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소녀 -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정순 옮김 / 현암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나도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신기한 것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텔레비전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지하철 개찰구에서 표를 삼켰다가 뱉는 기계도, 어른들에게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것 하나 하나가 아이에게는 낯설고 신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 않는 것이 '어른'이며,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만큼 닳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오렌지소녀’의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소피의 세계', '카드의 비밀', ‘세실리의 세계’ 등 청소년을 위한 철학 소설로 유명한 작가다. 특히 ‘소피의 세계’는 나이를 막론하고 철학 입문서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오렌지소녀’도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에서 시작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15세 소년 게오르그는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게 된다. 죽은 사람의 편지를 읽는 긴장감 속에서 소설이 전개된다. 편지에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오렌지소녀'를 만나면서 시작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차 안에 한 소녀가 오렌지를 양팔 가득 들고 서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광경이지만, 아버지는 여기에서 동화를 보고 수수께끼를 본다. 소녀의 사소한 행동이나 대사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비밀스런 메시지이다. '닳고 닳은 사람'이 보기에 이런 심리는 그저 '눈에 낀 콩깍지'이리라.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꾸어 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크고 작은 드라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놓치고 지나간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이겠는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가 ‘놀라워하는 능력’이다. 게오르그의 아버지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능력을 잃지 않고 이 세상의 경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린 이번 한 번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야.'

게오르그의 아버지는 편지에서 몇 번이나 이렇게 쓴다.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통째로 선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몇 십 년 살고 나면 그 선물을 다시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사랑하는 사람도, 친한 친구도 함께 잃어버린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소설 전반에서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멋진 삶'을 보여주고, 그 '멋진 삶'은 언젠가 상실된다는 잔인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어차피 빼앗길 선물이라면 받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일까?

이 대목도 작가의 다른 소설을 연상케 한다. 사실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통째로 선물 받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이 소설이 아니라 ‘세실리의 세계’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왔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오렌지소녀’에는 작가가 전에 쓴 작품의 테마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전반부까지 읽었을 때에는 일종의 ‘우려먹기’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의 심정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주제를 ‘사랑’과 ‘죽음’에 초점을 맞춰 변주한 것이라고 본다. 작가의 전작들을 이미 읽은 사람에게도 ‘오렌지소녀’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통째로 선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빼앗길 선물이라면 받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을 직접 읽으면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누구나 알고 있을 당연한 진리이지만, 등장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읽다 보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