우리는 작가가 예측했던 기계의 의식 즉 인공지능 개발연구가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5. 맺는 글
 이 책은 김영사 서포터즈의 첫 미션 도서로 읽게 되었다. 국내 번역출간이 처음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정말 생소했었는데 읽고 나니 공학도들이 한번쯤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설로 본다면 분명 엄청 재밌는 글은 아니지만 사회학 또는 공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흥미롭게 다가올 내용이다. 혹자에게는 작가의 기계에 대한 예측이 이미 현실에서는 실현된 지나가버린 일이라 시시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만 지금까지 작가의 주장이 어느정도 맞아 떨어진만큼 진화론의 관점에서 디가오는 특이점 이후의 기계의 발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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