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기타
김종구 지음 / 필라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말이 있다. “본업을 뛰어넘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취미나 특기를 뜻하는 프랑스어의 고급 표현법이다. 이 말의 주인공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데, 그는 평생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10대 때 시립교향악단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바이올린 실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바이올린에 쏟아부은 그의 열정 또한 대단했다. 그림에 대한 비판은 너그럽게 받아넘겨도,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비판은 참지 못하고 화를 냈을 정도라 한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는 앵그르의 그림을 본뜬 사진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을 통해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앵그르의바이올린을 가질 수 있다!” 30년 동안 기자를 본업으로 삼아 온 김종구 <한겨레> 편집인의 말이다. 그가 최근 펴낸 책 <오후의 기타>는 평생 악기를 제대로 다뤄본 적 없던 그가 쉰세 살에서야 처음 클래식 기타에 입문해 10년 동안 실력과 열정을 함께 키워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창기 일부 <한겨레> 구성원들이 목격했던 그의 기타 실력은 떠듬떠듬 간신히 지판을 짚어나가던 수준이었는데, 10년 사이 그의 실력은 등산에 비유하자면 북한산에 오르는 정도라 할 정도로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다만 중요한 것은 성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열정일 것이다. 책은 프로페셔널이 아닌 아마추어가 가지는 열정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말해준다.

소설가 김훈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김종구는 수도자의 자세로 기타를 연습했다고 했다. 시간을 쪼개 개인 레슨을 받고, ‘1만 시간의 법칙을 되새길 정도로 굳은 손가락을 찢어가며 연습을 반복하고, 소음에 가까운 연주에 대한 식구들의 지청구를 견뎌내는 등의 모습은 비교적 예상 가능할 터다. 그러나 좋은 음색을 내기 위해 손톱을 길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손톱이 아닌 손가락 끝으로 탄현하는 것을 연습해본 뒤 다시 손톱을 기르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과정 같은 것을 보면, 새삼 지은이가 얼마나 깊이 기타에 빠져들었는지 알게 된다.

그런 열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주는 즐거움이다. 지은이는 유명한 기타 교재인 <펌핑 나일론>의 제목이 웨이트 트레이닝 다큐멘터리 <펌핑 아이언>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고, 무거운 덤벨을 들어올리고 내리는 것과 나일론 기타줄을 한 음 한 음 튕기는 것을 비교해본다. 보디빌더들이 고된 훈련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근육이 부풀어오르는 펌프를 느끼듯, 우리는 반복되는 연습 속 집중과 몰입을 통해 어떤 정신적인 고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정을 쏟아붓는 대상은, 물론 클래식 기타뿐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터다.

그래서 오후의 기타라는 제목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지은이는 인생을 하루로 치면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한 해거름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셈이라며, “늦은 오후의 고즈넉한 햇살 아래서 기타의 선율에 빠지는 삶은 행복하고 즐거웠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대단한 바이올린 실력을 지녔던 앵그르는 늦은 오후에 새로운 세계에 빠져드는 즐거움은 아마 모르지 않았을까?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누구라도, 언제라도 찾아낼 수 있다. <한겨레신문의 서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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