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느 순간 상대가 나와 닮았다고 믿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오독을 한다. 관계가 끊어지고 나서, 혹은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나서, 깨닫는다. 상대가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이었는지. 그런데 그 깨달음이란, 정말로 깨달음일까? 어쩌면 내 주제에,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오히려 만들어낸 거짓말은 아닐까? 혹은 헤어짐의 이유를 그저 나 좋을 대로 이해하고 싶어서는 아닐까?

 

 

 2.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에 수록된 단편 「파란 돌」은 '나'가 '당신'의 안부를 물으며 시작한다. 몇몇 삽화를 제외하곤 '당신'에게 편지를 쓰듯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당신'이 '나'의 친구의 외삼촌이었으며, 여자가 되고 싶어 했으며,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으며, '나'의 첫사랑이었으며,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은 '나'의 '당신'에 대한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나'가 '당신'을 특별히 회상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 시도한 날 오전부터 거쳐온 많은 사람들, 옛 은사, 옛 친구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미래를 생각하면 갑갑한 때가 있다. 어째서,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때가, 어떤 이에게는 무척 짧고 다른 이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 것이다. 그렇게 뒤돌아보는 시간에 유독 평평한 바닥에 튀어나온 작은 돌부리처럼 걸리는 사람이 하나둘 있을 것이다. 「파란 돌」의 '나'에게 그 사람은 '당신'이었다. '나'의 늙어갈 모습이 궁금하다고 말했던 사람.

 

 그는 특별히 아름답게 추억된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의 그는 어쩌면 '나'의 회상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살아있는 사람,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소설의 서술처럼 이토록 차분한 아름다움보다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못난 모습에 가깝기 마련이다. 조금은 함부로 대해도 되고. 그러니 '나'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못 들은 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관계였든, 당사자의 선택이 아닌 다른 계기로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 흔하게는 이사, 졸업, 전학, 이직, 유학…… 그리고 죽음. 특히 예기치 않은 죽음이라면 상대방을 낭만화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어떤 죽음이든 예기치 않은 죽음일 테지만, 특히 젊은 나이에 죽은 이는 대개 시간이 자신을 더럽힐 기회를 주지 않아 더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3.

 

 '당신'은 없는 시간에서 '나'는 묻는다.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묻고 답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일인가. 결국 답하는 것은 '나'가 상상하는 '당신'이지, 실제의 '당신'이 아니다. 추모가 오래 이어질 땐 죽은 사람을 제물 삼아 추모하는 사람 좋을 대로의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혜,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스트 퓨처클래식 4
세라 워터스 지음, 김지현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퀴어소설가는 누구일까? 나는 아마 새라 워터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설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어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인 『핑거스미스』는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테니까 말이다. 이번에 다룰 장편소설 『게스트』는 그 새라 워터스가 2014년에 발표한 신작이다. 국내에는 2016년에 번역되어 들어왔다.

 

   『게스트』는 '바버 부인'이라 불리던 '릴리언 바버'가 남편인 '레너드 바버'와 함께 '프랜시스 레이'와 그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 입주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으며, 새라 워터스의 작품들이 늘 그렇듯, 퀴어 서사에 정말로 충실하며 역사적 고증 또한 빈틈이 없다. 특히 작중 시간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2년인데, 이때는 여성 참정권 운동인 서프러제트가 활성화되고 있을 때다. '프랜시스' 역시 이와 관련된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국회의원에게 신발을 던진 죄로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다(p.135)'는 언급이 나온다.

 한편'프랜시스'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이웃인 '플레이팩스' 부인 등으로 대표되는 구세대와의 사고방식이 충돌하는 모습도 작품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프랜시스'와 '릴리안'이 가장 큰 갈등을 겪게 되는 이유도 이 사고방식의 충돌 때문이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은 남편 몰래, 또 어머니 몰래 밀회를 나누게 되는데, '프랜시스'는 '릴리안'에게 '레너드'와 이혼할 것을 권유하지만 그녀는 망설인다. '레너드'를 사랑하기 때문에 망설이는 게 아니다. '릴리안'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구세대의 사고방식 때문에 이혼을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릴리안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만하라니까, 프랜시스! 나도 너를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우린 서로 다르단 말야. 너도 잘 알잖아. 너야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이기도 해. 처음부터 너의 그런 점을 좋아헀으니까. 네가 그 빌어먹을 걸레를 머리에 얹고 마루를 닦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쭉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처럼 그럴 수 없어. 너랑은 입장이 다르다고. 나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할 거야. 너 말고 다른 여자는 사랑할 수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너는... 너는 나한테 싫증이 나겠지. 네타 언니 파티 날 이후 지금까지도, 나는 네가 하루가 다르게 싫증을 낼 줄 알았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 그럴 수도 없었어."

"그래도 언젠가는 싫증이 날 거야. 아마도. 렌도 나한테 질렸지만, 그건 상관없어. 남편과 아내 사이는 그냥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만약 네가 나한테 질려서 떠나버린다면, 내가 렌하고 이미 헤어진 상황에서 너를 잃게 된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

 

 '릴리안'의 말에는 '프랜시스'가 자길 떠나면 어떻게 하냐는 애절한 마음도 들어 있지만, 여성이 혼자 세상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는 애정이 질릴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도 들어 있다. 이후 둘의 사고방식 충돌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만 '릴리안'이 '레너드'의 아이를 임신해버린 것이다. '릴리안'은 자신은 '레너드'의 아이를 원치 않으니 낙태하겠다고 말하지만, '프랜시스'는 명백히 임신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건 너무 추저분한 일이야(p.387)"라고 말한다. 그러나 '릴리안'의 선택은 완고하다. 왜냐하면 '릴리안'에게 이것은 용기였기 때문이다. '프랜시스'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 하지만 '프랜시스'는 '임신이 되려면 여자 쪽에서 즐겨야 하지 않던가?(p.390)'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 뒤틀려버린 감정을 느낀다. 이런 모습은 Part 2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낯선 남성에게 "여성 참정권 운동가죠?(p.134)"라는 질문을 받았을 정도로 독립적인 모습을 고수하던 '프랜시스'는 낙태 행위를 '나쁜 짓(p.393)'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꺼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오히려 '릴리안'은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 네가 돕든 안 돕든 나는 할 거야(p.393)" 하고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국 낙태에 성공한 뒤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프랜시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너는 네가 용감하지 않다고 했었지."

릴리안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예전에 너는 용감하지 않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오늘 너의 모습을 봐, 얼마나 용감했는지."

릴리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축 늘어졌고,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바라보며 평생 누군가를 이토록 마음 깊이, 이토록 순전히 사랑하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릴리안'의 용기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발현된다. 이 직후 바로 '레너드'가 들어오고, '릴리안'이 유산한 것을 본 '레너드'는 왜 이런 짓을 했냐며 '릴리안'을 몰아붙인다. '릴리안'은 그런 '레너드'에게 "별거하자고! 그럼 내가 이 짓을 왜 했겠어?(p.417)"라는 말을 마침내 꺼내지만, '레너드'는 오히려 남자가 생긴 거라고 폭력을 행사한다. '프랜시스'는 '레너드'를 말리면서 '릴리안'에게 받은 용기를 발현시킨다. "내가 그 남자야, 레너드!(p.421)"라고 고함친 것이다. 그러나 분노에 차오른 '레너드'가 이번에는 '프랜시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이를 말리려던 '릴리안'이 '레너드'의 머리에 스탠드 재떨이를 휘둘러 그를 죽이면서 새로운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 생성된다. 둘은 패닉에 빠지지만, '릴리안'은 또 다시 이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용기를 낸다. 시체를 바깥에다 내놓아서 자연스럽게 죽은 것처럼 만들자는 말을 꺼내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그 말에 펄쩍 뛰지만, 결국 '릴리안'의 말에 따르게 된다. '레너드'의 시체를 옮겨서 집 밖 길바닥에 내놓은 것이다. 도중에 '릴리안'이 공황상태에 빠지지만 이번에는 '프랜시스'가 또 다시 용기를 내어 '릴리안'을 다그치고 다독인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릴리안'의 용기가 '프랜시스'에게로, 또 다시 '프랜시스'의 용기가 '릴리안'에게로 순환하는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의지하면서 고난을 헤쳐 나간다. '레너드'의 살인사건이 법정으로 넘어갈 때도 '프랜시스'가 먼저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자수를 이야기하는 '릴리안'을 달랜다. 하지만 '레너드'가 생전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무고한 용의자가 체포당했을 때 '프랜시스'가 자수를 주장하자 '릴리안'은 현실을 이야기한다. 아무도 실수로 '레너드'를 죽였다고 믿어주지 않을 것이며, 우리 둘이 함께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프랜시스'는 자수를 했을 때 벌어질 사건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자각하고 냉정해진 '릴리안'을 보며 믿을 수 없어 하며, 사랑이 식어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릴리안의 표정이 변하면서 얼굴이 반듯하게 펴졌다. 릴리안은 잠자코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 나오더니, 천천히, 퉁명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소매 안에서 젖은 손수건을 빼내 깨끗한 손수건으로 바꿨다. 서랍 안의 깡통에서 잔돈을 얼마나 꺼낼지 망설이다가 지폐 뭉치에 동전을 감싸서 모조리 핸드백에 넣었다. 화장대 거울 앞에 서서 얼굴과 부어오른 눈꺼풀에 파우더를 칠하고, 뺨과 입술에 루주를 찍어 바르고, 빗으로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프랜시스는 그걸 쭉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릴리안이 미적거리거나, 더듬거리거나,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주의 깊은 태도로 방 한쪽의 벽감에 쳐진 커튼을 젖히더니, 가로대에 걸린 옷들 중에서 자기 코트를 빼내고는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코트를 걸쳐 입고서 칼라를 매만져 편 다음, 앞자락에 길게 줄지어 달려 있는 많은 단추들을 하나씩, 침착하게 잠그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낙관적으로 흘러가진 않는다. 결국 지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지 못하고 거리감이 생겨, 결국 다투게 된다.

 

릴리안이 싸늘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네 생각만큼 용감하지 못하다는 점은 유감이야, 프랜시스."

프랜시스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벌주고, 그 남자애를 위해 그러는 거라는 식으로 말하진 마. 내가 벌을 받고 싶으면 켐프 경위에게 찾아가서 마땅한 벌을 받을 테니."

릴리안은 눈을 가리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결국 내가 모진 말을 내뱉게 만드네. 내가 여기 온 건, 내가 여기 왔던 건 오로지..." 그녀는 선을 떨어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위해 많은 걸 버렸어, 프랜시스. 너를 위해서 내 아기까지 버렸어. 우리가 겪은 일들, 나는 요구했던 적 없어. 만약 내가 그런 식으로 뭘 요구하고 얻어내려 했다면, 이보다 쉬운 길을 택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러기는커녕... 아니, 이거 놔. 나한테서 떨어져." 프랜시스가 침대에서 뛰어 내려가 손을 뻗자 릴리안은 그녀를 떠밀었다. "나 건드리지 마."

 

 이후 둘의 만남은 오로지 용의자인 '스펜서 워드'를 심판하는 재판장에서 이루어지며, 그마저도 쌀쌀맞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배심원단에 의해 '스펜서 워드'가 무죄를 선고받고 '릴리안'과 '프랜시스'가 걱정했던 사태, 즉 '스펜서 워드'가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서 둘의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프랜시스'를 찾아온 '릴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 "하지만 그는 죽었어. 앞으로도 영영 죽어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영영 그를 죽인 사람일 거야. 그간 월워스에서 지내는 동안 몇 번이고 돌이키고 또 돌이켜봤어. 내가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었을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했어야 지금의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다르게 할 수 있었던 행동은 딱 하나뿐인 것 같아. 그날 밤 파티 이후, 네게 키스했던 일 말이야... 하지만 지금 와서도, 그 온갖 일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아. 한동안은 너 때문에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후회할 수 없었어. 후회 못 하겠어, 도저히."

 

 '릴리안'은 또 용감한 고백을 한 것이다. 그녀는 '레너드'를 살해한 것을 인정하고, 그 죄를 평생 지고 가겠다는 선언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이 '프랜시스'와 사랑을 나누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 고백을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릴리안'은 '그녀의 두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p.736)'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그들이 감히 행복해져도 괜찮을까? 그러면 다친 사람들 모두를 모욕하는 짓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오히려 최선을 다해, 거의 의무를 다하듯이, 작고도 용감한 실천을 기어코 해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p.736)' 하고 말이다. 둘은 아마 이렇게 계속,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에게 자신의 용기를 나눠주며 살아갈 것이다. 삶이란 건 항시 용기가 필요한 법이고, 그녀들은 서로의 용기이기에.



박복숭아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동시에 기독교로 대표되는 반동성애 세력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기독교인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언급하며 동성애 척결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안의 성소수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정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이름과 같은 지넷이다. 지넷은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신 또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짙은 종교 색으로 인해 학교에서 꺼릴 정도였고 장래희망 또한 선교사였다. 하지만 지넷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달은 뒤부터 종교와 멀어지기 시작한다. 멜라니가 그 시작이었다. 지넷은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지만 엄마를 포함한 주변 어른들은 이를 눈치 채고 지넷과 멜라니가 사탄의 저주에 걸렸다며 이들을 감금시키고 강제로 회개시킨다. 지넷은 이를 거부하고 탈출하지만 멜라니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기독교인의 생활로 돌아간다. 엄마는 탈출하는 지넷을 잡지 않는다.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며 기독교에 반하는 지넷을 끝까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며 지넷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다. 그렇게 소설은 완벽한 해피는 아니지만 가능성을 열어둔 채 마무리된다.

 

제목에서도 등장하는 오렌지는 엄마의 신념을 말한다. 엄마는 지넷이 방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할 때면 매번 오렌지를 건넸다. 엄마에게는 오렌지만이 과일이고 진리이자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인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결론에서는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알고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라고 한다. 비록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그 교리가 약간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작가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같다는 점도 포인트이다. 실제로 작가도 레즈비언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완벽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경험이 반영되었다는 뜻이다. 주인공의 혼란이 정말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글씨만 읽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책을 덮었을 때도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소설의 형식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한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지넷의 생각이 주가 되어 전개되기 때문이다.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성경이나 환상 소설 같은 이야기 또한 내용 파악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성경을 알고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8부로 나누어져있는 제목도 성경에서 따온 것이고 안에 있는 작은 이야기도 성경 관련이니 만약 미리 알고 있었다면 내용 파악이나 연결이 더욱 쉬웠을 것 같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퀴어 퍼레이드의 허가는 미루는 반면 반동성애 시위는 고려한다는 기사를 봤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들의 생각보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살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기독교에서 하루 빨리 퀴어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 또한 소수자로 보아 조금이나마 배려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앨리,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여자를 찾아서
안느 브레스트 지음, 김혜영 옮김 / 올댓북스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시작은 '줄리'에 관한 것으로 시작된다. 마흔 살의 줄리는 세계적인 기업의 마케팅 전문회사를 이끌고 있으며 다정하고, 집안 살림에도 능하고 외적으로도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흔히 말하는 슈퍼 우먼이었다. 임신이 잘 되지 않는 것에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기는 했으나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줄리는 평소와는 다른. 추레한 몰골로 나의 집으로 찾아와 아이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이튿날. 줄리는 생탄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주치의는 그녀에게 '심각한 모성 고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나는 그러한 줄리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으며 그간 알지 못했던 '완벽한 여성'에 대한 줄리의 집착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계기로 아를 사진 축제에서 주관하는 '여성들의 초상'이라는 주제의 공모전에 '완벽한 여자'라는 작품을 출품하기로 결심한다. 

 

 

이 책의 목차에는 총 14명의 여성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각각 내가 완벽한 여자들을 찾아 헤메는 과정에서 만나거나 떠올린 여성들의 이름이다. 각 챕터에는 그네들과 나의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그 중, 나는 조르지아라는 여성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조르지아는 내가 기운을 차리기 위하여 진 토닉을 마시러 간 호텔 바에서 만난 여성이다. 나의 옆자리에 앉은 조르지아는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매료된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요청을 한다. 조르지아는 그것에 순순히 응해 주었고, 나는 그녀와 그녀의 방에서 사진을 찍고 입을 맞추고. 사랑에 빠졌다. 

 

 

 

" 나도 그래요. 조르지아를 만났을 때부터 난 삶 속에서 꼭 만들어 내고 싶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었어요. 만약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이 이미지는 내 삶 전체를 바꿀 수 있어요. "

_ P275 

 

 

조르지아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며 완벽한 여자를 찾아 나서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던 나는 결국 그녀의 이야기 속에 나왔던. 조르지아에 대해 알고 있을 베로니크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베네치아로 향하게 된다. 결국 베로니크는 찾지 못했으나 나는 끝내 조르지아를 만나 닷새간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 등장에 내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사고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은 건지 불쾌한 건지도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알았다. 그 여자가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내 모든 여자였다. 내가 군중을 헤치고 나가 그녀에게 입을 맞출 수 있도록 이 여자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조르지아였다. _ P330

 

 

 

퀴어. 나와 조르지아에 대한 부분을 중점으로 서술하였으나 이 책의 중점은 여성들과 그들의 이야기이다. 유색인종부터 시작하여 사회 각계층의 여성들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등의 골목 온우주 단편선 8
전혜진 지음 / 온우주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 미래, 혹은 그다지 머지않은 미래, 아이들은 이제 진화자궁을 통해 태어난다.[1] 우리의 주인공도 그렇다.[2] ‘슈슬리사’라고 하는 외계에서 온 고등생물체들이 지구에 나타난 후로 아이들은 모두 진화자궁을 통해 태어난다. 주인공 ‘나’는 진화자궁 2세대. 1세대로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부모 세대인 중년이 되었고, 막 태어난 아이들은 3세대로 불린다. 진화자궁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누가 누구의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지, 그것은 아마 재료(유전자)가 지구의 인간으로부터 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흥미로운 SF 세계의 문을 여는 첫 페이지에서 ‘나’는 기꺼이 제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발을 닦고, ‘그녀’의 가장 더러운 일을 도맡는 종복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이런 시대에 한 여자의 몸 안에서 아홉 달을 자라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처럼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하니. 그녀는 광신자들에게 구세주로, 주님의 어린 양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이사나 빈트 마리얌. 직업은 군인이다. ‘나’는 집도 떠나, 이사나가 해군 장교로 근무하는 진해로 오게 되는데, 하도 좋다, 좋다 노래를 불렀던 탓인지 드디어 그녀가 ‘나’를 알게 되고, ‘나’가 일하는 카페를 찾아온다. 그리고…… 원래 이렇게 될 일이었는지, 만난 지 네 시간 만에 둘은 모텔이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이, ‘나’는 혹시나 하고 ‘나랑 사귈래요?’ 용기를 내 보았지만, 이사나는 연애를 하기에는 군인인 본인의 조건이 나쁘다며 거절한다. 그러고는 두 달이 지나 다시 ‘나’를 찾아와 같이 보낸 밤, ‘나’는 그녀에게, 자신에게는 ‘제대로 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자연출산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열 달 배 아파서 태어나지 못한 애들은, 장인정신 없이 대충 찍어낸 공장 물건 같은 거’라고 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사나의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나쁜 거네.”

 

 ‘나’가 애초 이사나라는 이름에 기대했던 것은 역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영혼이 있는 사람, 어쩌면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사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저토록 심플한 답은 구세주가 아닌 사람의 입에서라야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사나는 진짜 영혼을 가진 구세주로서 영혼이 없는 사람을 감싸주는 자비를 베풀거나 '나'를 사도로 삼지 않고, 단 한 문장을 말함으로써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혀온 말들을 부정한다.

 

 그녀 자신이 말하기로, 슈슬리나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사나의 어머니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것과 같은 현상이 드물게 진화자궁 초기 단계에 일어난다고 한다. 기적이라기보다는 돌연변이에 가까울 뿐인지도 모를 그 현상 덕분에 이사나는 일생 동안 지긋지긋하게 광신자들에게 구세주 운운을 들었는데, ‘나’와 모텔을 나선 어느 날에도 그런 광신자들이 나타나 ‘나’를 보고 구세주를 타락시키는 ‘음녀’라고 맹비난한다. 순간, 이사나는 당신들이 하는 말이 결국 당신들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죽으라는 뜻이 아니냐며, 내가 죽으면 당신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정말로 믿는 거냐며, 그렇다면 저를 쏴보라고 도발한 후 정말로 테이저건에 맞아 잠시 쓰러지고 말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한다. ‘그녀가 나의 죄를 사하지 않고, 그녀가 나의 죄를 대신 감당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녀를 위해 대신 죽어도 좋다고.’

 

 내가 당신을 믿는다, 숭배한다, 복종한다, 가 아니라, 제목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가능한 것은 당신이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한낱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사나가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한 계기 또한 결국 자신이 구세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열다섯 어머니의 의지로 태어났음을 깨닫고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처럼. '구세주로 종종 오인받는' 이사나는 ‘나’에게, 1년에 3개월 정도만 볼 수 있는 '섹스머신 욕쟁이 군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