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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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필자는 어느 여름 이런 일기를 적었다.

 

“세상이 다 물밑이고, 나는 숨쉬는 것도 아파 죽겠고 그렇다. 도무지 잠이 안 와서 자는 걸 포기했다. 내 곁에 누워 있던 그가 생각나고, 얇은 옷 너머로 등에 와닿던 그의 숨결이 생각난다. 그때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깰까 봐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가만히 숨소리만 듣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잠든다는 건 안심일까 방심일까. 기댈 등을 내어주는 건 안심일까 방심일까, 했다.”

 

 이날 많이 아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도 다가가지 못했고, 안으려고 손을 가져다 대다가 싸늘하게 얼어붙곤 했다. 그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슬퍼졌다.

 

 한강의 <에우로파>는 소설보다는 일기 같다.

 작품의 주인공은 트랜스젠더이고, 그녀의 친구인 인아는 ‘여러 차례에 거쳐 자신의 몸을 바꾼’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만나온 인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젠 알 것 같다.’ (89p)

 필자는 트랜스젠더, 퀴어적 요소 자체를 기준으로 작품을 읽지 못했다. 제목인 <에우로파>가 서술자인 ‘나’가 아닌 인아를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아는 6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작품 내에서 그 내용이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 즉 내가 인아의 표면 아래를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작품의 일기적 특징이다. 반대로 인아는 나의 표면 아래를 알며, 그것을 돕고 싶어한다.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중략)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네가 방금 물었던, 왜 그런 델 다니면서 노래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이 아니야. 그 대답은 너에게 하고 싶지 않아. (92p)

 

 에우로파는 목성의 위성이다. 두터운 얼음층 표면을 가졌으며, 내부는 깊이 100km 이상으로 추정되는 바다라고 알려져 있다. 막연히 얼음층이 갈라지면 금세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에우로파는 그리 쉽게 갈라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다. 인아는 그런 캐릭터다. 마치 인아 본인이 부른 노래처럼.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

 

 나에게 인아는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이야말로 인아를 더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아는 나의 고백을 기점으로(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77p) 분명한 전환을 경험한다.

 때문에 나는 인아가 싫어하지 않을 만큼만 다가가 인아가 내미는 손길에 담담하게 반응하고, 어쩔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그들을 유지시키는-목성과 에우로파를 묶는 조석력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인아의 방을 나서기 전에 나는 묻는다.

 그대로 잘 거야? 불 꺼줄까?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복종하듯 나는 스위치를 내린다. 인아의 단단하고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긴다. 다시 스위치를 올려 날카로운 불빛을 불러들이거나, 저 불분명한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나는 침착하게 억누른다. (96p)

 

 때로 나와 누군가를 묶는 힘이 견디지 못할 만큼 나를 슬프게 만들지만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내가 스며들지 못한 그 표면 아래에 그들의 바다도 여전히 깊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 우리를 아직 엮어두고 있다. 간혹 어떤 관계는 어찌할 수 없음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고 어찌 말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는 ‘스며들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이다. <에우로파>는 그 어쩌지 못할 것에 대한 작품이었다.

 

 우리는 왜 그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의 곁에 남아 있는지 서로에게 애써 서술하지 않는다.

 가을날 나는 썼다. “그가 누구이든 정말 좋아한다. 좋아하기 때문에 슬프지만 이런 슬픔이라면 견딜 수도 있을 것이다.”

 

 

작성: 김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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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엄마 - 거의 행복한 어느 가족 이야기
무리엘 비야누에바 페라르나우 지음, 배상희 옮김 / 낭기열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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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결혼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동성애자 부부의 자녀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적합한 성역할 모델의 필요성, 아이가 사회에서 받을 상처에 대한 말을 꺼내면 대개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성애자 부모라고 해도 제대로 된 롤모델을 제시해 줄 수 없는 사람이 많으며 단지 생겨버렸기 때문에 대충 방치하며 키우는 인간도 많은데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 부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정도밖에 없다. 그런 대답을 하면 이제 전통적인 가정상이 어쩌구 더 나아가서 신이 어쩌구저쩌구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논쟁이 지극히 추상적인 방향으로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자료 혹은 실제적인 사례가 전무하거나, 있어도 그 양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에 대해 정말로 그런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철학적 접근보다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수많은 실험과 결과, 사례와 통계를 통한 결론 도출은 눈에 보이는 명확한 근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동성애자 부부와 그 자녀들뿐이다. 무리엘 비야누에바 페라르나우의 《두 엄마》는 레즈비언 부부 손에서 자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스페인에서 동성 커플의 결혼과 입양 합법화 문제를 놓고 공개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수많은 의견들-많은 경우 사실과 다른 의견들-이 들려왔고, 나는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희망에 떠밀려 결심하게 되었다. p. 9

 

 

이와 같은 이유로 세상에 나온 책 <두 엄마>는 화자의 말투나 스토리로 볼 때 과연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애매할 정도로 작가와 밀착되어 있다. 두 엄마의 결혼이 합법화 됐을 때, 엄마만 둘인 가족구성을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십대, 카를라를 입양하는 과정 등 시간의 순서가 역순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여동생인 사라의 시점/주인공인 카를라의 시점/두 엄마의 시점으로 장이 나뉘고 각 인물이 겪은 사건이나 감정이 일기처럼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다. 정말로 '일기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지만, 그토록 말 많은 입장의 당사자가 정작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날 것으로 볼 수 있어서 흥미진진하다. 주인공 카를라의 말을 빌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저는 언제나 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인식해왔습니다. 제가 힘들었던 이유가 저를 세상에 내보내기로 결정한 우리 엄마의 성적 지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다른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와 법과 사회적 억압, 바로 그것들이 제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언제나 저의 한 부분을 숨기도록, 더럽게 여기도록 했습니다. 그것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p. 49

 

 

두 엄마와 행복하게 자라 텔레비전 성우가 되었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 '카를라'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녀가 상처받은 이유는 엄마들 때문이 아니라 이 가족을 보호해주지 않는 법과 자신에게 엄마가 둘이라는 사실을 감춰야하는 부당한 차별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동영상이 자꾸 떠올랐는데 바로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동성 부부에게 자란 아들의 연설이다(https://youtu.be/K6SlNZAxgZo). 이런 이야기가 들려올수록 가려운 곳을 긁은 듯, 후련한 기분이 든다니 신기한 일이다. 2005년 스페인에서는 동성 커플의 결혼과 입양 합법화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었고 작가의 부모님은 드디어 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2015년 한국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이 순간 스페인도, 동성결혼 합법화도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작성: 모글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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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7
글로리아 네일러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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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우리를 봐! 구석진 책장 한가운데서 고독히, 그러나 강렬하게 울리던 테레사와 로레인의 목소리.

 

저는 리뷰를 쓰고나면 재빨리 서점에 가서 다음에 리뷰할 책을 찾아봅니다. 이번에도 이미 다음에 리뷰할 책을 사서 읽고있는 상태입니다. 특별편을 비롯한 두 편의 리뷰를 올린 다음, 저는 강남의 한 병원에서 가슴수술 부위를 관리받고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으러 간 김에 영풍문고 강남역점도 갔습니다. 이성애 문학만이 가득한 책장들 사이를 실망스런 마음으로 헤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들이 꽂혀있는 구석진 책장까지 갔는데, 제 눈에 다른 사람도 아닌 '흑인 여성'이 쓴 책이 보이는것이었습니다(이 책 빼곤 다 백인 작가들의 작품만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지금껏 제가 읽어오고 좋아했던 책들이 비흑인 남성들의 책임을 상기하고는, '이 책은 뭐지?'하는 생각에 바로 그 책을 꺼내서 살펴봤는데, 여성이며 흑인이고 동성애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이성애자 흑인 여성에게마저 배척받는 삼중고의 여인들, 테레사와 로레인의 이야기를 읽자마자 바로 이 책을 소장해야겠단 생각이, 이 책을 소개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불안했던점은, '남성 또는 비여성'이라는 제 정체성이자 마음의 렌즈가 이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에서 보이는 여성들간의 유대 및 결속(자매애), 더 나아가 페미니즘계열 작품들은, 사고방식등이 극히 남성적인 저로서는 낯선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는 과정이라든가 소감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마치 맛이 아주 좋은 이국 음식을 먹은 기분이라 해야겠군요. 버지니아 울프의 강연록을 수정, 보완하여 출간한 '자기만의 방'을 읽을때도 이런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2부 -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들

 

글로리아 네일러는 여성이며 흑인이었던 자신의 처지,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절대소수였던 열악한 처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글쓰기를 주저하다, 1977년에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읽고나서 작가로서 활동하겠다는 의지이자 자신감을 굳힙니다. 1982년에 출간되어 그녀에게 미국 도서상이란 영예를 안겨준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은 상부의 수상한 거래, 단단하고 높은 담으로 막혀 생겨난 빈민촌 브루스터플레이스에 일곱 흑인 여성들이 이주해오면서 생기는 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루며, 더 정확하게는 각 인물들의 사연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다룹니다. 여기서 제가 다룰 이야기는 양성애자인 테레사와 동성애자인 로레인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두 사람 다 흑인 여성입니다.

 

본격적으로 이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저는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이란 작품이 지닌 의의들을 먼저 나열하고자합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심지어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던 백인 여성들로부터도 소외받던 흑인 여성이 용기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출간했단점이 첫번째 의의이며, 복수 인물들의 다양한 경험을 그려내면서 흑인들도 백인들만큼이나 다양한 경험을 겪고 산다는 메세지를 전한것이 두번째 의의이며, 흑인 여성들의 열악한 삶 및 흑인 여성 동성애자들의 고달픈 삶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다루었다는것이 세번째 의의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들의 대변자이자 흑인 페미니즘 문학을 이끈 여성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이란 작품은, 역시 흑인 여성인 오프라 윈프리가 관여한 뮤지컬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이란 뮤지컬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3부 - 삼중고의 여인들 - 테레사와 로레인 - 여성, 흑인, 그리고 동성애

 

'그 두 사람이 처음에는 아주 좋은 아가씨들 같았다.'

 

사회의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다 브루스터플레이스로 이주한 테레사와 로레인 커플을 표현한 첫 문장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로레인이 레즈비언이란 사실이 간접적으로 내비쳐집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남자들의 이런 바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녀에 대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아가씨들이야.'

 

갈등은 초반에 벌써 나타납니다. 테레사가 공을 밟고 넘어질 뻔하자, 로레인은 테레사의 팔을 움켜잡고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조심해, 벌써부터 너를 잃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을 보며, 주민들은 '수상한 냄새'를 감지하고 '킁킁거리며', '수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주민들은 이제 두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죠. 특히 두 사람과 이웃하여 사는 소피는 아예 감시자 노릇을 자처하며 두 사람으로부터 수상한 징후를 포착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하여 312호에 살고 있는 두 여자는 <그렇고 그렇다>는 소문이 돌고 돌았다(...) 정답게 보이는 두 여자가 거리에서 남자들에게 무관심하게 대하는 태도도 여자들의 눈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방식을 뻔뻔스럽게 과시하는 모욕적인 행위로 비쳤다.'

 

'그러나 전에는 그녀(로레인)에게 말을 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이 지나갈 때 노골적으로 빤히 뒤통수를 쳐다보면서도 눈길은 언제나 다른 데로 피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피는 맨 꼭대기 층계에 서서 로레인이 들고 있는 종이 봉투를 살짝 들여다보려고 했다.

<장을 보셨나 보군, 뭘 사셨나?> 말투가 거의 비난조였다. <식료품이에요.>'

 

게다가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가 알려질 시 소위 '직장에서 모가지가 잘릴' 각오를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로레인에게 더 괴로웠던것은 '모가지가 잘리는 것보다' 주민들의 인정을 얻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로레인이 이번에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직장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만일 로레인의 인사조차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일은 꿈속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브루스터플레이스에서 구역 협의회가 열립니다. 이때 소피는 노골적으로 테레사와 로레인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같은 흑인 여성들에게조차 여성 동성애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비천하고 더러운 짓거리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혼이 없으며 그저 아이낳는 기계에 불과했던'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가장 저급하고 비천하게 봤으며, 영국 빅토리아 시절에서 여성은 '정숙하며 <성욕이 희박하거나 없는 무성적>인 존재'였던만큼, 여성 동성애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남성 동성애로 유명했던 소돔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여성 동성애로 유명했던 고모라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듯 여성 동성애는 철저하게 터부시되고 묻힌 개념이며 같은 여성들에게마저도 용납되지 못하는 행위였던것입니다.

 

'이 구역으로 이사 온 사람들 중에서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이 끼어 있는 것 말이야.'

 

'그런 건 주님에게 대적하는 아주 못된 짓이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브루스터플레이스에서 그런 짓이 용인되면 안 돼. 오늘 회의에서 그 문제를 놓고 뭔가 해야 되겠지.'

 

'두 여자가 주님께 죄를 짓고 있단 말이여!'

 

이때 로레인의 항변은 은빛 비수와도 같이 그들의 양심에 들어가 꽂힙니다(본문 인용).

 

'여러분하고 똑같이 집을 나서서 일하러 가는 것 말고 제가 어떤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셨나요? 대꾸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그렇게 불쾌하세요? 그게 제가 범한 죄인가요?'

 

그렇게 회의 후 충격을 받은 로레인을 흑인 남성 벤이 위로해주고, 벤과 로레인은 친구가 됩니다.

그렇지만, 벤은 결국 이 소설에서 예외적인 존재일뿐인데...

 

그리고 감시자 소피를 향한 테레사의 외침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만든다고요! 자, 여기 보여 줄게요! 테레사가 식탁으로 달려가 잘게 썬 양파를 한 움큼 집어들과 와서 소피의 창문을 향해 던졌다.'

 

어느 날, 로레인은 그녀에게 호의적인 키스와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C.C 베이커 패거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패거리는 행실이 나쁘기로 소문난 패거리였는데, 특히 주도적인 인물인 C.C 베이커는 다음과 같이 서술됩니다.

 

'C.C 베이커는 로레인이란 존재를 생각하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들을 대하는 방법으로 그가 아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여자들이 출산을 어떻게 하는지 정확히 알기 전에 그는 벌써 허리띠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작동시켜 여자들을 즐겁게 해 주거나 혼내주거나 아니면 그들이 몸을 허락하도록 유도해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존심을 지키는 중요한 생명선이었으므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여자는 하나의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의 편협함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 압축됩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오해가 집약된 대사들이죠. 이 대사들을 읽는 내내 제 얼굴은 창피함과 부끄러움, 미안함으로 벌개졌습니다. 본문의 말대로, 앞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그 인간들은 절대로 로레인과 테레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이봐. 키스와나. 저런 더러운 년하고 얘기할 때는 조심하는 게 좋아. 저년이 네 가슴이라도 움켜쥐려 들면 어쩌려고!'

 

'그래. 이 사내 같은 년아. 군대에 들어가서 진짜 훈련이나 받지 그래?'

 

'이리 와 봐. 그럼 진짜 남자가 어떤 건지 보여 줄게.'

 

'성도착자인 네가 감히 나를 비웃어? 이 더러운 년! 지저분한 네 주둥이에다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 줄까!'

 

'내 오늘을 꼭 기억해 주마. 이 남자 같은 년아!'

 

심히 유감스럽게도, 21세기인 지금도 특히 미국 흑인 여성 동성애자의 처지는 열악합니다. 어느정도냐하면은, 공공장소에서 애정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문제를 다룬 뉴스기사와 소설의 본문들을 읽으며, 조심스럽게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거나 길거리에서 저를 안아주고 가벼운 스킨십을 해 주던 지금의 게이 애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며 현실을 수용하는 테레사와, 자신도 다른 흑인 여성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로레인의 의견이 충돌합니다.

 

'그리고 우린 한 쌍의 레즈비언이지. 테레사가 그 말을 허공에다 내뱉었다.'

'(...) 그렇지만 벤 아저씨하고 이야기할 때는 내가 이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우리는 다르니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빨리 알면 알수록 너의 삶은 편해질 거야.'

'(...) 로레인은 그저 한 인간이고 싶어. 누군가의 딸이나 친구. 아니면 적이 되더라도 빌어먹을 인간이고 싶어. 그렇지만 밖에 나가면 성도착자 취급을 받고 집에 들어오면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잖아. 티(테레사의 애칭). 조금이라도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그곳뿐이야. 습기 차고 흉측한 그 지하실. 그곳에 가면 난 다르지 않아.'

'넌 레즈비언이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호모, 게이, 동성애자. 아까 그 애송이가 소리쳐 대던 것이란 말이지. 나도 그놈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넌 이 세상 모든 지하실에서 뛰어다닐 수 있겠지. 그런다고 변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거야.'

'(...) 그리고 난 그 점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아버지를 잃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하고 <다른> 건 아니잖아.'

'진짜 모르겠어? 그렇기 때문에 넌 다르단 말이야.'

'아냐!'

'(...) 그다음 날 학교에 가서 무엇을 했어, 로레인? 사물함 근처에 선 채 네 인생에 새롭게 등장한 그 사랑 이야기를 다른 여자 애들하고 나눴어? 그랬냐니까? 다른 애들이 자기 남자 친구에 대해 과시하고 처녀성을 잃게 된 이런저런 상황들을 자랑할 때 너도 끼어들어 <얘들아, 어젯밤 이 몸을 바친 친구를 너희들도 봤어야 했는데 말이지.> 하고 말해 봤어? 그래, 말했냐고? 그렇게 해 보았냐니까?'

'(...) 사물함 앞에 서서 네 인생에서 발견한 그 위대한 사랑의 주인공을 사진으로 찍어 돌리지 그랬어? 졸업 무도회에 그 여자 애인을 데리고 가지 그랬어? 응?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지? 대답해 봐.'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속삭이듯 말하는 로레인의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거야!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드디어 나오는군. 사람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아. 디트로이트, 브루스터플레이스, 그 어디에서도 안 한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한,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야. 그 말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 대화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뼈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1982년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저도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 '이성'이 아닌 '동성'인만큼, 테레사와 로레인의 다툼이 가슴아프게 와닿습니다. 그렇지만 더 가슴 아프고 처절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4부 - 교정강간

 

밤에 혼자서 외출을 하다 돌아온 로레인은 C.C 패거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젊은이 다섯이 말없이 로레인을 둘러싼 가운데 C.C는 강제로 그녀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너비가 2미터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발기한 사내들.'

 

'네년은 한 번도 이런 걸 맛보지 못했을 거야. 오늘 내가 보여 주지. C.C는 로레인의 머리채를 잡더니 청바지를 입은 자기 사타구니로 가져다 눌러 댔다. 그러고는 앞뒤로 문질러 대자 친구들이 낄낄대고 웃었다.'

 

'어때, 맛이 좋지 않아? 그러니까 네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거야. 네년에게 제대로 맛을 보여 주면 두 번 다시 계집년하고 키스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걸.'

 

물론 이 소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입니다. 엄정해야 할 비평에 '모가지'니 '개소리'라는 말을 괜히 붙이는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현실도 현실이지만, 동성애자분들의 경우, 이성에게 어떠한 연애감정이나 성욕도 느끼지 않으며, 이성과의 관계에서 별다른 쾌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성애자가 동성애게 연애감정이나 성욕을 느끼지 않으며, 동성과의 성관계에서 별다른 쾌감을 느끼지 않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느 날 저는 게이인 애인과 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남녀의 성관계 장면이나 예쁜 여자를 봐도 별 감흥이 없다고 무덤덤하게 말하더군요.

 

각설하고, 그 뒤, 충격적인 폭력과 윤간이 이어집니다.

 

'제발'

 

'오로지 창자를 찢어 놓을 듯이 마구 두들겨 대던 어떤 움직임뿐이었다. 그들이 언제 자리를 바꾸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로레인의 넓적다리와 복부는 흘러내린 피와 C.C 패거리들이 싸 놓은 정액으로 어찌나 끈적거리는지 나머지 두 놈은 그녀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로레인은 미친 상태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벤을 벽돌로 내리쳐 살해합니다. 번역자께선 이를 가부장 사회에 가하는 슬픈 복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비극이라 해석하십니다.

 

'그녀의 몸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톱으로 켜는 듯한 고통과 거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조그맣게 끙끙대며 무릎으로 기어갔다. 골목을 따라 기어갈 때 느슨하게 튀어나온 벽돌 하나가 손에 걸렸다. 로레인은 손가락을 오므려 벽돌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브루스터플레이스에서 움직이고 있는 물체를 향해 벽돌을 끌며 땅을 기어갔다. 좌우로, 좌우로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 (벤이) 입을 여는 순간, 벽돌이 그의 입을 내리쳤다. 이빨이 부서져 목으로 밀려 들어갔고 그의 몸은 흔들거리더니 담벼락에 부딪쳤다. 로레인은 움직이는 머리를 정지시키기 위해 또다시 벽돌을 내리쳤다. 벤의 귀에서 피가 솟구쳐 나와 쓰레기통과 아래쪽 담벼락으로 튀었다.(...)'

 

'로레인의 허리를 두 팔로 잡아끌자 그녀의 손에서 벽돌이 떨어졌다. 사방이 움직이고 있었다. 로레인은 악을 쓰면서 세상천지 사방에서 이리저리 달리고 소리치며 움직이는 물체들을 움켜쥐려고 손을 내뻗었다. 피로 물든 녹섹 드레스를 입은 키가 크고 피부색이 누런 여인은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제발, 제발......'

 

그렇게 테레사와 로레인의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그 뒤 구역 파티와 석양이라는 장이 이 이야기를 묻어버리고, 구역 파티 장에서 벤의 피가 튀어 묻은 담벼락의 벽돌들도 빗물에 씻기고 치워집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레즈비언분들을 대상으로 한 교정강간 및 게이분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선진국으로 알려져있는 미국에서도 이런식의 교정강간이나 (성)폭력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증오범죄나 성 소수자분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엄벌로 다스리도록 아예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달리 말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미국에서 증오범죄나 이런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는것을 뜻합니다.

 

사족으로, 제가 제 본래 성 정체성을 깨닫고 부분 성전환을 거칠때 가장 고뇌했던점이, '어떤 남성이 되느냐?'이기도했지만, '<남성 특유의 강한 근력과 힘,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을 얻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어제 어머니를 도와 20kg의 쌀을 한 손에 한 포대씩 들었던 저를 보면서, 드라마에서 한 여인을 윤간하여 임신시킨 남자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서서히 얻어가고있는 그 보이지 않는 근력과 힘, 권력을 의식하며 공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처참하게 짓밟히는 로레인을 보면서 저는 제가 C.C와 같은 성별을 공유한단 사실이 정말 수치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작성: 환상의식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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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 개정판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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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 모래사장에서 고래들이 말라죽어가고 있다. 무슨말인고 하니, 겉보기엔 멀쩡한 고래들이, 대책 없이 육지로 밀고 올라오는 거야. 매년 전 세계적으로 5건 정도가 보고되곤 하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대. 고래 귀에 기생하는 회충이 방향감각을 파괴한다는 병리학적 이론에서부터, 고래의 자살을 믿는 신비주의적 입장까지 다양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여러가지 추측들 중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이 하나 있어. 종적 기억에 입력된 제 조상들의 항로를 따라, 5천만 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육지로 고래들이 돌진한다는 거야.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 우스갯소리밖에는 안되겠지만, 그걸 내 식으로 한번 바꿔 말해볼까? 아마도 고래는 낙타를 사랑하고 있었떤 걸 거야. 사막에 사는 낙타 말이야. 왜, 알다시피 고래도 포유류잖아. 유전자적으로 끝까지 올라가보면 낙타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바다에 사는 온갖 고래 중에 몇 마리가 낙타를 그리워한 거라구. 그래서 백사장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거야. 물 한방울 없는, 먼지투성이의 사막을 향해 더이상은 다가가지 못한 채,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하겠지.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치부하면서. 기껏 인심을 쓰더다도, 안타까워하는 정도일 뿐이야. 고래가 낙타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모르고, 까끌한 모래알을 씹어삼키며 기다리고 있는 낙타의 어두운 고독은 상상도 못하면서. (39-40p)

 

 

 

 

01. 왜 여기와서 죽었니?

 

 

 '백사장에 고래가 죽어있었다.'로 시작하는 시를 본적이 있었다. 아마 교보문고 어느 구석에서 신춘 문예 시집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스트랜딩 증후군'이라고 한다고 그 시는 친절하게도 작은 별을 붙여주었지만, 그것의 이름보다는 상상되는 그 풍경에 나는 압도당했다. 백사장 위에 배를 드러내고 죽어있는 커다랗고 매끈한 몸뚱이의 고래들, 고래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그 기이한 풍경. 내가 만약 그것을 직접 발견했다면 나는 그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죽음의 풍경에 압도 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스트랜딩 증후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무시무시'한 광경이 되었다.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낯선 풍경. 어쩌면 그 고래들의 곁에 다가가 그 매끄러운 꼬리에 귀를 대고 물어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얘, 고래야. 왜 여기까지 거슬러와서 죽었니? 


 그들의 죽음이 미지에 쌓여있기 때문에, 우리의 몫으로 남은 것은 '사인을 더듬 거리는' 것 뿐이다. 우리는 상상하고 재구성한다. 거기에는 아마 고래가 들었다면 비웃어 마지 않았을 온갖 낭설들이 함께 일지도 모를일이다. 아, 그런데 어쩌면 이건 '퀴어'의 일과 좀 비슷하다. 커밍아웃 이후에 재구성되는 퀴어의 삶과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 걔는 왜 게이래? 아버지 유약하고 어머니가 기가 쎘대? 어릴때 성폭행을 당하거나, 근친 상간적 망상에 시달렸대? 아하, '프로이트'와 '동성애'라고 N모 포탈에 검색하니 이런 기사도 나왔다. "동성애 사조, 신마르크스주의 때문(1)" (!)


 한번도 퀴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퀴어문제와 맞닥드릴때, 어쩌면 그들은 이 사안을 모래사장 위에 자의로 올라와 죽은 고래만큼이나 기이한 것으로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말이다. 너희는 바다 생물이잖아? 그런데 왜 자꾸 여기에 와서 죽는거야? 그냥, 바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면 안되겠니? 글쎄, 그런데 흔히 사인을 왜 더듬더라? 용의자를 밝히기 위해서.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그, 왜. 수사물을 보면 흔히들 이런 표현을 쓰지 않던가? "사건의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추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바리에이션도 있을 수 있겠다. "마지막 조각이 맞아 떨어졌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이교도의 풍경>은 주인공이 육개월전 자살한 친구인 문화비평가 구문모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유품을 '주선욱'이라는 남자에게 전해 주기 위해 옥해로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구문모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나'에게, 너만큼은 나를 온전하게 이해해주면 좋겠다며 자신의 어떤 공백에 대해 채우기 위해 옥해로 가달라고 말한다. 그 한조각에 대해 구문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는 내 어떤 부분-그냥 한 조각이 아니라, 그 한 조각의 부재로 인해 나머지 모두가 소용없게 될지도 모르는-에 대해 명백히 모르고 있어. 나는 나의 공백을, 나의 가장 따듯한 벗인 너에게만은 채워주고 싶어. 하여 완성된 그림으로, 온전히 '그것'까지를 포함해서 날 이해하고 회상해주기를 바라는 거야.(34p)

 
 미리 스포일러를 하자면, 구문모의 한 조각은 (예상했다시피)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숨겨야 한다는 그 근원적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사실 함부로 차치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퀴어함'이 단순한 한조각이 아니라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한 조각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혹은 누군가의 퀴어의 문제 앞에 서게 되는 것은 예컨대 이렇다. '종적 기억에 입력된 제 조상들의 항로를 따라(40p)'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02. "스스로 고아가 되어 이교도를 완성하려는 그 불온한 향기에 코끝이 시리다"(37p)

 


 옥해에 도착한 주인공은 주선욱을 만날 수 있기는 커녕 주선욱의 여동생으로부터 냉대를 당한다. 당사자인 주선욱은 이미 집을 비운 상태인데다가 주인공을 만날 생각도 없고 문모의 유품을 받을 의향도 없다는 것이다. '돌아가세요'. 하지만 주인공은 막무가내로 주선욱의 집에 하루만 머물겠다며 청한다. 그리고 그날밤, 주선욱의 여동생을 통해 문모가 게이였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말을 잃어버린다. 구문모라는 인물에 대한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 한조각으로 인해 주인공의 세상은 완전히 낯설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퀴어의 커밍아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사적 영역의 문제 아니니? 나는 그것을 알고 싶지 않았어. 대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거야? 그렇게 말하면 네가 좀 더 편해지니? 네가 편해지려고 남을 고통스럽게 해야겠니? 그러나 실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하는 것이 자신이 퀴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반 퀴어적인 문화에서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떨어져나오는 일이다. 바다에서 살고 있던 고래가 모래사장의 길을 선택하는 것 만큼,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공동체를 빠져나오는 일이며, 자신을 이교도로 정체화하는 일이다.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불온한 일'이며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이교도의 조각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낯선 세계를 접하게 된다. 종교개혁자이자 개신교 출발점이 된 루터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으리라. 루터는 자신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수 많은 고행을 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고, 결국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 인해 가톨릭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길 요청했다. 그로 인해 카톨릭에서는 불합리한 전승들이 수정되었고, 개신교라는 새로운 방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옥해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모가 주인공에게 맡긴, 원래는 주선욱에게 갔었어야 할 문모의 유품을 뜯어본다. 거기에는 고래가 그려져있는 판화 원판이 들어있다. 문모는 편지를 통해 "하나의 진실로 하여 다시금 여러장의 진실을 양산할 수 있는 방식(56p)"이기 때문에 판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판화에 그려져 있는 고래를 통해 문모가 주선욱을 정말로 사랑했음을 깨닫고는 "이제 이 엄연한 사랑을 나는 무어라 부를까(58p)" 하고 말한다. 문모가 퀴어라는 사실은 문모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자, 여러장의 진실을 양산할 수 있는 방식이 된다. 퀴어가 우리 곁에 실존한다는 것, 사회에서 고독한 경험을 한다는 것, 야망을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장을 연다. 주인공은 기차 안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앞으로는 누구를 만나든,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리라" 문모의 조각을 맞추는 순간, 주인공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03. 당사자 되기

 


 우리는 어떤 현상에 대한 수많은 '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맞닥드렸을 때, 너 대체 왜 여기에 있니? 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막장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던 모 드라마의 ost도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가.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해~" 그러나 세계는 수많은 존재들이 함께 있는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현상들과 존재들과 맞닥드릴수밖에 없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침묵속에 죽어가지 않도록 그들을 대화의 상대로 여기는 것 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분을 예로 들어 누군가의 목소리를 쉽게 무시한다. 퀴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우연 때문이라고 믿어버리거나, 개인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퀴어를 자신의 의식 범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경우가 이런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눈돌림은 단지 그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느 존재의 혹은 어느 사태의 가장 중요한 어느 조각을 누락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작 아는 체하지 않는 게 아냐. 자신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온당한 기회를 박탈하는 편견들이지.(56p)"

 

 퀴어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퀴어인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다. 당사자가 퀴어임을 밝히기 어렵기 때문이기도하고, 당사자의 퀴어성이 마케팅이 되어 단순히 한순간의 '아, 그랬구나'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의 한 당사자로서 위치되기 보다는 '퀴어' 자체가 어떤 코드로 소비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야기 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한국 문단의 거의 유일한 커밍아웃 당사자 작가인 김비 씨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우리 같은 것들의 이 작은 이야기들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슨짓이든 해야겠지. (..)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게 할 수있다면(2)" 하고 말한다. 퀴어퍼레이드는 매해 열리고, 규모가 커져간다. 그래, 이를테면 육지의 단단한 측면으로 자꾸만 몸을 가져다 부딪치는 고래들이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 집중 좀 하자. 그런 고래들이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너는 왜 존재하니? 라는 물음보다 먼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도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해? 라는 물음뒤에, 굳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해? (나 불편하게) 같은 괄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반성해보는 건 어떨지? 그들에게 자꾸 낭설을 가져다 붙이는 대신에 그들의 존재를 그냥 인정하고 그 조각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비출 수 있는지를 한번 보는 건 또 어떨지. 어쩌면 그 속에서 사막에 길을 내고 모래를 헤험치는 고래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지? 

 

"세상의 모든 사랑엔, 틀림없는 당사자들이 있다. 그것이 고래와 낙타의 사랑일지라도 그러하다." (58p)

 


덧붙임.
이 소설의 작가인 이응준씨는 원래 시를 먼저 쓰셨다고 한다. 그래서 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조금 평면적일 수 있다. 오히려 아름다운 표현과 비유들을 읽는 재미가 있었던 책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1) 크리스천투데이 2015. 06. 02자 기사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83597
(2) <나나누나나>(2006)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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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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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집 <파씨의 입문>에 관해서라면.

 작가의 말에 실려 있는 단정한 문장처럼,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아무도

 아무도

 뿐이었다.

 

 <파씨의 입문>에 실린 아홉 작품들은 모두 견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번에 리뷰할 작품은 계획대로라면 수록작 <뼈 도둑>이었지만, 찬찬히 읽어나가다 보니 한 작품으로는 아쉽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욕심을 내 세 편의 작품을 동시에 얘기하려고 한다. 이 리뷰를 통해 어쩌면 당신도 세 작품 모두를 읽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시작하기에 앞서 이 리뷰의 소제목들은 모두 작가의 말에서 빌려왔음을 미리 밝힌다.

 

0. 여기 묶인 아홉 편의 이야기

 먼저 순서대로 소개한다.

 우선 <양산 펴기>(이하 <양산>). <양산>은 ‘나’의 눈에 비친 민생의 소리에 관한 이야기다. 혁명적이거나 정열적인 시선은 아니다. 그저 장어 구이를 먹거나 지구본을 사기 위해 일을 하고, 카메라에 내 모습이 찍혔을까 궁금해하고,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속으로나 한 번 퉤 뱉는 것. <양산>에는 모든 일상이 더없이 비일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다음은 <디디의 우산>(이하 <디디>)이다. <디디>는 디디와 도도, 그리고 그들의 오랜 친구들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해 말한다. 디디와 도도는 우산으로 이어져 한집 아래 사는 사이다. 디디는 경기가 어려워져 정리해고를 당할 위기에 놓이고, 도도는 방수복을 입고 공항 화물센터에서 일을 하다 만성 발진을 얻는다. 그들은 쉽게 “멈추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내 순진한 듯이, 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이 가운데 어느 문제가 가장 문제라서 돈이 항상 문제가 된다는, 뭐랄까 좆같은 답이 나오는 걸까. 나 오늘 종일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디디>, 175p)

 마지막으로는 <뼈 도둑>, 죽은 연인의 뼈를 찾으러 가는 남은 연인의 이야기. 연인은 둘 다 생물학적 남성이다. <뼈 도둑>에서는 혐오가 남긴 자명한 폭력의 흉터들을 볼 수 있다. ⌜장의 장례식장에서 장의 가족들은 그에게 친절했으나 그만 가주길 바라는 눈치를 숨기지도 않았다.⌟(<뼈 도둑>, 202p)

 

1. 인간의 꼴 : 읽는다, 라는 말은 칠한다, 라는 말과 분명 다르다

 <파씨의 입문>(이하 <파씨>) 수록작 중 주인공의 성별을 직접 나타낸 작품은 오로지 <뼈 도둑>뿐이다. <디디>의 경우 ‘오라비’, ‘시집’, <양산>의 경우 ‘사촌 누이’라는 호칭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별을 암시한다. 바로 이것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소설을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성(sex)을 가늠하고 있었고, 이윽고 책을 덮었을 때에야 내가 지나치게 편협했음을 깨달았다. 바로 시스젠더-헤테로 중심적 사고 말이다.

 어째서 “화물센터 기내식을 담당”하는 도도가 “오라비”를 가진 디디와 함께 산다고 해서 당연히 남성이고 연인일 거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걸까? 어째서 “투덜거리며 내게 파고드는” 녹두가 “사촌누이”를 가진 ‘나’와 같이 산다고 해서 여성이고 가족이겠지, 추측해버리고 마는 걸까?

 그들은 단지 인간의 꼴,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껏 오해해버린 채로 독서를 끝낸다면 우리는 작가의 ‘틈’을 읽을 수 없게 된다. ‘해석의 자유’로 용인할 법한 오해들이 유달리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가가 말했기 때문이다.

.

 아무도

 

 라고.

 

2. 아무도 :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러자 곧 성(sex)이 암시된 <뼈 도둑>, <디디>, <양산> 주인공들의 성(gender)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나를 부르라.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다.⌟(<뼈 도둑>, 183p)라고 말하는 조에게서는 ‘남성형’ 외의 어떤 ‘누구’라는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조라는 인간은 누구인가? 단지 홀로 남은 게이인가? 젠더퀴어일 가능성은 없을까? …… 많은 상념을 거치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조는 --이다.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또한 <디디>의 경우, ⌜디디와 도도는 그런 밤이 싫지 않아서 세상이 끝난다, 우리가 마지막이다, 농담을 하며 덤벼드는 것처럼 몸을 섞었다.⌟(<디디>, 166p) 그들에겐 ‘연인’이라는 증거가 없다.

 연인의 증거란 무엇인가? 몸을 섞거나 마음을 섞거나 제도로 섞이거나, 많은 길이 있겠지만―흔히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하듯― 단순히 정의하자면 연인이란 그들이 연인임을 실재하는 단어로 말할 때 가장 오차 없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연인이라 말할 확신은 불분명하다.

 디디와 도도는 디디와 도도. 빌린 우산을 잃어버린 디디와 잃어질 우산을 빌려준 도도.

 

3. 풋내기 인간으로서는 분발하고 있다 : 냉소 혹은 해소

 <양산>의 주인공 ‘나’는 바자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집회가 열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금세 하나의 소리로 겹쳐든다.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웬 말이냐 자외선 차단 노점상 됩니다 안 되는 생존 양산 쓰시면 물러나라 기미 생겨요 구청장 한번 들어보세요 나와라 나와라 가볍고 콤팩트합니다 방수 완벽하고요.⌟(<양산>, 144p) ‘먹고 사는’ 이야기인 것은 똑같은데도 어쩐지 각각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또 서로가 애써 부대끼는 외면들이 공존한다. 사고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과 사고 팔아 먹고 살기 위해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행사 멘트를 중얼거리는 ‘나’에게 녹두는 시(詩)냐고 묻는다. 그러자 ‘나’는 노래, 라고 대답한다.

 시를 쓰는 필자는 고민했다. 시와 노래의 차이란 무엇일까. 요약해보자면, 시에 음정을 붙여 더욱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노래, 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흥(興)이 더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게 되지 않나. ‘나’에게 그 목소리들은 어째서 노래가 되었을까. 현 사회를 해학적으로 말하기 위한 표현이었다는 해석이 정석이겠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나’는 하루짜리 일터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집회에서도 어쩐지 붕 떠 있다. 그건 ‘나’가 문자 그대로 퀴어한 존재여서, 라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외부는 ‘나’에게 어정쩡하기만 하다. 어디에도 마땅한 내 자리는 없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외부의 상황은 하나같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나는 그저 여기에 붙박이고 싶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일종의 퀴어함을 상정하는 인물이면서도, 지극히 공감할 만한, 평범한 인물이다. 자기 스스로와, 자기의 영역-녹두를 그저 말짱히 지키는 데에 신경이 곤두서는. 그래서, 그날의 일을 써서 남기지 않고 흥얼거리며 흘려보내 버리는 것이다.

 

 <뼈 도둑>의 경우 ⌜개를 훔쳐볼까. 개를 먹어볼까.⌟(<뼈 도둑>, 199p) 여기에서 하나의 안타까운 분발이 발견된다. 조는 결코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다. 담담하게 서술하는 어조와 모든 것을 선선히 체념하는 태도가 그렇다. 오히려 그는 폭력에 허물어진 인간이었다. ⌜장이 잔인한 말을 동원해 그걸 지적하자 그 노인은 허를 찔린 것처럼 웃다가 산 개구리를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씨발 장처럼 말해보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뼈 도둑>, 186p)

 조는 폭력을 감내하려 애썼고, 고통을 끌어안고 물러나려 했다. 그렇지만 방파제와도 같던 연인이 죽은 후로는 그마저도 설상가상일 따름이다. 이제 아픔은 모두 조의 몫이다. 그의 억압된 감정이 벌컥 솟아나오는 장면이 바로 위의 것이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감정들은 깊이 가라앉아 가장 열악한 고요로 고여든다. 그것은 작은 계기만으로도 순식간에 폭발해 버린다. 조에게 연인과 손을 잡고 걷던 날을 회상하는 행위는 일종의 기폭제인 셈이었다. 무력해진 스스로와 자신을 무력하게 몰아넣는 세계에 대한 증오를 더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는 개를 죽이지 못했다. 다행스럽지만 슬픈 결과다. ⌜저걸 먹는다고 생각하자 그는 토기를 느꼈다. 개를 먹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는데 막상 저걸 먹는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뼈 도둑>, 200p) 작가는 비극이 비극을 부르는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비통을 부각시키면서도 그를 지켜낸다. 조는 마침 나타난 개의 주인과 몸싸움을 벌이는데, 개의 주인은 도망친 조를 더 해코지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다 사라져버린다. 그가 기어코 개를 죽였다면 또 어떤 참극으로 번져나갔을지 모른다.

 충동을 무너뜨림과 함께 조는 무언가 놓쳐버린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어떤 것도 되돌려줄 수 없고 해소할 수도 없다, 는 기분. 그런 ‘깜깜함’ 속에 그는 연인의 뼈를 찾으러 간다. ‘흰 눈’을 꾹꾹 밟으며. 홀로 남은 그에게 연인의 뼈 한 조각, 뼛가루 한 움큼은 그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결의의 표식이 아닐까.

 

4.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어차피 모두 한낱 ‘풋내기’ 인간에 불과한데, 이토록 분발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가는 하나하나의 삶,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인 것에 대해 건조하게, 묵묵히 말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저 각자마다 분발하는 인간일 따름인데 그들의 이야기는 왠지 비현실적이고 낯설다.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듣다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이 사람들도 이상한 것 같다. 그들은 ‘퀴어’일까? 독자는 혼란스러워진다. 바로 그 모순적인 느낌이 오히려 이야기의 ‘퀴어함’을 상쇄하며, 퀴어함을 잃은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익명성을 강화한다. 어느덧 인물과 사건은 마치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지척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파씨> 수록작들은 대부분 네 단계를 따른다. 첫 번째, 인간의 이야기. 두 번째, 이상하지 않은 인간의 이상한 이야기. 세 번째, 이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상하다―‘이상한’ 인간은 아무리 이상한 것을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그러므로 어떤 이야기도 이상하지 않게 된다. 네 번째, 그 모든 것이 섞여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만들어진다.

 즉, ‘퀴어하다’는 말이 더는 ‘기괴함’을 뜻하지 못하게 된다.

 

 결코 그것은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보이도록, 그렇게 느끼도록 서술되었을 뿐이다. 나는 황정은의 이런 점에 주목해 글을 썼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퀴어, 나는 그 단어가 제법 위험한 구분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기묘한, 괴상한이라는 말로 과연 타인을 쉽게 수식해 버려도 괜찮은가 하는 것이었다.* 황정은은 그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한다. 그들을 ‘아무도’라고 표현하면서.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이 책은 퀴어라는 단어의 본질에 대해 여러 방면에 있어 중요한 책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이다지도 돌이켜볼 틈을 남겨주고 황정은은 소설집을 끝맺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아무도

 뿐이다.

 

 

작성: 김칠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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