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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야, 이 도둑놈아!' 누가 뒤에서 그렇게 부른다면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은 돌아볼 세상이건만 한 사람만은 묵묵히 자기 길을 갈 것이니 그의 이름은 바로 이치도다.'
소설의 첫 두 문장을 읽어 보면 이치도는 성인(聖人)이거나 살인자일 수는 있을지언정 `도둑놈만은 결단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치도는 도둑들의 물건을 훔쳐온 '도둑 중의 도둑'이다. 그렇다면 그는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의적인가. 그는 물론 나름의 철학이랄까 좌우명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거창하게 의적이라고까지 불릴 만한 인물은 아니다. '인생은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훔칠 것이 있고 훔치는 게 재미있고 훔쳐서 좋은데.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이치도의 인생관이었다.
<순정>은 학교를 빼먹고 동네 만화방의 돼지저금통을 훔치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가히 나라를 뒤흔들 만한 규모의 큰 도둑으로 성장하기까지 이치도의 파란만장한 반생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이치도의 스승 왕확 선생의 수양딸 왕두련을 향한 치도의 한결같은 그러나 메아리는 없는 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동시에, '물건의 소유자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그 물건을 훔쳐서 자신의 소유물로 만든다'는 도둑질의 정의에 충실한 치도의 항심(恒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