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열흘전에 결혼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에 대해 설명하기란 아주 복잡하다(12p)' 이렇게 시작한 소설은 외과의사 무츠키와 번역가인 쇼코를 번갈아가며 그들의 '복잡한'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복잡한 사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내와 호모 남편(16p)' 이 소설은 이 두사람이 꾸려가는 반짝반짝 빛나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1. 책상 서랍 속 고이 숨겨둔 진단서 두 통.

 
 무츠키와 쇼코의 침실 서랍장 제일 윗 서랍에는 두통의 진단서가 들어 있다. 하나는 '쇼코의 정신병이 정상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내용, 하나는 '무츠키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정략 결혼은 아니어도, 적어도 '전략적 결혼'임에 분명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전략'과 '결혼'이라는 생경한 조합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사랑이 넘친다.  쇼코는 우울증이 시작되면 무츠키에게 곤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무츠키의 애인인 곤은 단정한 무츠키와는 대조적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젊은 남자다. 쇼코는 무츠키도 곤도, 아주 좋아 한다. 무츠키 역시 쇼코를 아낀다. 쇼코가 우울할 때는 그녀를 달래주고, 쇼코가 좋아하는 술을 함께 마신다.

 

 '전략'과 '결혼'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렸을 때,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이 공동체가 일종의 '신파극'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공동체가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쇼코와 무츠키가 꾸린 가정이라는 공간은, 끊임 없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전 당한다. (아내로서의) 자각이 부족하다는 쇼코의 미즈호, 아이를 바라는 양가의 부모님. 그들은 '이게 정상적이지 않니?' 라는 말로서 끊임없이 쇼코와 무츠키를 곤란하게한다. 쇼코는 우울증이 시작되면 자학적으로 변하고, 무츠키는 집에 사람들이 놀러오면 한시간 반을 유리창을 붙잡고 닦아야 하는 결벽증 환자이다. 그러나 쇼코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왜 모두들, 애기 애기 하는건지.
예상과 달리, 쇼코는 울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지금 이대로 그냥 있어도 돼. 라고 나는 말했다.
(...)
쇼코는 정말이지 난감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들 어떻게 된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왜 지금 이대로 지내면 안되는 거야. 그냥 이대로 지내도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그냥 이대로 지내도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자연이란 말의 정의는 차치하고, 당당하게 그렇게 말한 쇼코 때문에 나는 가슴이 메이고 말았다.
(104-105p)
 


 '이게 정상적이지 않니' 라는 말은 일종의 매직워드다. 누구나 그 단어 앞에 서면 작아지고 만다. 마음 속 한 구석에 넣어둔 진단서가 하나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 진단서는 '모순된 언어(15p)'로 쓰여져있는 글이다.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최강의 창 '정상성'과 끊임없이 살아가는 끈질긴 방패 '존재'의 언어 말이다. 대개의 경우 방패는 끈질기기는 하지만 내구도가 높지는 못해서, 자꾸 부서지며 파편을 남긴다. 그런것들은 자꾸만 서랍속에 쌓여간다. 그럼에도 쇼코는 '자연스럽게'이야기한다. 그냥 이대로 지내도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하고.

 

 
2. 단정 짓지 않는 상냥함


 재미있는 것은, 쇼코 역시 무츠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쇼코는 무츠키와 그의 친구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호모라고 여자들 말 쓰는 것은 아니네(69p)" 쇼코의 말은 짐짓 무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무츠키는 쇼코의 그런 말을 그대로 되짚는다. "그녀는 호모와 성 전환 수술자를 동일시하고 있다(69p)" 무츠키는 쇼코의 말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무엇이 무츠키를 관대하게 했을까. 그것은 무츠키가 쇼코를 "내 아내는 정말이지 좀 유별나다(32p)"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츠키와 쇼코의 집에는 두 사람 외에도 다른 존재들이 있다. 보라 아저씨와 곤의 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보라 아저씨와 곤의 나무라는 것은 모두 쇼코가 지어준 이름으로, 무츠키는 그것을 '세잔느의 그림'과 '곤이 선물한 유카알레판티스페스 나무'라고 부른다. 그러나 쇼코는 꿋꿋하게 보라 아저씨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곤의 나무에게 홍차를 건넨다. 쇼코의 이런 비일상성은 무츠키로 하여금 쇼코를 '유별난 사람'으로 부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유별남은 무츠키 답게도, 아주 객관적이다. 무츠키는 쇼코의 그런 행동을 책망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대신, 아주 진지하게 대응한다.

 

"저, 우리 욕조에다 물 받아서 금붕어 풀어놓아볼까? 금붕어의 수영장. 그리고 이 끝에서 저끝까지 수영하는데 몇분이나 걸리는지 기록하는거야. 나팔꽃의 성장 기록처럼 말이야.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어느정도나 진보할까?
(...)
"금붕어 모이 먹어 볼래? 바짝 말라 있고 냄새나고 맛은 없지만, 금붕어의 기분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양하겠어, 라고 말하고 나는 타올로 발을 닦았다. 앞으로 15분이면 욕조는 가득찬다. 그렇지, 그래프를 작성하자, 라고 생각하였다. 한눈에 금붕어의 진보를 알 수 있도록, 꺽은선 그래프를 그려 쇼코에게 선물하자. 차가운 물속에서 금붕어는 분명 우아하게 수영하리라.   
(136-137p)

 
 쇼코에게 있어서 무츠키의 유별남과, 무츠키에게 있어서 쇼코의 유별남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어떤 이유 때문에, 쇼코는 무츠키를 (그리고 곤을) 좋아하고, 무츠키는 쇼코를 꿋꿋이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들의 상냥함에 있다.


"어떤 사람이야? 신랑"
"자상한 사람"
그렇게 대답하고서 끔찍하도록 기분이 우울해졌다. 자상한 사람이라니, 그렇게 한마디로 가볍게 단정짓는 듯한 말투,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무츠키는 훨씬 더. 나는 난감했다. 훨씬,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113p)

 
 아이를 가지는 게 '정상'적이지 않니? 하고 묻는 세상 속에서 쇼코와 무츠키는 서로를 함부로 '정의'하지 않는다. 둘의 언어들은 마치 언어 밖의 세상을 더듬는 것처럼, 아주 감각적이고 비일상적이다. 그들은 서로의 정체성 바깥을 더듬으며 느끼는 그대로를 상대로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듬음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빛깔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이다. '세잔느의 그림'이 '눈 앞에서 세잔느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203p)'짓게 되는 순간.

 

 

3. 반짝반짝 빛나는

 

 이 책의 제목이 반짝반짝 빛나는, 인 이유를 생각해보자. 쇼코는 무츠키와 자신이 선을 본지 1주년이 되는 날, 무츠키를 불러 곤을 선물한다. 결혼한지 1년이 아니라, 서로를 만난지 1주년 된 날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번역자 김난주씨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남편의 애인의 머리를 빨간 리본으로 장식하여 선물이라고 내미는 아내의 사랑감각이 어떻게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207p)

 


 이들의 공동체는 주위의 '정상성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고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방식으로 그 삶을 존속한다. 대개의 경우 사랑은 희생을 요구한다고 생각된다. '사랑'과 '전략'을 떠올렸을 때 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하거나, 필연적인 신파극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주위에서 접하는 사랑의 이름들이 공격적인 형상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니'. 이 소리까지 듣고보면, 머리속 한 구석의 작은 서랍이 불안하게 달칵달칵거린다. 대개의 정의 되지 않는, 언어 바깥의 것들이 서랍속에서 달달달 떨며 불안하게 요동친다.

 

 서랍속의 하얀 진단서, 어쩌면 모순된 언어이거나, 언어의 부스러기 같은 것들은 어느 서랍속이나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상냥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불안한 조각들을 꺼내어 하늘에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띄울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

 

 

 

덧붙임.

일본 소설 특유의 기묘하고 상냥한 문체는, 한편으로 이 문제가 마치 환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처럼 보이게 한다. 커밍아웃하는 사위. 정신병을 고백하는 며느리. 이 두단어 만으로도 이미 머리속에 신파가 그려지는 것은 우리가 소위 '물 싸대기'가 난무하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 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작성자: 악어새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민음사, 2013.

 

이 글은 소설 『천국보다 낯선』에 감명 받아 쓰는 추천글이 아니다. 답답해서 쓰는 글이다. 전지적퀴어시점으로 이야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꽁꽁 숨어있는 퀴어를 탐색해내려는 글이다. 『천국보다 낯선』이 '세 남녀의 이야기가 증발되는 낯선 결말'로 '新서사를 구축해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그러나 이 책에서 우선적으로 증발된 것은 실제적 여성과 레즈비언의 구체성이지 않냐며 반기를 들고, 작품의 서사는 바로 이 '은폐'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글이다. 수많은 한국 소설에서 증발된 (왜곡되지 않은) '여성'과 '레즈비언' 관계에 대해 목말라 쓰는 글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서른셋의 대학 동창생 '정', '김', '최', '염'이 친구 'A'의 부고 소식을 접하면서 전개된다.  '정', '김' 부부의 차를 '최'가 얻어타고 가며 행로는 시작된다. 진눈깨비 휘날리는 밤에 장례식장이 있는 K시를 향해 어두운 도로를 달리며, 이들은 갖가지 해괴한 일들을 겪는다. 차량 추돌 사고에 휘말릴 뻔 하고,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터널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가, 교통경찰의 기괴한 행동에 식겁하기도 한다. 급기야 네비게이션도 먹통이 된다. K시에 이 날 안으로 갈 수 있을지, 'A'의 영정사진을 마주할 수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천국보다 낯선』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린 공포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다양한 장치로 긴장감을 선사하며 그 충실한 역할을 다 한다. 그러나 전지적퀴어시점에서 보자면, 불편한 지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작품은 각 장마다 시점을 전환한다. 등장인물들은 장마다 번갈아가며 일인칭 시점으로 화자의 역할을 맡는데, 독자는 이러한 구도로 同床異夢의 진실을 읽게 된다. 문제는 등장인물들이 'A'를 회상하는 방식, 나아가 작가가 'A'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그려내는 방식이다. 

 

'정', '김', '최' 등 세 인물은 함께 있는 내내 각자 다른 방식으로 'A'를 회상한다. 대학시절 영화동아리에서 함께 수많은 영화를 보고, 논하고, 만들기도 했던 이들. 청춘을 함께한 만큼 서로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유독 'A'를 모른다는 것이다. 'A'와 어울리지 않았거나 갈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A'가 옆에 있어도 파악하기 힘든 대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A'는 '해독 불가능한 문자 같은 것…(중략)…말하자면 아랍어나 희랍어 같은 것…이해되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계(p.83)'였다. 또한 이들에게 'A'란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언제나 와전되는 중(p.124)'이며 '어딘지 무질서해 보였고 예측할 수 없었(p.106)'던 존재였다. 동창들 사이에서 'A'가 시민 단체에서 일한다, 영화판에 들어갔다, 대안 공동체에 들어갔다, 심지어는 수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 때에도 'A'는 '정말 그 모든 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p.125)'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모를 수밖에 없다. 『천국보다 낯선』은, 이들이 'A'를 모르기 때문에, 'A'가 유령이나 안개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성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쉽게 끌리는 사람(p.83)'이라며 자백하듯 밝히는 '정'처럼 다른 인물들 또한 각기 다른 방식으로 'A'를 사랑해왔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A'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며 'A'와 거리를 유지해왔다. 불완전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대상.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강렬하게 끌리고, 사랑하게 되는 대상. 이러한 맥락으로, 'A'는 작품 전반에 걸쳐 대상화된다. 

 

'A'가 은유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궁극적 메시지라는 것을 독자가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삶은 본래 'A'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니까. 다만 작가가 선택한 대상이 'A'라는 것. 'A'가 그려지는 방식이 진부하면서도 (대부분의 한국 문학에서 반복되어왔듯) 폭력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늘 조용하면서 어딘가 신비로운 여성, 아름답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여성, 끝내는 죽고 마는 결말로써 신격화된 여성. 이장욱이 그려낸 'A' 캐릭터는 한국 문학에 뻔질나게 등장한 위의 여성 캐릭터와 몹시 닮아있다.  'A'의 욕망, 'A'의 취향, 'A'의 사랑, 'A'가 생에서 꿈꾸는 것 등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된 것이 『천국보다 낯선』에는 없다. 'A'는 그저 모호하고 신비한 여성 그 자체다. 이러한 'A' 캐릭터는, 사실상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장욱이 그린 'A' 는 폭력적 클리셰다. 『천국보다 낯선』은 이 클리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장욱이 많은 청년 팬을 거느린 젊은 작가이기에 더더욱, 이 클리셰가 좀 게으르고 치사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것, 은폐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정'과 'A'의 레즈비언 관계다. 작품을 잃은 독자라면 섣불리 동의하지 못할 수 있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으니까. 작가가 꽁꽁 숨겨놨거나, 또는 작가 본인마저 제 손끝에서 뻗어나온 이야기의 분명한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을 수 있으니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정'은 'A'를 사랑했으며 'A' 또한 '정'을 사랑했다. 'A'를 향한 '정'의 감정을 굉장히 형이상학적으로 그려낸 것, '정'에 대한 'A'의 진심을 몹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작가의 문학적 기법인지 이성애 중심주의적 은폐인지 분명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전지적퀴어시점으로 포착 가능한 것은, 두 인물이 상호 간에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정'은 'A'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런데 그 진심이 상당히 추상적이다. 고백은 고백인데 손에 잡히지가 않는 고백이다. 내가 느끼기에 너는, '발음할 수 없는 외국의 문자들이 꽃처럼 피어올라 이룬 숲(p.83)'이다. '나는 그 숲을 산책하고 그 숲에 누워 안식을 취하고 그 숲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p.83)'이 좋다. 뭐, 이런 식이다. 이게 대체 무슨 고백인가. 아름답기는 하다. 허나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후에 그녀의 남자와 결혼까지 하는 사람이(!) 하는 고백치고는 몹시 아쉽다. 풋풋하긴 하나, 이것이 십 여 년 한 여자를 사랑한 '정'의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라는 점도 아쉽다. 레즈비언도 박력 있게 고백하고! 그냥 막 사귀고! 뽀뽀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차이면 접고 다른 사람 탐색할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그게 진짜 아름다운 건데 말이야.

 

그렇다면 'A'는 어땠을까. 전지적퀴어시점에서 추리해보자면, A는 자기포비아를 지닌 레즈비언 또는 바이섹슈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시절 '정'의 고백을, 'A'는 굉장히 이성애중심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거절한다. '너의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며, 대학 신입생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p.84)'는 말에서는 포비아적인 시선이 발견되며 '하지만 나는 너의 곁을 스쳐 가는 강물일 뿐이다…그리스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흐르는 강물에 잠시 손을 담글 수 있지만,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는 손을 담글 수 없다'는 부분에서는 염세적 궤변론자의 태도가 엿보인다. 어쨌든 'A'는 '정'을 거절한 것이다. 이때문에 이들의 레즈비언 관계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훗날 'A'의 진심이 밝혀진다. 물론 'A'의 진심을 밝히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밝히지 않았다. 작가가 은폐한 진실 한 조각을, 독자는 퍼즐을 풀듯 찾아 맞추어야 한다. 

 

단서는 다큐멘터리다. 'A'는 죽기 며칠 전, 친구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김', '최', '염' 세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미지들의 난해한 연속. 그 다큐멘터리의 뜻을 이해한 사람이 오로지 '정' 혼자였다. 그 이미지들이 '정'과 'A' 두 사람의 이야기였으며, 'A'가 '정'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동시에 그것은 대학 시절 주고받았던 농담에 대한 'A'의 대답이기도 했다. 농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 친구가 길을 걷고 있었어. 그중 한 친구가 말했지.
"헤이, 신발 끈이 풀렸어."라고.
다른 사람이 "나도 알아"라고 대답했어.
(…)
그리고 몇 블록을 더 걸어갔는데 세 번째 친구가 나타났지.(p.179)

 

세 번째 친구가 뭐라고 말하면 이 농담이 완성될까? 대학 시절 네 사람은 이 농담을 완성하는 놀이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정'이 건넨 답은 다음과 같다. "헤이, 넌 신발 끈을 왜 목에 감고 있어?"(p.182) 모두들 멍한 표정을 지었을 뿐 아무도 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다. 신발 끈을 자살도구로 해석한 데서 읽히는 '정'의 레즈비언적 우울을, 'A'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A'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다큐멘터리를, 즉 자신과 '정', 두 사람의 관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도 당사자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이미지의 연속―다큐멘터리라는 것으로 말이다. 신발 끈이 나에 대한 사랑의 은유라면, 나 또한 너를 사랑했다고. 어쩌면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천국보다 낯선' 형식의 작품으로 말이다.

 

빈곤한 상상력으로 여성의 육체성, 레즈비언 관계의 구체성을 제거한 데 따르는 정치적 책임이 비단 이 작품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어디 이 작품의 일만이겠는가. 또는 필자가 지적한 은폐의 지점이, 실은 작가가 고안해낸 고도의 숨은 그림 찾기일 수도 있다. 허나 퀴어가 그 숨은 한 조각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나는 이제 지겹다. 도저히 읽히지 않는 정체 모를 여자의 본심 읽어내기가…… 나는 이제 지루하다. 퀴어가 '진짜 이상한 존재, 그래서 숨겨야할 존재'로 다뤄지는 방식은 이제 식상하다. 나는 보고 싶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속시원히 밝히는 여자. 왜곡되지 않은 여자. 진짜 여자, 진짜 퀴어를 읽고 싶다.

 

 

작성자: 빅뷰티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렉스, 소년에서 소녀로 다락방N 시리즈 7
알리사 브루그먼 지음, 이현정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식적인 책 소개를 인용해 봅니다. "간성(INTERSEX), 혹은 양성(BIGENDER)이라고 불리는 삶의 이야기", "모호한 생식기를 달고 태어났고, 어쨌든 ‘고추’가 있다는 이유로 엄마와 아빠가 남자로 키웠지만 스스로 여자라고 생각하며 자란 알렉스"의 이야기라는 말을 듣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알렉스는 인터섹스 비수술 MTF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여성 청소년이었습니다. 어쩌면 퀴어문학, 특히 청소년 소설에서 다뤄진 주인공 중에 가장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것 같습니다. 개념 자체에도 익숙하지 않을 독자들은 조금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퀴어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나 다층적인 정체성을 번역 출간한 시도가 매우 반갑습니다. 알렉스가 트랜스젠더이자 레즈비언이라는 점은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잘 구분해 보여주고, 자신을 호기심 있게 관찰하는 의사에게 수술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서 비수술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글에서는 주인공 알렉스의 정체를 탐구하는 것이 옳지 않게 느껴집니다. 알렉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사람들은 늘 자신을(우리를) '교통사고 보듯' 하거든요. "안 보는 척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고, 보고서는 '아이구 세상에!'" 합니다.(55쪽) 이렇게 연민하다가 분노하다가 신기해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알렉스는 명랑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은 빠르게 손뼉치기(클래핑)를 잘 한다고 얘기하는 사랑스런 주인공을 위해, 저 역시 알렉스의 클래핑처럼 책의 장점이나 열심히 얘기해보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나'와 '알렉스'입니다. 둘은 늘 붙어 다니면서도 분열되어 있는 두 명의 자아입니다. 아주 거칠게 구분하자면 남성성 상징하는 '알렉스', 그리고 여자인 '나'는 대화하고 다투면서 일상을 함께합니다. 물론 다소 성별이분법적이고 일차원적인 구분일 수 있으나, 사실 우리 모두 양성적 자아을 갖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흥미로게 읽을 수 있을지도요. 두 자아는 많은 곳에서 의견이 부딪치지만, 서로를 일방적으로 증오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결국은 한 쌍으로 붙어 다닙니다.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왜 중요하지?
하지만 중요하다. 정말, 정말 중요하다. 어느 쪽인지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 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다시는 안 볼 사이일 때에도 사람들은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하려 든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부분이 회색 지대는 생각하지 않는다. 헛갈리면 기분 나빠한다.
판단하기 어려우면 불쾌해한다.
나에게 그건 회색 지대다. 희끄무레한 회색. 우리는, 알렉스와 나는, 얼 그레이 백작과 그레이 백작 부인이다. (23-24쪽)

한 가지 고백하자면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즉 장점^^)은 가족관계를 아주 새롭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렉스는 이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혐오범죄의 피해자가 된 후 새로 전학온 학교에서는 (공식적인) 여자아이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여학생들의 교복을 입고,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기로 한 것이죠. 이 결심을 가족들이 무던히 받아줄 리 만무합니다. 물론 그동안의 퀴어문학에서도 가족들은 끝없이 갈등했습니다. 하지만 (특히 청소년 소설에서는) 결국 사랑으로 화해하고, 부모가 자녀를 수용하는 결론이 되지요. 그런데 이 신선한 소설에서는, 퀴어한 자식을 받아들이고 감싸주는 손쉬운 결말이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자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옳고 부모는 틀린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가장 리얼한 가족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알렉스의 어머니가 무려 "공유되는 모성(motherhoodshared.com)"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남기는 상담글들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어머니 자신도, 댓글을 달아주는 다른 어머니들도 알렉스의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 어머니만 위로하는 무지를 보여주거든요. 실제 당사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정보나 진심어린 위로는 없고, 당사자들의 대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타인의 편견들만 침투하는 장면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때 모성의 신화는 깨어지고 가족의 진짜 모습이 솔직하게 드러납니다. 서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최선을 다하고있다고 믿는, 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조금 원망하는, 진짜 가족 말이죠. 성소수자인 알렉스는 사실 부모가 자신을 정말 받아들이고 있는그대로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자기위로, 나르시시즘의 차원에서 그렇게 '보이려' 한다는걸 알고있습니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성소수자의 가족관계를 조명하는 시도는 청소년소설에 많이 없는 시니컬한 태도라서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오해 말아주시길, 소설 자체는 대단히 명랑합니다!)


신간 리뷰인만큼 스포일러를 지양하려 애씁니다만 소설의 결말 역시 가족들끼리의 표면적 화해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삶을 응원하고 있어서 인상적입니다. 결국 이 용감한 청소년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대 관계"로부터 벗어날 권리가 있다. (269쪽)

 

작성자: 보배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푸트니크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러시아어로 ‘동반자’, 상당히 로맨틱하고 쓸쓸한 이름이다.

어째서 ‘동반자’라는 단어가 쓸쓸함으로 읽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작품의 제목을 이렇게 고쳐썼다. <동반자의 연인>.

어째서 모두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그렇게 고독해질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고 각각 타인의 내부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302p)

1 뮤의 연인, 스미레

우선 누구나 이 책을 읽고 주인공을 스미레, 혹은 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둔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의문을 가진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분명 스미레가 지칭하는 뮤이지 않은가?

하지만 서술자인 ‘나’를 서술자에만 국한하고 뮤와 스미레 2인 구도를 형성하면, 거기에서 뮤는 결코 ‘연인’의 위치에 있지 않다. 뮤는 절대적으로 ‘위성’이다. 그래서 완벽한 고독과 파멸을 뜻한다.

스미레는 뮤-고독한 위성의 연인을 자처했다. 때문에 뮤의 ‘저쪽’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 ‘저쪽’으로 건너갈 수도 있었다.

2 ‘나’의 연인, 스미레

진짜 주인공이 스미레도 뮤도 아닌 주요 서술자, ‘나’라고 해보면 어떨까.

작품 내내 스미레에 대한 ‘나’의 애정은 짙어진다. 그렇지만 어딘지 공허한 ‘스푸트니크’에 어울린다. 그가 하루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냉소적이고 히피한 캐릭터나 감성적인 보헤미안 캐릭터였다면 그저 그 정도에 머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냉소적이면서 몹시 안정적이고, 감성적이면서 지나치게 평온하다. 바로 이것이 그를 우주 가운데로 쏘아올렸다.

그는 서술자로 선택되었기에, 자신이 연인으로 선택한 스미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인의 ‘동반자’는 뮤가 아닌 ‘나’이다. 그의 일방적 연인인 스미레가 후에는 그를 직접 동반자로 지목하기 때문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동반자가 되면서 서술자에서 청자(독자)의 자리로 옮겨간다. 즉, 주인공=서술자=‘나’=동반자=독자로서, 전개에 따라 점점 진짜 ‘주인공’이 독자라는 가정이 뚜렷해지는 구조를 보여준 것이다.

3 스미레

뮤의 장치적 역할 중 하나는 스푸트니크를 언급함으로써 스미레를 ‘연인’으로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비트니크 대신 엉뚱하게 튀어나온 스푸트니크의 진짜 목적지는 다름아닌 스미레. 착수된 스미레는 자연스럽게 발화를 가공, 뮤에게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까지는 스푸트니크가 청자인 스미레를, 연인은 화자인 뮤를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연인’이 스미레 본인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조금 더 작품 내부로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자기의 몸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조차도 없었다.(22p)

거울은 곧잘 비추어진 나를 상징한다. 스미레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

그러나 ‘비추어볼 수’ 없기 때문에 자의식은 오히려 팽창한다.

스미레의 첫사랑은 강렬하고 파괴적이다. 스미레의 두 의식, 작가로써의 그것과 첫사랑의 열병에 빠진 인간으로써의 그것은 거세게 융합한다. 스미레는 뮤에게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사랑하는 스스로에게 몰입한다.

뮤의 새까만 눈동자 안에 비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선명한 모습을 스미레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거울 너머로 빨려들어간 자기의 영혼처럼 보였다.(56p)

이렇게 결국 스푸트니크는 뮤에게서 발화된 스미레(객관화된 청자)가, 연인은 사랑에 빠진 스미레 자신이 된다.

모든 이야기의 합치점은 이것이다. 스미레는, 그녀 자신이 위성일 수는 있지만 결코 연인이 아닐 수는 없다는 것.

그녀가 사랑하는 이에게 붙인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녀 자신에게 돌아갔다. 스미레가 썼듯이,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그녀만이 연인일 수 있었다.

이 작품에는 고독에 대한 오해의 전부가 있었고, 하나뿐인 오해를 오해의 전부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위성을 쫓은 스미레가 있었다.

‘동반자’란 누군가에 의해 칭해지는 말이다. 나는 뮤와 ‘나’를 넘어서 모두를 동반자로 칭한 주체가 바로 스미레였다고 생각한다.

스미레는 그녀의 동반자-즉 우리 모두의 연인이었다. 같은 인간이며 같은 위성이지만, 우리가 고독의 상징일 때 그녀는 사랑의 기호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어째서 ‘동반자’가 쓸쓸한 느낌을 주는지 알 수 있다.

점멸하는 존재에게 유일한 초월이 되는 다른 존재, 스푸트니크의 연인.

그는 나로 하여금 고독을 잊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다른 고독이 여기에 있다고 신호를 보내온다.

나는 거기에서 사랑 외의 다른 것을 오해할 도리가 없다.

 

 작성자: 김칠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의 우물 1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신이 이마에 표시를 한 그런 사람의 하나다. 카인처럼 오점과 표시를 가진 존재다. 네가 내게 온다면, 세상은 널 혐오할 거다. 넌 박해받을 것이고, 널 불결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죽음을 넘어서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세상은 우리를 불결하다고 할 것이다. ≪고독의 우물2≫ p.165

자신을 카인의 후예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혹은 날 때부터 자기 이마에 새겨진 카인의 낙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은 그런 낙인의 고통을 한껏 짊어진 인물, 스티븐 고든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아내와 호감 가는 사내인 남편,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 무척이나 고대했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불리던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갖는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스티븐은 어깨가 넓고 엉덩이는 좁으며 강인한 턱을 가진 아이로 자라는데 다리를 벌려 말에 타고 펜싱을 배우며 자신이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항상 남자가 되고 싶어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 타인이 선이라고 규정하는 생활양식과 전혀 다른 것을 원하는 자신의 존재에 비애를 느끼면서도 그녀는 '온전한 스스로'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었고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완전한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살아갈 수 없었던 스티븐은 자기 정체성에 죄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카인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시선은 낙인이 되어 전쟁으로 생긴 뺨의 상처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마음껏 사랑할 자격조차 박탈당한 인물의 이야기인 것이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책의 핵심 소재이자 이 책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는(것 같은) 단어 ‘여성 동성애'

나는 이 설명을 전면적으로 까진 아니어도 일단 부정하고 싶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라는 것은 ≪고독의 우물≫이 출간된 1920년대에나 적합한 말이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함 = 이성애자

여자가 여자답지 못하거나 여자를 좋아함,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거나 남자를 좋아함 = 동성애자

와 같이 지극히 단순하고 부정확한 구분은 성소수자의 개념이 세분화된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등의 단어가 편리하게도 이 시대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편리함을 한껏 이용해 명확하게 짚어보자면 스티븐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인 셈이다. 그녀 혹은 그는 언제나 남성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의 육체가 가지지 못한 남성성을 흠모하였으며 스스로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연인에게는 여성 대 여성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을 남성으로 상정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전통적인 남녀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금서가 될 정도로 파문을 일으켰던 이 작품 때문에 재판에 회부된 래드클리프는 이 책이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 윤리를 표방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성적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정체성의 문제를 화두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서 처분

'이게 당시 금서였다며?' 라고 흥미진진하게 책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혀 야하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정치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지나치게 계몽적인 단락들이 나오긴 해도) ​영화를 보는 듯 세심한 배경 표현, 75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몰입도, 금세 인물에게 감정이입 되는 밀도 있는 심리묘사가 들어차 있을 뿐이다. 단지 영문학에서 최초로 여성 동성애(혹은 그와 비슷한 것)를 전면적으로 다루었고 명성 있는 작가의 작품인데다가 '성도착증'이 '전염‘될 만큼 잘 썼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된 것 같다.

작가와 작중인물의 관계

≪고독의 우물≫을 읽다보면 자꾸 책날개를 들춰보고 싶을 만큼 작가인 래드클리프 홀이 연상된다. 작가, 짧은 머리에 넥타이, 부유한 집안 출신, 거금의 상속, 애연가, 동성의 연인. 이렇게 주인공 스티븐과 작가인 홀의 공통점이 너무 많아서 스티븐을 통해 작가를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소설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의식적으로 슬쩍슬쩍 작가와 비교하며 즐거운 오류를 범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작가 자신을 모델로 쓴 자전적 소설이라면 조금 슬플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향한 스티븐의 절규, 거부되는 사랑, 부서지는 우정.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책을 읽고 있는 것뿐인데도 무척이나 괴로웠다. 책을 읽는 내내 어린 아이처럼 해피엔딩을 꿈꾸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주인공이 진정으로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마지막엔 슬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몇 번이나 마지막 장을 들춰보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읽어냈고 결국 예감은 적중했다. 그렇게 홀은 내 얼굴에 황량한 바람을 뿌려놓고 책을 끝맺었다.

책을 덮고 나서 스페인의 곡조를 상상하며 가사를 따라 불러본다.

​아아아 야! 그대를 보기 전에 내 마음은 평화로웠다네

그러나 이제 난 고통스럽다오. 내가 그대를 보았으므로

 

 

 

작성자: 모글토리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