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며
샛바람 불어
지면은 온통 만남의 이야기다.
연분홍 처녀들의 다소곳한 기다림과
물 건너서 달려온 초록 사내들의 다정한
눈길,
마파람 불어
지면은 온통 사랑의 이야기다.
격정에 휘몰아치던 그날밤의 폭우와
땀에 흠뻑 젖은 숲들의 가쁜
숨결,
하늬바람 불어
지면은 온통 이별의 이야기다.
잿빛 노을 앞에서
쓸쓸히 손 흔들며 돌아서는 그의
빈 어깨,
된바람 불어
지면은 이제 온통 그리움의 이야기다.
백지 위의 나뒹구는 연필심처럼
눈밭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부러진
나목,
바람이 분다
운명의 책장들을 넘긴다.
다시 살아야겠다.*
* 발레리의 시구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