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가고 집을 정리하면서 큰 숨을 들이쉬고 예전에 주변인들과 주고받았건 편지들을 찢어버렸다. 편지를 넣어두는 서랍만 보면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그 편지들은 항상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언제든지 나의 내면과 내가 겪은 일들을 증빙함으로써 나의 과거를 '까발릴'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내 과거가 그렇게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불행하고 죄악으로 덮여있는 것도 아니었다. 찢어버린 편지들 중에는 행복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더 많지만, 왠지 그것들은 현재의 내겐 아주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로 여겨졌다.그래서 프루스트가 15년간이나 수행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내는 작업이 단순히 행복한 회상이 아니라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을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말 그대로 미성숙한 시기(좋은 말로는 순수할 때인가...), '풋내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던 시절은 멋모르고 즐거워했던 기억 사이사이 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들이 끼어있으니, 더더욱 회피하고픈 기억일 것이다. 열화당에서 올해 번역되어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세 번째 권은 바로 이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성에 눈을 뜨고, 세상이 '그녀'들로 인해 분홍빛으로 보이던 시기, 그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치한 수작을 일삼던 시기...그것은 그 시절을 지나온 나같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작년에 나온 2권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책도 만화라고 쉽게 보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정중하고 품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