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저울 - 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
이춘재.김남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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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저울

이춘재, 김남일 지음

 

 

참으로 좋은 책이면서, 한편으로는 참 나쁜 책이다. 머리는 후련해졌지만,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먼저, 전문성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참 좋은 책이다. 한겨레신문의 법조 전문기자 둘이 힘을 모아서 썼는데, 그래서인지 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언론을 통해서 조각조각 흘려들었던 사건과 판결들이 갖는 의미를 친절하고도 깊이 있게 풀이해 놓았기에 읽는 내도록 , 그래서 그랬구나!’라며 고개를 주억이게 된다. 왜 대법원을 개혁해야 하는지, 대법원을 개혁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어떻게 좌절되고 말았는지 또렷이 알게 되었다.

 

대법원 개혁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책의 첫 머리에는 대법원을 상징하는 두 가지 조형물이 나오는데, 그 둘을 견주어 보면 대법원의 속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자들은 먼저 대법원 건물을 추어올린다. 1995년 준공된 뒤 각종 건축상을 휩쓸 만큼 유명한 건물인데, 최고 법원으로서의 위엄이 느껴지는 외관뿐만 아니라 건물 배치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 고유의 공간과 사법부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의 지원 공간을 멀찍이 분리함으로써, ‘한눈팔지 말고오직 재판업무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판의 독립성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구현하려는 뜻이었다.

 

한편 대법원 청사 중앙홀에 자리 잡고 있는 디케의 모습은 그런 뜻과는 상반된다. 일반적으로 법의 여신 디케는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고 한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격함과 날카로움을 상징하며, 천으로 눈을 가린 것은 공평무사하게 판결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란다. 그런데 우리의 디케는 눈을 가리지도 않았으며, 한 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눈을 가리지 않았으니 법정에 드나드는 피고인이 누구인지 또렷이 볼 수 있고, 그러니 그에 따라 판결이 흔들리게 된다. 더군다나 칼보다는 무딘 법전을 휘두르니, ‘개작두를 대령하라고 외치던 판관 포청천의 서슬 퍼런 위엄은 찾을 수 없다.

 

두 조형물은 겉과 속이 다른 우리 대법원의 현 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대법원은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구성에서부터 다양성이 심하게 망가져 있다. 전통적으로 서열 중심의 엘리트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한 사법부는 주로 엘리트주의에 잘 길들여진 고위 법관들을 대법관으로 임명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획일적인 구성은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대법원이 아니라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만을 위한 대법원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 책에 나열된 무수한 판결들은, 우리 사법부의 저울이 얼마나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지 그 민낯을 속속들이 고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응어리들이 점점 엉켜서 마음 깊이 가라앉았다. 이번 대선이 지난 대선보다 더 뼈아팠던 까닭은 될 듯 될 듯, 그러다 결국 고비를 넘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으리라. 그랬기 때문인지 노무현 대통령, 이용훈 대법원장, 독수리 오형제의 싸움이 결국에는 고비를 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역사는 뼈저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적으로, 한 번은 희극적으로. 대법원 개혁이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지 못하고 좌절되는 슬픈 역사는, 아슬아슬한 싸움 끝에 결국은 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를 꺾는 희극(!)적인 장면과 겹쳐졌다.

 

김수영의 이라는 시를 다시 읽어 본다. 바람이 몹시 불고, 그래서 풀은 누웠고 울다가, 그러다가 가까스로 일어나서 겨우 웃는다. 그렇게 힘들여 일어섰는데,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 그 풀을 다시 눕혔다. 왜 그랬을까? 폭압적인 바람을 뚫고 기껏 일어선 풀을 왜 다시 눕혔을까? 시민들에게 지금의 현실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여러분, 지금 우리 세상에는 모진 바람이 불고 있고, 그래서 지금 우리는 누워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워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면, 일어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참 나쁜 책이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잘못은 아니다. 희극적으로 되풀이 되는 슬픈 역사 탓이다. 하지만 그런 뜻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책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현실인지 정확하게 짚어주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 모진 바람을 불어대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걸 정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워있음을, 그리고 언젠가는 이 바람을 뚫고 일어서야 함을 가슴 아프게 꼬집어 주기 때문이다.

 

* 일부 표현은 책에서 그대로 옮겨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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