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지성 시인선 R 3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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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문학은 정말이지 피곤한 연인이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 라며 팔짱끼고 토라진 여자 친구 같기도 하고 “어때? 내 말이 맞지?” 어깨를 으쓱하고 승리의 눈웃음을 짓는 남자 친구 같기도 하다.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함께 읽어가는 즐거움이 시의 묘미라고 생각하는 나는 ‘미래파’가 등장하자 시집을 놓아버렸다. 어느새 시는 시인만의 것이 되었고 데이지 공주를 되찾기 위한 마리오의 여정처럼 시집 안에는 한 편, 한 편, 독자를 위한 스테이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제목에 솔깃해 책을 집어든 독자를, 황병승은 자기만의 메타포로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렇다고 시인 자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상징과 언어의 결합을 해석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라캉을 끌어들이며 글을 쓰는 건 참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냥 퀴어를 퀴어하게 읽은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녀―시코쿠에 대하여

 

  <여장남자 시코쿠>와 <시코쿠>, <시코쿠 만자이(漫才)>에 등장하는 ‘시코쿠’. 여장남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몇몇 사람들은 우선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이다. 드랙퀸인가, 트랜스젠더인걸까, 아니면 단순히 은밀한 취미…? 우리가 머리 싸매며 고민할 필요 없이 시코쿠는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1]’이라고 자신을 칭한다. 그녀가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의 대답은 ‘똥’으로 돌아왔지만 도마뱀은 쓰고 ‘찢고 또 쓴다’. 찢고 쓰고 또 찢는 행위는 어쩐지 중독적인 슬픔의 냄새가 나는데, 그런 자신에게 비참함을 느꼈는지 비참함을 느끼게 한 세계에 화가 나는 건지 그녀는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라고 역설한다. 무심코 응, 잘못이 아니지 중얼거리며 도마뱀의 꼬리가 되어 편지를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외침이다. 그러나 남자이며 여자이고, 여자이며 남자인 시코쿠를 불온하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감추거나 혹은 드러내거나 6은 9도 되어야 했으므로[2]’ ‘외로운 신사숙녀 시코쿠’는 치마를 갈가리 찢는다.

  시코쿠는 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2000)》의 헤드윅과 닮아있다. 커다란 금발 가발을 쓰고 XX염색체보다 더 요염하고 퇴폐적이게 노래하는 헤드윅은 동과 서, 속박과 자유, 남자와 여자, 정상과 밑바닥의 중간에 서있는 장벽이다.[3] 시코쿠 또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규정짓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중간자적 존재다. 시 안에서 그녀는 벽이며 다리[橋梁]이자 모든 이형(異形)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흑인은 자신을 니거(nigger)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코쿠를 선봉으로 앞세운 황병승 시의 퀴어적 정체성은 어쩌면 시집 해설에 나온 말 같이 소재의 특이성보다 향락을 강요하는 초자아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는 경우 초래되는 다른 형태의 주체성의 현현[4]일지도 모른다. 머리 아픈 이유야 어찌됐건 시적 화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나 세상을 향해 취하는 포즈는 굉장히 퀴어하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중략)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커밍아웃>[5] 부분

 

무성한 소문과 더러운 시선, 게이가 항문으로 치환되어 읽히는 부조리함에 오히려 입술을 뜯어버리고 항문으로 말할까 하는 화자의 태도가 도발적이다. 흑인이 자신을 니거(nigger)라고 부르는 것처럼 퀴어는 자신을 퀴어(queer)라고 부른다. 욕설의 전략적인 사용은 황당하지만 뼈있는 반어다. 물론 ‘소문이 싫어 고양이 수염을 잠깐 달[6]’기도 있고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고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7]’기도 하지만 때론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8]‘을 때도 있다. 불편함을 건드리는 것, 불편함과 마주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행위가 시대에 대한 일탈과 반항이며 황병승의 목적이라면, 나도 그를 마주보며 씨익 웃어주고 싶다.

 

 


[1]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여장남자 시코쿠》, 문학과 지성사, 2012. pp. 52-55.

[2] 황병승, 위의 책, <시코쿠> pp. 64-67.

[3] 헤드윅, <Tear me down> 중.

[4] 황병승, 앞의 책, p. 187.

[5] 황병승, 위의 책, p. 18

[6] 황병승, 위의 책, <핑크 트라이앵글배(盃) 소년부 체스 경기 입문(入門)> p. 102.

[7] 황병승, 위의 책, <너무 작은 처녀들> p. 159.

[8] 황병승, 위의 책,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p. 98.

 

 

 

작성: 모글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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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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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상처는 마음에 쌓이고, 어느 순간에는 절규가 된다. 절규는 시끄럽다. 누군가의 절규를 다른 사람들은 소음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의 절규에 담긴 상처를 온전히 알아차릴 수 없다. 절규는 그 자체로 날카롭다. 날카로운 것은 감싸 안기보다는 상처 입히기에 바쁘다. 절규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상처 입고 입히며 다가갈 수밖에 없다. 모두가 다 아는 그 초록창의 검색 결과에 따르면, '절규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이라 했다. 비슷한 말은 열규라고. 그래서 괴로우면 그토록 열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누군가는 절규한다. 비단 소설 속에 드러난 형태가 아니더라도, 누구의 마음속에든 절규는 존재한다. 속에 쌓인 절규는 마음을 긁고, 마음을 파내어 상처 입힌다. 그래서 '의뢰인'들은 아마도 카페 '절규'에 모였을 것이다.

 

 대신 절규하는 값, 이십일만 원.

 

 어떤 빛깔과 냄새와 무게의 고통이든 의식의 비용은 똑같았다. 21만 원. 그것은 서울 시내 산부인과에서 4주 반 정도 된 태아를 중절할 경우 드는 기본 비용의 평균치였다. 

 (157p, 첫 번째 문단 첫 번째 줄)

 

 '꽉 움츠러든 성대가 꿈틀꿈틀 움직이는(158p)' 형태로 뱉어지는 절규를 듣고 대신 내질러 주는 값, 이십일만 원. 돈으로 환산했으되 돈으로 충족할 수 없는 연약한 치유가 이루어졌던 공간에서, 소설 속 사람들은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스스로 울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에 대신 울어주는 것은 고귀한 희생임과 동시에 얄팍한 사기다. 만약에 필자가 실제로 그 카페를 마주쳤다면 아마 '뭐야 그런 이상한 것도 있네?'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필자의 절규는 아직 이십일만 원 어치에 못 미쳤던 모양이다. 혹은 필자에게는 아직 직접 절규할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악은 절규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렸거나.

 

 어쨌거나 아직 상처를 드러내는 방법을 아는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 모였고, 화자는 <혜안>과 함께 대신 절규한다. 최초의 절규는 혜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혜안이 떠나감으로써 종결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유대감이 존재했고, 또 일방적인 감정이 존재했고, 또 어느 정도는 비즈니스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176p 마지막 문단과 177p에 걸쳐 화자의 시야로 정의되어 있다. 그 관계는 식상한 듯 또 새롭다. 

 

 혜안은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자신의 사촌 동생이 울고 소리치고 온몸을 떨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중략) 혜안과 나는 서로를 이상한 청동 거울처럼 이용하는 사악한 흑마법사들에 불과했을까. 붙들고 소리치고 한 번도 우리에게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이들을 거울 위에 불러내, 목소리로 혹은 온몸으로 그 얼굴 위에 날 비린내 나는 것들을 퍼붓는. (중략) 하지만 입을 벌리고 있어도 그런 말은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소리치는 건 그렇게도 쉬웠는데. 

 (176p 마지막 문단 - 177p 첫 번째 문단)

 

 필자는 '청동 거울'이라는 표현이 참 섬세한 상징이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윤이형의 소설에서 필자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은 이러한 상징들이 상당히 감각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곱씹을수록 가슴 한구석으로 점점 파고드는 듯한 표현은, 이 소설에서 필자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다.

 

 물론 그 외에도 매력적인 부분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저번에 리뷰 했던 윤이형의 <루카> 역시도 사람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었는데, 이번에 리뷰하는 <절규> 역시도 특유의 담담함이 매력적이다. 또, 하필이면 화자와 함께했던 여자의 이름이 '혜안'인 것도 어떠한 상징을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혜안'은 화자에게 혜안을 통해 엿본 것과 같은 지혜, 혹은 혜안을 통해 엿본 것과도 같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남긴다. 

 

 절규하는 여자님, 님의 목소리는 그런 곳에만 쓰기에는 아까워요. 부디 건강하세요, 너무 탄식하지 마시고. 그러다가 후두에 이상이 생겨요.

 (179p, 두 번째 문단 끝)

 

 그건 화자에게 남기는 말이자, 독자에게 남기는 말이 아닐까. 당신의 목소리는 탄식하는 데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그 말을 듣고 탄식을 멈추어주기를.

 

 그러면 이제 약간의 쓴소리를 해보고자 한다. 어쨌거나 퀴어 시점의 리뷰이니. 이 소설에서 드러난 퀴어는 분명 주목할만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일부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퀴어다. 짧은 머리, 피어싱, 훤칠한 키 따위는 사실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동성애자 여자'의 형상에 가깝다. 기독교라는 요소와 연관되어 있는 점 또한 '교회로부터의 상처'라는 점에서 동일 선상의 지루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때로는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기 위한 장치가 오히려 몰입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 현실은 그렇게까지 철저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므로. 물론 윤이형은 혜안을 '남자'의 구실을 하는 인물로 그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혜안'은 반항하려고 일부러 자신이 사회를 통해 주입 받았던 전형적인 동성애자의 모습을 흉내 냈을 수도 있겠다. 이는 '혜안'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 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다.

 

 뱀눈나비. 가끔씩 그 창백한 얼굴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파충류의 잔인하고 공허한 눈동자가 아니라, 험악한 세계를 견디기 위해 순한 나비가 제 날개에 새겨 넣은 커다란 가짜 눈동자였다.

 (178p, 밑에서 6번째 줄-밑에서 3번째 줄) 

 

 그러니 사실 이 쓴소리는 까기 위해 깐다, 고 느껴질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필자가 굳이 이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루카>에서도 종교 때문인 갈등이 주요한 요소로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꽤 다수의 종교이며, 이래저래 영향력이 크고 막대한 권력을 가진 것은 맞지만, 글쎄. 굳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퀴어를 별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 하더라. 그런 지점에서 그래도 '이유'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이던가. 형태도 없는 불신 속에 절규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점에서. 물론, 이렇든 저렇든 썩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 내일의 절규는 오늘의 절규보다 조금은 더 줄어들기를 바라며, 언젠가는 이십일만 원의 값을 치르고서라도 절규를 내뱉고 싶은 마음을 조심스럽게 내비쳐 본다. 언젠가는, '후두에 이상이 생겨요'를 전해 들을 수 있기를.

 

 

작성:숙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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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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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아나이스 닌과 그녀의 평생지기였던 일기

 

  아나이스 닌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겐 다소 낯선 작가입니다. 그런만큼 이번 특별편이자 보너스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자 일기를 다뤄보고자합니다. 사실 서양권에서는 아니이스 닌 재단이 따로 있으리만치 그녀의 위상이 낮지 않으며, 그녀의 일기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로부터 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아마도 소설가로서의 그녀는 낮게 평가되는 감이 있고, 일기작가를 우리나라에서 다루는것은 익숙치 않은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아나이스 닌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다뤄지고 있으며, 그녀가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특별편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알아주시고, 그녀의 솔직과감한 양성애 서사를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니이스 닌은 가족을 버린 자신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식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어릴적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그 이후 죽을때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씁니다. 일기를 쓰며 자신의 재능을 훈련하게 된 그녀는, 29살때 소설가 헨리 밀러와 준 맨스필드 부부를 만나 그 시절 가장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고, 자신의 남성적 기질이자 양성애적 기질을 깨닫게 됩니다. 참고로 그녀는 초반에 프랑스어로 일기를 썼지만, 나중에는 영어로 일기를 썼다고 하지요. 프랑스 태생의 미국 소설가이자 일기작가라 그런듯싶습니다.

 

  간단한 줄거리 - 1년치 사랑의 일기, 펭귄클래식 코리아에서 출판되다.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아나이스 닌에게는 은행가 남편인 휴고가 있으며, 사촌인 에두아르도(남자)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1931년 29살이 되던 해, 아나이스 닌은 일생에서 중대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소설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인 준 맨스필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1년 여의 시간동안, 아나이스 닌은 남편, 사촌, 헨리 밀러, 준과 사랑을 나누며 그때의 이야기를 일기장에 적고, 펭귄클래식 코리아에서는 그때의 이야기를 무삭제로 과감히(!) 출판합니다. 하지만 그녀 생존 당시엔 역시 생존해있던 남편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되어, 일기를 그대로 출판하진 못했다고 합니다.

 

  아나이스 닌, 관능적인 사랑이자 양성애에 눈뜨다.

 

  일기의 첫 부분이 심상찮습니다. 아나이스 닌은 파리에서 사촌인 에두아르도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사촌은 그녀에게 얼마간은 플라토닉한 연정을 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사랑과 관능의) 쾌락을 경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아내가 있는 소설가 헨리 밀러를 만나게 되고, 사촌이 경고한 바 있는 그 비정상적인 쾌락이자 관능에 눈떠가는 자신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헨리의 아내인 준 맨스필드를 만나게 되는데, 아나이스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고, 준마저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나이스는 헨리와 준, 사촌과 남편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헨리는 내게 세상 전부를 가져다주었다. 준은 내게 광기를 가져다 주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일생에서 가장 관능적이고 뜨거운 시기를 보내게 되고, 그 시기는 여섯 권치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 여섯 권의 일기이자 1년치 일기가 무삭제로 저렇게 출판된것이고요. 따라서 성인이 아닌 사람이 읽기엔 많이 거북할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여과없이 성적인 이야기, 에로틱한 문구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일기가 갖는 의의 가운데 하나 - 단순히 성적인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녀의 일기는 단순히 자신의 양성애를 기록한 그 무엇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거기서 그쳤다면, 그녀의 일기는 그 가치가 훨씬 떨어졌을것입니다. 네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일기를 써 가며 그녀는 나날이 성숙해지고, 마침내 1932년 일기 말미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구를 남깁니다.

 

  어젯밤 나는 흐느껴 울었다. 내가 여자가 된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두 눈으로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근 1년의 시간동안 네 사람을 사랑하며, 아나이스는 '여성으로서의 자신, 양성애자로서의 자신'을 직시하게 되고, 한층 성숙해지게 됩니다. 평생 일기를 쓰며 아나이스 닌은 이런 메세지를 남기고자 했다고 번역자인 홍성영 교수님께선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여성은 모든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여성이어야 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의 우선인 여성 자신이다.>

 

 

 

작성: 환상의식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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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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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프롤로그) - 옛 영문학도, 그리스 신화에 푹 빠지다.

 

  "너는 명색이 (영)문학도란 애가 신화에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냐?" 한때 잠시 연정을 품은 바 있었던 나의 여인은 내게 이리도 질책한 바 있었다. 하기사 영문학도이면서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없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꽤 무책임한 처사긴 했다.

 

  확실히, 신화(특히 그리스 신화)와 나의 관계는 위스키와 나의 관계에 비견할만했다.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엮였던, 일종의 애증관계. 그런데 그리스 신화와 나 사이에 맺어졌던 '애증관계'가 순수한 '애정관계'로 변하는 계기가 생겼으니, 제임스 조이스가 지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다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일부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이 책을, 그리스 신화의 모태 가운데 하나를 읽고픈 충동이 들기 시작했다.

 

  원래는 이윤기 선생님께서 중역하신 민음사판 변신 이야기를 살 예정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책 목록을 뒤적이던 중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고전 그리스어와 고전 라틴어 세계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시는 바 있는 천병희 교수님께서, '직접 라틴어 원전을 번역'하셔서,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를 선보이신것이다! 지금은 소식을 알 바 없는 나의 그녀가 가볍게 던져줬던 질책이 떠오르기도하여,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책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간섭하기 이전에 쓰인 이 서사시를, 나는 가히 일품이라 할만한 번역과 함께 읽어나갔다. 서시부터 천지창조와 신들의 탄생, 네 시대... 그런데 이 서사시를 읽어나가던 중 나는 퀴어적 이야기 둘에 주목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그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한다.

 

  첫째 이야기 - 요정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티투스, 그리고 양성인간

 

  이름에서 보시다시피 헤르마프로디투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그리스식 이름)의 라틴어식 이름이자, 전령신 헤르메스와 사랑 및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온갖 산천을 방랑하길 즐겼고, 마침내 카리아 지방에 있던 아주 맑은 한 샘까지 오게 되는데, 지극히 여성스러웠던 샘의 요정 살마키스는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그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합니다. 하지만 사랑이란것을 잘 몰랐던데다, 그 요정의 구애가 부담스러웠던 헤르마프로디투스는 저항을 하게되고, 살마키스는 결국 신들을 향하여 이렇게 기원합니다.

 

  "이 바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대는 내게서 멀리 도망치지 못해요.

신들이시여, 그대들은 명령을 내리시어 누구든 그 어느 날도

나에게서 그를 떼어놓거나 그에게서 나를 떼어놓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신들은 살마키스의 기도를 들어주어 '문자 그대로'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들어주었고, 헤르마프로디투스는 살마키스와 한 몸이 되어 양성인간(현대어로는 인터섹슈얼)이 됩니다. 이제는 반쪽 남자이자 반쪽 여자가 되어버린 헤르마프로디투스는 아버지 헤르메스와 어머니 아프로디테에게, 자신이 지금 몸을 담근 이 샘에 들어간 '모든 남자'는 자신과 같은 양성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고, 그의 부모신은 기도를 들어주어 샘에 괴상한 약을 타게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이름을 쓰고 있는 당신들의 아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시어, 누구든지 남자로 이 연못 속에

들어오는 자는 반쪽 남자로 나오게 하시고,

이 물에 닿는 즉시 연약해지게 해주소서!"

 

그러자 그의 양부모(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는 측은히 여겨 이제 양성이 된 자신들의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그 샘물에 그런 괴상한 약을 탔답니다.

 

   혹시 리뷰어라든가 독자분들 가운데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 보신 분께선,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성기를 동시에 지닌 인간의 조각상을 보신분도 계실겁니다. 꼭 그 박물관에 가지 않으셨어도, 사진이나 다른 매체로 그 조각상을 접하신 분도 계실것입니다. 그 조각상이 바로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조각상입니다. 영국의 시인 스윈번은 그 조각상을 보고나서 그의 이름을 따 온 제목의 시를 쓴 바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공통기원후 2년(기원후 또는 서기 2년)에 쓰여 8년에 완성된것을 감안하자면, 옛날부터 이미 양성인간에 대한 개념이 있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원전에 쓰인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양성인간의 신화가 실려있는 바 있습니다. 태초의 인류는 두 인간이 한 몸이 되어있는 형태였는데, 그들의 오만을 벌하기 위해 제우스 신은 벼락을 내려 그들의 몸을 갈라버립니다. 이때 남은 상처의 흔적이 바로 배꼽이고, 그렇게 갈라져 생긴 남자와 여자는 맨 처음 합쳐져있던 상대의 성별이 어쨌든간에 각자 자신들의 짝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역시 역사가 수천년이 된 탈무드에서도 최초의 인간은 중성이었다고하며, 사람으로부터 여자가 분리되고 남은 부분이 남자가 되었다는 해석 또한 존재합니다.

 

  두번째 이야기 - 소녀 이피스의 변신이자 성전환

 

  크레테 땅에 위치한 도시 파이스투스에서 평민인 릭두스가 태어납니다. 이제 장성한 그에게는 아내 텔레투사가 있는데,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릭두스는 아들을 원하여, 만약 딸이 태어나거든 그 아이를 죽이라고 눈물로 명합니다.

 

   해산철이 되었을때, 이집트에서 이시스 여신으로 숭배받던 요정 이오가 텔레투사의 앞에 나타납니다.

여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숭배자들 중 한명인 텔레투사여, 네 무거운 근심일랑 벗어버리고,

네 남편의 명령을 속이도록하라. 루키나(출산의 여신)가 네 짐을 덜어주거든,

그것이 무엇이 됐든 너는 주저하지 말고 네 아이를 기르도록 하라.

나는 내게 도움을 청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여신이다.

너는 배은망덕한 신을 숭배했었다고

불평하지는 않으리라." 이렇게 충고하고 여신은 방에서 나갔다.

 

  텔레투사는 딸을 낳지만 남편에겐 신의 명에 따라 아들을 낳았다고 속입니다.

남편은 이에 넘어가 서원을 한 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이피스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이 이름은 남녀공용인 이름이었고, 이피스 또한 중성적인 외모였던지라,

텔레투사 및 입이 무거운 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피스가 딸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이는 십삼 년 동안 남자로 길러지고, 이안테란 금발의 미녀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이피스는 자신의 몸이 여자란 사실에 큰 절망을 느낍니다.

 

  "어느 누구도 들은 적이 없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사랑에 사로잡힌 나를 대체 어떤 종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신들이 나를 살릴 작정이라면, 나를 완전하게 살려주었어야지(...) 암양은 숫양에게 달아오르고, 암사슴은 수사슴을 따라다니지(...)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피스야, 왜 너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가다듬어 이 부질없고 어리석은 정염을 털어버리지 못하는가? 너 자신마저 속이지 않으려면 네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 보고 나서 도리에 맞는 것을 추구하고 여자로서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나 그들 모두보다 더 강력한 자연은 그러기를 원치 않아.

자연만이 내게 적대적이야. 보라, 고대하던 때가 다가왔고,

혼례일이 임박했어. 이안테는 곧 내 사람이 될 거야.

아니, 내 사람이 될 수 없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텔레투사는 자꾸만 혼인날을 미루지만 더 이상 혼인날을 미룰 수 없게 되자, 예전에 자신 앞에 나타난 바 있었던 요정 이오이자 이시스 여신의 제단을 붙잡고 간곡히 기원합니다.

 

  "이시스여,(...) 바라옵건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의 두려움을 치료해주소서!(...)

우리 두 모녀를 불쌍히 여기고 그대의 도움으로 구해주소서!"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여신은 자신의 제단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움직였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직접 번역된 원전을 보도록 합시다.

 

  (...) 아직 안심이 되지는 않아도 좋은 전조에 마음이 흐뭇해져

어머니는 신전을 나섰다. 그녀가 걸어갈 때 이피스가 여느 때보다

더 큰 보폭으로 수행원으로 뒤따라갔다. 이피스는 얼굴빛이

더 검어 보였고, 힘은 더 강해졌고, 얼굴 표정은 더 날카로워졌으며,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머리털은 더 짧았다.

그리고 그녀의 근력은 여인들이 보통 갖고 있는 것보다 더 강했다.

잠시 전만 해도 소녀였던 그대가 지금은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신전에 제물을 바치고 안심하고 즐기도록 하라!

그들은 신전에 제물을 바치고 감사패를 덧붙였는데,

감사패에는 이런 짤막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제물은 이피스가 소녀로서 서약하였으나 소년으로서 바치나이다.

 

다음날 아침 햇살이 넓은 세상을 드러냈을 때 (사랑과 애욕의 여신) 베누스와

(결혼의 여신) 유노와 휘메나이우스가 결혼식 횃불이 켜져있는 곳으로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소년 이피스는 자신의 이안테를 차지했다.

 

  요정 이오이자 이시스 여신의 은총으로 이피스는 소년으로 변신하고, 혼례를 무사히 치르게 됩니다.

 

  사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때 반쯤 놀랐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와 같은 고대에도 성전환을 희망했던 사람들은 많았고, 남성 동성애든 여성 동성애든간에 동성애가 고대 문헌에 심심찮게 나오곤 했지만, 이렇게 성전환이 직접적으로 나온 이야기를 읽은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남성 동성애 한정이긴 해도, 동성애는 그렇게 박한 취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장 최고신 제우스부터가 미소년인 가뉘메데스에게 반한 나머지, 헤라의 뜻에 반한 채 독수리로 변신해 소년을 납치했고, 아폴론 신 또한 히아킨토스라는 소년을 사랑하여 죽은 소년이 히아신스라는 꽃으로 피어나게 했으니까요.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자와 여자의 사랑을 가장 천하게 보았으며, 신화에서 '일부일처제' 및 '남녀간의 결혼'을 담당하는 헤라 여신이 최고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던만큼 동성애에 대한 시각은 그 당시에도 엇갈렸습니다. 당장 이 서사에서도 이피스는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피스를 레즈비언으로 봐야할 지, 트랜스젠더로 봐야할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피스가 13년 동안 남자로 길러졌고 이피스가 이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점, 다른 여성과 다른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억제하려 했다는 점, 소년으로 변한 후 별다른 심적 혼란을 겪지 않았다는 점, 자신의 마음이 아닌 여성 신체를 장애물로 여겼단 점을 감안하면 이피스를 트랜스젠더로 볼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2천년도 더 된 옛날에 이미 트랜스젠더(그것도 FTM!) 서사가 노래되었단 놀라운 결론이 이어지게 됩니다. 설마 트랜스젠더 서사가 이런 머나먼 고대에 노래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그런 듯 싶은 서사가 노래된것을 보자 반가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리 및 에필로그

 

  이번 리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라틴어에서 우리말로 직접 번역된 형태로(즉 중역이 아닌 형태로), 고대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게 되고, 거기서 양성인간 헤르마프로디투스 이야기와 소녀에서 소년으로 성전환한 이피스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전자야 말할것도 없이 확실히 양성인간 서사가 맞고, 후자의 경우는 FTM 서사로 추정됩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스며들기 이전에 쓰인 이 장편 서사시에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사유가 넘쳐났고, 저는 한때나마 마음을 주었던 그녀를 생각하며 그 사유 속에서 흠뻑 취했습니다. 그리고 고대에도 트랜스젠더 서사가 노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를 대본 삼아,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숨어있었던 양성인간과 FTM 서사로 추정되는 부분을 다뤄보았습니다. 이렇게 놀랍고도 즐거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유도해주신 나의 그녀와 무지개책갈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성: 환상의식스맨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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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훌>

배수아, 문학동네, 2006.

 

여기 '훌'이 있다. '훌'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타인이기도 한데, 어쨌든 모두 '훌'이라고 불린다. 소설 「훌」의 세계에서 '훌'들에게는 이름도 인종도 국적도 없다. 다만 화자에 의해 '훌'이라고 인식되고 불리울 뿐이다. 

 

「훌」은 동명의 소설집 『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이다. 배수아의 소설들은 본래 전통적 의미의 서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작품이 많다. 현학적이고 해체적인 배수아 고유의 글쓰기는 1990년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많은 단골독자들을 (필자를 포함하여♥)형성해왔다. 그러나 일부 작품들은 자아분열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혹평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훌」이다. 확실히 「훌」은 읽기가 여간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쉽지 않음, 해체적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지점이, 필자에게는 전지적퀴어시점을 바탕으로 몹시 퀴어하게 읽힌다.

 

「훌」에는 세 명의 '훌'이 등장한다. 나 '훌', 나의 친구이자 연인인 '훌', 그리고 나의 직장 동료인 '훌'이 그이들이다. 인종이나 국적이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기에 독자가 쉬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먼 이국의 나라에서 독일로 흘러온 노동자들이라는 것뿐이다. 나 '훌'은 자신과 동일한 이름, 동일한 기표로 불리는 두 명의 '훌'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나 '훌'은 직장 동료 '훌'에게 시시한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하고, 친구이자 연인인 '훌'에게 약을 사다주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이방의 도시를 우왕좌왕 모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세 명은 동일하게 '훌'로 불리우는가?

 

「훌」은 '훌'이라는 이름을 한 인물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인물을 아우르는 이름, 마치 일반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소설의 시점이 의도적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 근거해 「훌」은 자아분열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읽다보면 반복되는 동일 이름에 의해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겪는 독자도 있을 법하다. 「훌」은 '훌'과 '훌', '훌'이 이방의 도시에서 관계 맺는 이야기이나 딱히 군중 속 개인의 몰개성화 현상을 그리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훌'과 '훌', '훌' 등 세 인물의 성격, 취향, 취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특색 있게 그려지는데, 이에 의지해 독자는 그들 '훌'이 각기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왜 '훌'인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소설 「훌」은 성공한 듯 보인다.

 

「훌」은 이름에 대한 신화를 무색하게 만든다. 고유한 이름이란, 없다는 것이다. 「훌」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기표에 불과하다. 기존의 세계관에 의하면, 이름이란 무지막지하게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존재 개개인은 고유하며 그 고유함은 응당 존재 고유의 '이름'으로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詩 김춘수의 「꽃」 또한 기존의 세계관에 빚지고 있지 않던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고. 반면 배수아의 「훌」은 위와 같은 기존의 이름 짓기 기법을 단숨에 비틀고 부정한다. 고유한 개별적 이름들을 하나의 구덩이(hole)에 빠뜨려 전체화(whole)한 '훌'이라는 이름은, 개별적 이름이 각각의 고유한 자아로 인식되던 기존의 세계관에 의하면 자아분열에 다름아닐 것이다. 불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름을,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는 단편적 기표로 전제한다면 어떨까? 즉 이름이란 것이 생각보다 뭐 별 거 아니라면?

 

우선 사전을 뒤져보자. '훌'이라는 이름은 영단어 'whole' 또는 'hole'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whole'은 '전체의, 전부의, 모든, 온전한'을 뜻하는 형용사이며 동일 의미의 명사이기도 하다. 'hole'은 구덩이, 구멍을 뜻한다. 전체의 구덩이 또는 구덩이의 전체. 복수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전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하나의 몰개성화의 구덩이에 빠질 뻔, 한다. 그럴 뻔, 하는 것이다. 배수아는 이들을 쉽사리 빠뜨리지 않는다. 세 명의 '훌'들은 독자에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극복해야 하지만!) 저마다 고유한 다른 존재로 인식된다. 이름이 같아도 이들은 충분히 고유한 존재로 설명된다. 전체의(whole) 구덩이(hole)에 빠질 뻔한 '훌'들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다. '훌'들은 저마다의 행동거지, 발언, 취향, 개인의 역사에 따라 존재감을 드러낸다. 「훌」의 세계에서, 한 인물의 정체성은 어떠한 기표나 이름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야기에 따라 결정된다. 존재를 구원하는 것은, 이름이 아닌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는 어쩜 듣는 이 없는 무언가에 대고 끊임없이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결국은 그가 나이고, 내가 너인 이 세상에서.(「훌」)

  

언어로 소통하는 인류에게 이름 짓기란 불가피한 숙제나 마찬가지다. 끝없이 소통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개별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은 확실하게도 편리한 구석이 있다. 문제는 이름의 권력구조다. 이 세상의 '민수', '철수', '존슨'은 '지은', '혜진', '에밀리'보다 힘이 세다. '민수'는 '지은'과 결혼해야 하고 '에밀리'는 '지은'을 사랑해선 안 된다. '존슨'은 '혜진'의 나라에서 환영 받지만, '혜진'은 '존슨'의 나라에서 혐오의 대상이다. 이름의 권력구조는 존재의 우열을 결정 짓고, 때로는 이름대로 살아가기를 명령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에 의해 내가 설명된다. 배수아의 「훌」은 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정말 당신이냐고. 당신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게 맞냐고 말이다. 

 

이름의 권력이 제거된 「훌」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더이상 세계를 인식하는 주요 도구가 아니다. 그저 내 사랑, 내 친구, 내 동료를 부르는 청각적 기호일 뿐이다. 네가 '훌'이어도 '훌'이 아니어도, 너는 사랑스럽다. 네 이름이 어떻든, 너는 여전히 '향기로운 세재 냄새가 살짝 남아 있는, 새로 세탁한 이불이 아니면 몸에 두르지 않'는 너이며 '기다랗고 마른 한 팔을 침대 아래로 쭉 내리고 반쯤 엎드린 채' 잠드는 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슴에 찔리듯이 충격이' 오게 하는 너이기 때문이다. 

 

(덧: 친구이자 연인인 '훌'은 출판사 서평 등 대부분의 소개글에서 친구라고 소개되어 왔다. 이러한 세태는 명백하게도 이성애중심주의적 시선의 폐단으로 읽힌다. 나 '훌'과 또 다른 '훌'의 관계는, 비록 아쉽게도 성애적 요소는 제거되었으나 실상 연인과 다름 없는 점들이 많다. 연인 '훌'에 매혹된 나 '훌'의 감정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작성:빅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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