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71
나해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1월
품절



내가 그 여자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고
어젯밤 아내가 말했습니다
소리없이 웃었던가요
쓸쓸한 일이지요

처자 있는 사람이
젊은 여인과 친구가 되어 연인이 되어
그 시절을 견디었지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던 때였던가요

참담한 고통과 지극한 기쁨이
따가운 햇살과 서늘한 그늘처럼
함께했지요
불같이 뜨겁고 얼음처럼 차가웠던가요

가을은 가고 또 오는데
귀 밑에 늘어난 흰빛과
먼 하늘 바라보는 그림자 데리고
아직껏 길 위에 서 있네요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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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71
나해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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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아름답다. 투명한 살, 그 아래 더 붉은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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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시
오세영 지음 / 황금북 / 2003년 5월
품절


책장을 넘기며


샛바람 불어
지면은 온통 만남의 이야기다.
연분홍 처녀들의 다소곳한 기다림과
물 건너서 달려온 초록 사내들의 다정한
눈길,
마파람 불어
지면은 온통 사랑의 이야기다.
격정에 휘몰아치던 그날밤의 폭우와
땀에 흠뻑 젖은 숲들의 가쁜
숨결,
하늬바람 불어
지면은 온통 이별의 이야기다.
잿빛 노을 앞에서
쓸쓸히 손 흔들며 돌아서는 그의
빈 어깨,
된바람 불어
지면은 이제 온통 그리움의 이야기다.
백지 위의 나뒹구는 연필심처럼
눈밭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부러진
나목,
바람이 분다
운명의 책장들을 넘긴다.
다시 살아야겠다.*


* 발레리의 시구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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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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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연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려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눈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 눈을 뜨고 봐야 삶은 난해하고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7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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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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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저린 외로움, 차마 자학의 늪에 빠지지도 못하는 시인이라는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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