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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신경숙 작가를 만나는데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 했다. 남자로써는 읽기 힘든 감성에 치중된 소설들 속에서 청춘소설은 더 찾기가 힘들었다. 지난 9년 동안 읽을 수가 없었던, 아니, 읽기를 거부하였던 소설들 속에서 마지막에 가까운 소설에 대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소설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만나게 되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이 울리고’는 제목 자체가 전체 처음부터 끝가지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과 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첫머리에서 윤 교수의 첫 인상의 묘사 속에서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고, 그의 예리한 눈빛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이 소설의 결론 즈음해서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스므살, 사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의 스므살은 ‘매운 가스’로 대변되는 격동의 시절을 의미하고 있다. 단순히 그들이 청춘이라서, 단순히 대학생이라서가 아닌 것이다. 정윤, 그녀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지.금.뭘.하.고.있.는.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 청춘들은 과연 그 답을 할수 있을까? 극변의 80년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는 상황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자세는 이시대의 청춘들이 고민했어야하는, 하지만 고민하지 않는 현재 상황에 대해 되묻는 느낌이 든다.
정윤이 스므살 시절에 사촌언니 집에서 살면서 구석진 창에 검은 도화지를 붙여 놓는 행동에서 세상과 단절, 아니, 그것보다는 스스로 분리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절이 깨어진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동을 위한, 대학수업 때문 이였다.
다시 그가 묻는다. “내.가.그.쪽.으.로.갈.까?” 그와 그녀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는 문장 이였다. 서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 이였던 것이다. 그는 때로 그.쪽.으.로.가.고.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서로를 향한 관계를 표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한문장 내.가.알.아.서.할.께.에서 상황은 종료되어버린다. 이전 추억 속에서의 관계가 아닌 현실 상황의 관계로 돌아오면서...
이별에 대해 가장 힘든 것은 가족과의 이별일 것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에서는 주인공인 윤과 어머니의 모녀관계에서 그것이 표현되고 있었다. 또.와.버.렸.어. 엄마에서 느껴지는 안도와 왠지 모를 도피감 속에서 지금의 나는 그러한 도피처는 어디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어가고 있었다.
단이가 준 시집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정윤을 결국 휴학을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되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어둠을 바닥에 깔고 있는 시를 주로 쓰는 사람 이였다. 여기서 ‘단이’에게 나는 슬슬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기 시작하는 대목이 되었다.
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죽음, 분리, 단절을 뜻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는 그와 다르게 어두운 이미지가 아닌 정윤과 어머니 간의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단이 와의 만남에 대한 투영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가서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묶어두고 있었던 것일까.
너는 나를 사랑하니 라고 정윤이 단이 에게 물을 뻔 했지만 묻지 못한 이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신기루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후 단이가 겪은 상황에 대한 묘사는 자유의지가 억압된 틀 속에 배치된 사람과 그 바깥쪽에 있는 사람간의 현실적 마주침에 대한 묘사임에 틀림없다고 느끼었다.
윤교수가 질문한다. “여러분은 각자 크리스토프들이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라네 ” 이러한 소설속의 아니 지금 실제 현실에서도 청춘들은 서로 신뢰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대목 이였다.
이제 윤미루의 화상 입은 손이 매개체가 되어 나타나게 된다. 윤 교수 앞에서는 단순화상으로 인한 상처로 생각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녀가 가진 아픔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이어서 윤 교수의 서재가 등장하는데 서른세살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작품을 놓은 책장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장면에서 서른셋이 가지고 있는 의미, 즉 청춘의 끝을 설정해주며, 예술가들에게는 영광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앞으로 청춘인 주인공들에게 닥칠 시련을 예고하는 무언의 이정표였다...
이윽고 정윤은 도시를 알기 위해 걷는다. 소설 속에서의 정윤뿐 만 아니라 이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이에 매우 동의하는 바이다. 걷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수많은 소풍경들과 사색의 기회는 청년들이 가질 수 있는 문화이자 가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좀더 느리게, 좀더 천천히, 놓치지 말고 이시대의 청년들도 이러한 기회를 꼭 가지기를 바라는 느낌
시위군중속에서 명서가 정윤을 발견하고 정윤의 신발과 가방을 찾을때 정윤의 가방의 모습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 보았을 때, 네.꺼.니.까. 알지에서 그가 얼마나 정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던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단지 그가 혼자 되뇌는 말은 단순히 그가 스스로뿐만 아니라 이 시대 청춘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꽃집이 등장하는데 흔히들 등장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80년대의 자화상을 투영하면서 그 시절 청춘과 중년의 대화에서 모순되면서도 무순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다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는 현실에서 그 중압감이 읽고 있는 본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숨.을.쉰.다 라는 것 일지도 모른다. 다시 정윤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는.숨.을.쉰.다. 는 더욱도 대조된다.
갈색노트에서 나오는 제노비스 사건은 잘 알려진 군중심리의 예로 방관자 효과의 일종이다. 여러 명이 있으면 책임을 나눠어 가진다는 생각이 작용해서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런 사건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청년소설로써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치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경숙 작가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느껴지는 대목 이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쓰러저 가던 피해자가 육체적인 고통보다 구경꾼들의 창문에 불이 꺼지면서 느꼇을 고통이 더 컷을 거라 생각했다는 장면은 사람이 느끼는 극도의 고통이 어떤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낙수장의 안내로 서울을 탐방하는 도중 ‘학림다방’이 나오는데 실제로 대학로에서 아직도 영업 중인 오래된 다방이다. 1956년부터 영업하였다. 이런 요소들로 인해 더욱더 읽기에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어서 낙산도 나온다. 여기서 정윤은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계속 윤미루 만큼? 이라며 되물으며 다시 확인하려고 한다. 그녀를 경쟁상대로 생각한 것일까? 이어지는 그가 겪은 참새 사건을 통해 느꼈던 기쁨과 절망 속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왜 기쁨만이 아닌 슬픔과 절망도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것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상대를 그것이 죽음이든, 이별이든 간에 거치게 될수 밖에 없다는것을 대변해주고 있는것이였다.
문장 이어쓰기에서 윤미루의 첫줄은 “나는 사람이 가진 것 중에서 손이 가장 좋다.” 이어서 정윤이 “잠시도 휴식이 없는 가엽고 고마운 손.” 명서가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 라고 쓴 것에서 윤미루가 화상을 입은 손이지만 손이 가장 좋다고 한 것이 왠지 마음이 아려오기도 했다.
정윤이 단이에게 연락처를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하.지.않.으.니.까. 였다. 그런데도 단이가 서울로 올라온다는 대목에서는 왠지 모를 섬뜩함까지 느껴졌다. 사랑하지 않고 있는데 다가온다는 사람, 부담을 넘어선 무언가를 나타낼법한데 소설속의 윤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미 그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던것일까. 이어서 나타나는 목욕탕은 정윤과 미루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계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작용하고 이안에서 윤미루는 목욕탕이라서 가능한 자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하면서 둘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미루가 사는 계단 밑 방이 나오면서 미루라는 인물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가 두드러지게 된다. 고의든 아니든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미루를 은연중에 느끼기도 하였다.
이제 이야기는 시대의 희생자들을 향하여 흘러간다. 미루의 언니는 그 희생자들의 표상으로써 소설에서 등장한다. 분신하고 뛰어내리는 순간을 표현한 “언니의 두팔은 마치 탄원하듯 허공을 향해 길게 뻗쳐져 있었어” 힘 없는 사람들의 불의에 대항하는 방식은 그토록 고통스러웠고, 지금의 세상이 오기에도 그토록 힘들었던 것을 표현해주고 있었던 것이였다.
이윽고 단이가 정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나오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격리된 상황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결국 윤은 단이의 면회를 가게 된다, 그리고 단이와 하루를 보낼때 “너는 내게 남아있는 단하나의 출구야“ 라고 윤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다시 섬뜩함이 느껴졌다. 이후에 경회루 이층에 있었던 일을 편지로 이야기하며 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편지를 계속 써내려간다. ”언젠가 언젠가 너를 그곳을 데려갈께“에서 언젠가 라는 단어가 왠지 모를 어둠을 몰고 있었다.
윤이 아버지에게서 듣는 나도 잘 지낸다. 라는 말을 듣고 미루와 단이에게서도 그러한 평범한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라는 바램 에서 평범한 단어가 힘들 때, 그리울 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대목 이였다. 흔히들 하는 가족에게 사랑해요 라고 말하라는 것과 어쩐지 교차되어 상기되었다... 정윤은 사촌언니 집에서 창문에 검은 도화지를 붙이지 않기로 하는 것으로 일대의 전환을 하게 되고 어머니를 만나는데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창이 이제 어머니가 떠나버린 이후로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것이다.
윤교수의 사퇴는 지식인들의 불의에 대한 저항이 어떤것인가를 소설내에서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부정하고 폭력적인 말들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표현은 그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크리스트프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시 한 번 “한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세계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라고 편지로써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최근 한국을 방한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 교수가 말하는 정의와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청춘의 이유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의이니까.
이제 미루 어머니에게 미루의 소식을 듣고 만나지만 이미 거식증으로 미루는 사망한 상태였고 사람들의 관심이 끊겨 죽음에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미루의 노트는 서른셋 미만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서재에 꽂히게 되면서 미루의 이야기는 종결되게 된다. 단이의 경우 의문사로 인한 죽음을 대변하고 있다면, 미루의 경우는 주변의 무관심이 초래한 청춘의 죽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윤 교수 역시 젊은 날의 애인에 죽음에 대한 죄책감내지는 충격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 모든 것이 끝이 찾아오라고 써주는데, 청춘이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사색과 고뇌 없이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극단적으로 베르테르의 효과처럼 아예 죽음을 택하도록 놔둬서도 안 될 일이다. 작가 역시 그런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윤 교수의 남김 말을 모아보면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 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다.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 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였다. 죽음도 당연한 순서이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함구적인 뜻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언젠가 언젠가는 정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의 그에 “ 내가 그쪽으로 갈게” 라고 문장을 적으며 마무리 된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죽음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소재가 기저에 있는 청춘 소설 이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 띄고 사색에 잠기기 위해서는 80년대에 대한 저변 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 특히 중요했다. 약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희생을 통한 이시대의 발전에 대해 많은 젊은이들이 공감 할 기회를 제공하면서 청춘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밝은 내용으로만 이전 시대의청춘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약자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너무 참혹했다. 그리하여 이야기속의 죽음을 통한 희생자들 다시 살펴보면, 단이는 군에서 의문사로 (사실 이전에 운동경력이 있었다는 점 또한 상기된다), 미래의 언니는 권력에 의해 사라진 연인에 대한 외침의 방법으로 분신을 택했으며, 미루는 무관심속에, 윤 교수 또한 연인에 대한 무관심(그것이 자의든 타의든)거기에 윤정의 어머니는 병으로 인해 죽는다. 이러한 이어지는 죽음에 대해 청춘소설이 가지는 틀을 너무 어둡게 만드는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겠지만, 젊은날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은 바로 언.젠.가. 에 대한 중요한 토양이 될것이라 믿는다. 아픔을 알고 공유하고 그것을 이겨날 수 있는 청춘이 되길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소설 전부분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청춘들이여 함께하고 싶다는 이가 있으면 “내가 그곳으로 갈게” 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되고
“한모금이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