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의 형제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학수 옮김 / 범우사 / 1995년 7월
평점 :
품절


10년 전 어떤 인터뷰에서 “당신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의 종점은 어디냐”는 질문을 받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 같은 책을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 안에는 너무 다양한 사실, 시스템, 세계, 스토리, 그러니까 全 우주가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종합소설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의 목표라고도 했다. 하루키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도스토옙스키, 그 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정점(頂點)이라고 여겨지는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하루키가 어떤 지점에서 이 작품을 질투하고 숭배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러시아 어느 시골 마을의 지주인 카라마조프 가문에서 발생한 친부(親父)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장남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를 둘러싼 재판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드미트리는 친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그의 살해 혐의를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사가 설전을 벌인다.

이폴리트 검사는 5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에 걸쳐 드미트리 혐의에 대한 최후 논고를 밝힌다. 그의 논고는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했고,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을 때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허약하고 개연성이 낮은 것인지를 파고든다. 이 지점에서 검사는 살해 전후 드미트리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지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논고의 결론은 이렇다. <드미트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결국 친부를 살해했다>. 검사는 드미트리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반면, 검사의 논고에 맞서 페추코비치 변호사는 드미트리가 죽인 것이 아니며, 설령 드미트리가 죽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던 불우한 성장 배경을 언급한다. 즉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드미트리의 살해는 아버지에 대한 살해가 아니라 일반 타인에 대한 살해와 같다는 것이다. 변호사 역시 드미트리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사실은, 검사와 변호사 둘 다 틀렸다. 그들이 언급한 물리적/심리적 증거, 논리적 추론, 당시 정황 등을 토대로 그려낸 살해 당시의 현장은, 친부 살해의 실제 범인인 스메르쟈코프의 고백과는 영 동떨어져 있다. 타인의 심리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하더라도 타인과 나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 나의 심리, 나라는 개체의 진실은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타인의 추론으로 쉽게 그려질 성질이 아닌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모른다. 나에 대해서는 타인 그 누구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라면 어떨까. 나는 나에 대해서는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인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와의 대화에서,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만난 악마와의 대화에서 나 역시 나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실은 나 이반 역시 친부 표도르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던 것 아닐까. 그런 깨달음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것. 타인의 죽음을 원한다는 감정을 포함해 우리 내면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가 모여 있다는 것.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완결 지은 것이 1880,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칼 융이 태어난 것이 1875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도스토옙스키가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수 십 년 앞서 암시한 것은 놀랍기만 하다. <그림자(Shadow)란 우리가 숨기고 싶은 모든 불쾌한 것, 부정적인 것의 집합을 말한다. 열등하고, 가치 없고, 원시적인 부분이며 우리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갖고 있는데, 바로 이 그림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와 대화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깨달았고, 집으로 돌아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한 악마, 아니 자신의 그림자를 실제 마주한다. 이반이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반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을 만났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은 동생 알로샤에게 “사실 나는 그것이(악마가) 내가 아니라 그 놈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라고 고백했던 거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무의식의 감정, 열등하고, 가치 없고, 원시적이고, 어둡고, 추악한 인간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현혹하러 온 사탄이기를 바랬다. 이반은 곧 나이기도 했다. 나는 조직에 순응하며 가정을 지키며 예술과 선()을 꿈꾸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그림자가 – 누군가를 심지어 죽여버리고 싶다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이 – 나에게도 분명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그림자를 가진 인간인 것이다. 때문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으며 가장 깊게 감응했던 인물은 장남 드미트리도, 삼남 알로샤도, 혹은 친부를 살해한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도 아닌, 그림자에 눈 뜬 둘째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앞서 말했듯이 하루키는 全 우주가 이 한 편의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했다. 우주에 빛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우주에는 어둠이 더 많았다.  

(2018. 12. 12.) 

추신1.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여러 출판사가 번역하여 책으로 발간했다. 그 중 고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 판을 읽었는데, 범우사 출판사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처음 발행한 것이 1986 11월이니 30년 전의 작품인 셈이다. 일부러 범우사 출판사의 책을 읽은 이유는, 민음사에서 같은 책을 번역한 김연경 번역가가 고등학생 때 이 김학수 번역본을 읽고 자랐다는 말 때문이었다. 번역가의 번역가가 번역한 책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손으로는 작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번역가의 손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났음에도 우리는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추신2.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함께 2018년의 책 읽기가 조금씩 끝을 향하고 있다. 매달 시집, 고전문학, 과학책, 인문학책을 읽는 경향이 정착된 것이 지난 3월이었다. 사놓은 지 2년이 넘어가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자고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매 달 다양한 고전문학을 읽는 시간은, 고전문학이 낡은 것이 아니라 이처럼 현대적이고 생명력이 넘친다는 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부터 <카라마조프의 형제>까지, 러시아 문학에서 시작해서 러시아 문학으로 맺음 지었다.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사실주의 문학에 더 빠져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2019년 책 읽기의 출발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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