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이청 외 지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1.

 

읽고, 쓴다.

그럼에도 읽고, 쓴다.

 

올해도 (나쁜 한국식으로 벌써)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한 해의 성과를 억지로 확인해야 하는 연말을 겨우 보내고 나면, 이번엔 목표를 강제로 세워야 하는 새해입니다. 서로를 위로할 틈도 주지 않고 시간은 가장 꼿꼿하게 흘러갑니다. 이런 와중에 책상 앞에 앉아 (혹은 저처럼 침대에 엎드려) 읽거나 쓰거나 읽고 쓰는 여러분, 새해를 어떻게 맞으셨나요.

 

왜 책을 읽는지 모르겠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교적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습니다. 저의 새해 풍경입니다. 분명 책은 읽어도,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읽거나 쓰는 일은 적어도 전력을 다해 몰두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대충 읽고 대충 쓰는데도 가끔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막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당연히 어떤 직업과 취미를 가진 누구에게나, 내게 난데없는 질문을 던진 그 지인에게도, 그런 순간은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선 유독 읽고 쓰는 일 때문에 막막해지는 당신들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반가운 메시지를 던진 김봉곤의 신춘문예 당선작 때문이죠.

 

“전 세계 LGBT 친구들 모두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연대와 지지의 손을 내밉니다."

 

보수 언론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접하리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따뜻한 놀라움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 읽은 중편소설 <Auto>는, 가끔 우리를(적어도 저를) 웅크리게 하는 퀴어 정체성 + 애서가 취향에 톡톡 어깨를 두드려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반가웠고, 공감이 갔고, 그러면서도 새로웠습니다.

 

 

 

2.

 

<Auto>는 오토픽션autofiction의 형식으로, 삶의 각종 단면과 감정을 내밀하게 묘사하는 퀴어 문청의 자전적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오토픽션 글쓰기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메타소설이기도 합니다. 게이 작가 지망생 ‘나’가 사랑하는 ‘그’와 보내는 일상, 이별하는 날, 글쓰기 수업에서의 일화, 유년 시절의 기억 등을 조각난 글로 풀어내면서, 동시에 ‘이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해 첨언하며 글 속의 글로서 ‘커밍아웃’합니다. 이처럼 화자 ‘나’는 ‘이 글’을 쓰는 저자이며, 그렇기에 <Auto>를 쓰는 작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오토픽션, 메타소설 같은 (쓸모없는) 용어를 모른다 해도,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형식의 차이라는 점은 알아챌 것입니다. 영화의 한 신scene같은 조각글이 늘어서 있고, ‘~것 같다’라거나 ‘~하고 말았다’처럼 (문단에서 기피하는) 불확실한 만연체가 이어지며, 사전을 직접 인용하거나 ‘ㅋㅋㅋ’가 포함된 휴대폰 메시지 내용을 삽입하기도 하죠. 신춘문예 심사평에서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세대 작품의 점(點)적 구성의 흐름”과 “점프 컷(장면의 급전환)과 소격효과 등의 기법”이 언급되었는데요.5) 사실 이런 형식은 이전에도 많이 쓰였고, 이제 혁명적일 만큼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법이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봉곤 소설의 형식적 기법은 새로움이 아니라, 회생(回生)을 위한 것입니다. 소설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축조된 구조물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벗어나, 그 질서에서 떨어져 나간 언어와 삶을 되살리려는 복원의 시도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auto>의 글쓰기는 사랑을 살려내려 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정의한 사랑은 (중략) 올 들어 그 범위는 다시 ‘이성’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나의 동성애 중심적 사고를 반성하며, 다른 시각으로 ‘사랑’의 사전적 정의를 이해해 보려 상상력을 발휘하고 의미를 쪼개고 합쳐 보아도, 사랑을 정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느낀다. 정의해야 할 것이 책도, 사과도, 영화도 아닌 바로 사랑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불능일지도 모른다. 이 불능에 가까운 정의를 전형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협소하게 뜻을 재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사전의 기능에 역행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사랑에 보편을 요구하고 정의하려는 것은 언어의 영역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화자는 사전 등재를 위한 경제적인 단어로서의 ‘사랑’ 바깥에 존재하는 사랑을 증명합니다. “도저히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나와 나의 남자친구”의 사랑을 <Auto>의 언어를 통해 노출합니다. 언어에서 탈락된 사랑이 제 언어를 안고 회생하는 순간, 우리는 언어와 글의 의미를 질문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것을 쳐낸 언어의 축조물, 그 완벽함을 위해 희생된 공백에는 무엇이(누가) 있을까.

 

미니멀리즘 기법을 강조하는 글쓰기 수업 교수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수는 세월호 희생자의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써오라는 지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립니다. 좋은 글쓰기에 필요한 테크닉을 자신감 있게 설파합니다. 반면 ‘나’는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절망을 어떤 언어로 써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타인의 절망을 언어로 옮기는 작업은 공백을 삭제하는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을, ‘나’는 통감합니다. 그렇기에 나(Auto)에 대한 글을 쓸 수밖에 없으면서도, “왜 난 고작 나이며, 나의 기억만을 할 수 있”는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절망합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나’조차, 시간 속에서는 불확실하기만 합니다. 스스로의 기억들은 점차 희미하게 변해갈 따름입니다. 기억이란 필연적으로 단편적이죠. 따라서 하나의 이어진 글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잘 정리된 하나의 구조적 서사란, 실제 현실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가고, 나의 기억은 여러 파편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시간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계속 흐릅니다. 미니멀한 글을 쓰다니요. 화자의 말대로, "나는 하나도 미니멀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나’가 할 수 있는 작업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아마도 ~것이다"처럼 불확실한 문장뿐임에도, 필사적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노스탤지아, 즉 "되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을 좇아 단편적으로나마 되짚어보는 것이죠.

 

 

 

3.

 

<Auto>는 생산적인 재화로서의 글을 피하고 공백과 거리를 되살리는 작업을 시도하는데, (예상하시겠지만) 이건 사실 불가능한 실험입니다. 언어는 자신의 팬들을 허무하게 만들 만큼 본질적인 폭력성을 가지고 있죠. 특정 개념을 묶어내고 다른 것들은 가차 없이 쳐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더하지요.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고 쓴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공간적인 틈은 매끄럽게 포장되고 이음매는 재단되어 이렇게 한 문장, 한 문단을 이룬다. 그 사이의 공백을 거리를 아무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것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어쩌면 이 문장은 또 매끄럽게 이어져 있고, 매끄럽게 읽히고, 우 리는 가 끔 이 어 져 있 기도 하고, 당신은 이어주었고, 나도 다시금 힘을 내어 잇기를 계속한다.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을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를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고, 시작되고, 어느 순간 이어져 있음을 기뻐하다 다시 끊어졌다, 이으려 하고, 우리는 이어질까?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나는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아무도 서로의 공백과 거리를 알 수 없는 절대적인 불가해(不可解).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이어지고(혹은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기에 ‘나’는 문장을, 문단을 잇습니다. 다시 사랑하고, 잇다가, 다시 끊어지고, 결국 이어지게 될까 질문하고, 그럼에도 잇습니다.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잊지 못하기에 씁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철저히 공백으로 취급한, 사전 상 '사랑' 바깥에 위치한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텍스트 (영화, 음악, 문학) 역시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문단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열거하여 보여주는 것이죠. 그 중 많은 수가 퀴어 텍스트인데, 서로를 사랑하는 퀴어 서사가 이렇게 많고, 그 언어에 공감하는 누군가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화자의 말대로 모든 글은 오토픽션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쓰기에 Auto, 내가 '쓰기'에 Fiction." 하지만 세상의 질서는 Fiction만을 살리고 내밀한 '나'(그것이 누구이든)를 공개하기 꺼려하지요. 김봉곤의 <Auto>는 자꾸 흐려지는 '나'의 공백의 순간들을 언어로써 불러 세웁니다. 삶과 글의 경계가 투명해지는 오토픽션은, 특정 서사만 구조화하는 글쓰기 질서를 전복하면서 퀴어한 글쓰기의 좋은 예시를 보여줍니다. 결국 사람은 반드시 죽으며 ‘시간 속에서는 오직 현재만 돌출’할 뿐이라면, '어떤 순간을 가지는' "일순간의 영생"을 위해 나(auto)는 그저 자동(auto)적으로 쓸 따름입니다. 그렇게 순간들을 붙잡는 '나'의 언어는 종이 위에 물질로 굳어지고, “끔찍하고 행복”한 글의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나'(Auto)들을 호명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경이롭게 이어지는, 어떤 순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1) 동아신춘문예 홈페이지(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6/01_1.html)에서 작품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2) 김봉곤, "당선소감" 인용. 원문: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6/01_3.html

3) 오토픽션: 한 작가가 실제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하나의 개성과 삶을 상상해내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문학 장르. 소설화한 자서전이라기보다는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자전적 성격을 내장한 허구다. - 김화영,「파트릭 모디아노 혹은 기억의 모험」,『계간 문학동네』, 2015년 봄호(82호) 수정발췌

4) 메타소설: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허구의 장치를 의도적으로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메타픽션은 그것이 픽션임을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알리는 것으로, 허구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시한다. - 위키백과 “메타픽션” 수정발췌.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83%80%ED%94%BD%EC%85%98

5) 구효서, 은희경, "심사평" 인용. 원문: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6/01_2.html

6) 김봉곤, 「Auto」, 페이지 없음, 이후 출처표기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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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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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여수

 

 한참 여수밤바다라는 노래가 소위 흥했던 시절이 있었다. 봄철이었던가, 바람이 좀 꿉꿉해지는 여름이었던것 같기도하다. 캠퍼스를 걸으면 여기저기서 기타소리와 함께 좀 우울하기도하고 또 다정하기도 한것 같은 노래 소리가 들렸고 편의점이나 카페에가면 그 노래만 주구장창 나오곤했다. 그 노래가 유행했던 이유는 그 노래가 왠지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들했다. 무슨 향수? 그리워할 고향이 우리에게 있던가? 동아리방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그것이 이를테면 관용적인 표현 같은 것이라며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즈음 동아리 방에 모인 얼굴들은 모두 쓸쓸하고 버거워 보였다. 다들 과제며 취업준비에 바빠 얼굴에 옅은 피곤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우리는 인사치레로 항상 말했다. "과로하시는군요(24p)" 우리는 향수를 느낄만큼 오래 고여있는 기억을 가지지 못했지만 모두 향수를 느꼈다. 괜스레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 몸 부대낄 곳이 필요해지는 기분이 들면 이유없이 핸드폰 연락처를 주루룩 훑었다. 그러다가 괜찮은 이름을 하나 발견하면 잠시 고민하다가 연락을 보내곤 했다. [뭐해. 같이 저녁 먹을래?] 그렇게 성사된 모임은 잠시 피곤을 뒤집어쓴 얼굴을 가리고 히히덕 대다가 헤어졌고, 그러면 우리는 곧 또하나의 우울을 뒤집어 쓰곤했다. 우리는 모두 외롭다고 말했다.

 

 만성적인 우울함과 객지에 있는 것만같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현대인이라는 증거와 같은 일이라고들 말한다. 한강의 소설은 우리의 외로움을 더더욱 자극한다. 여기에는 멋드러진 파트너를 만나 외로움이 극복되는 것같은 디즈니적 해피엔딩은 없고 주인공들은 잠깐 만나서 서로 볶닥대다가 서로 헤어져버리고 만다. 나는 이 소설이 영 뒷맛이 깔끔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 소설을 읽는가?    

 

 

 

 

 1. 결벽증과 수조 속 물고기


여기에는 두 여자가 있다. 여수에 대한 두 가지 내력을 간직한 여자이다. 하나는 정선. 그녀는 강박증을 앓고 있으며 주기적인 위경련에 시달린다. 결벽증은 그녀로 하여금 모든일을 참기 힘든 일로 만든다. 그녀는 어린 시절은 여수에서 살았고 7살쯤에 여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수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 한 여자, 자흔은 태평하고 무심한 성격으로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서울까지 올라왔고, 타이밍 좋게 정선의 룸메이트가 되어, 정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여자이다. 그녀는 오랜 떠돌이의 내력이 있지만 여수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으로 언젠간 돌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녀의 무심한 성격 탓에 그녀는 온 몸에 상처가 많고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는 등의 우여 곡절을 겪는다.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내력 때문에 그녀들은 어떤 증상들을 안고 지낸다. 그 증상들은 그들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도하고 또 서로에게 불편함과 짜증을 유발한다. 자흔은 서울은 삭막하다며 어느날 갑자기 물고기가 든 수조를 들고 들어오고, 결벽증이 있는 정선은 그것이 불편하다. 또 위경련과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정선은 자흔에게 더러우니 자신을 보며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하며 자흔을 밀어내고 자흔은 그것에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꾸역꾸역 그 둘은 여름을 넘긴다. 그동안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자흔은 정선을 떠나고, 정선은 자흔의 뜻을 대신 이루기라도 할 듯, 여수로 향한다.

 

 

 

 

 2. 사랑은 누군가를 어디론가 보내고

 

 우리도 나름대로의 내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력으로 인해 어떤 삶의 방식들을 선택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주고 서로를 불편해 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와의 관계는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디즈니적인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자흔이 한 도시의 서점에서 일하면서 서점에 드나드는 대학생을 사랑하게 되고,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처럼, 자흔은 정선을 움직였다. 정선에게 자흔은 특별했다. 자흔의 독특한 생활방식은 정선의 삶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극했다.


"그 때, 어째서 나는 못볼것을 본 사람처럼 자흔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던가. 무엇이 내 몸속에서 잠들어있던 혈관 하나하나를 끄집어내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던가." ( 42p)

 

 자흔은 헛구역질을 하는 정선을 말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는 결국 정선이 자신의 머리속 한 구석으로 몰아넣어둔 '여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자흔이 정선을 떠나고자했을 때, 정선은 자기를 떠났던 수많은 룸메이트들에게 하지 않았던 말을 처음으로 꺼낸다. "가지 말아요(56p)" 정선은 처음으로 함께 살 붙이고 지내는 룸메이트로서 자흔을 인정했고, 자신이 그토록 외로워왔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한쪽만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듯이, 다음 날 새벽 자흔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정선의 집을 떠난다. 정선은 자흔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자신이 자흔과 함께 있는 동안 강박에 가까운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여수로 갈 다짐을 한다.

 

 

 

 

  3. 매듭을 지어야 할 것

 

 여수에 가기위한 기차를 타고서도 정선은 여전히 토악질을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여수로가는 기차 안에서 정선은 책 전반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내력을 되짚으며 그 고통스런 기억안으로 기꺼이 걸어들어간다. 정선이 여수에 발을 들였다고해서, 그것이 온전한 치료이거나 회복은 아닐 수 밖에 없다. 사랑이 마지막 해결책이 되어 해피 엔딩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주 폭력적이다. 외로움이 완전히 극복되어 왕자님을 만나는 디즈니적 해피엔딩은 사실은 그 이후의 삶을 숨기는 하나의 폭력이다. 우리는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점이 되어 세상을 헤메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맞 부딪쳤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 놓는다.

 

 퀴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개인의 내력속에 퀴어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 내력으로 인해 어떤 증상들을 가지게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투쟁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분전할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고통받을 수도 있고, 커밍아웃을 통해 주위사람들이 불편해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하는가. 외로움 속에 오래 오래 홀로 머물러야 하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그 본질적인 내력 속을 마주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사랑은 존재의 내력을 바꾸는 아주 큰 사건이기 때문에.   

  

 끝맛이 깔끔한 소설이 아닌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두 어떤 향수를 가지고 있다. 외로움과 객지에서 떠도는 것 같은 부유감. 그러나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그것은 평생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만나는 이유는 뭘까를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내 내력을 외치거나 혹은 숨기는 이유 말이다. 그건 아마 돌아가기 위해서. 정선이 결국 여수를 찾는 것처럼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각자의 아주 불편하고 색다른 내력을 가진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내력을 온전히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내력을 들여다보고 헤집고 그래서 또 다시 그렇게도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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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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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유명한 에세이 「작가의 죽음」에서, 현대 작가는 작품 바깥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작품과 동시에 태어난다”고 이야기한다(1468) [1]. 그렇다면, 성 정체성은 어떨까? 우리는 스스로의 성 정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그것을 객관화하고 ‘쓸’ 수 있을까?

 

  강영숙의 『라이팅 클럽』은 주인공 영인과 글쓰기 행위의 관계를 고찰하는 작품이다.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연애편지부터, 복수심에 가득 차 쏟아내는 글, 상상력을 동원한 습작 소설 등을 써 내려가며 주인공은 “글을 쓰리라! 글을 쓰리라! 죽어도 쓰리라.”고 굳건하게 다짐한다 (56)[2].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의 글쓰기는 항상 실패로 끝난다. 어린 시절, 선망하는 J작가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원고는 “온통 좍좍 그은 붉은 줄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고(94), 어머니인 김 작가는 그녀의 글을 보고 “넌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재미없게 쓰니? 넌 정말 재주가 없어”라는 혹평을 던진다(181). 직장이 생긴 뒤 글을 쓰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결국 “생활과 글쓰기는 절대로 병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그녀는(151) 끝내 “소설은 쓰지 못”하게 된다(307).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인의 삶은 『라이팅 클럽』이라는 흥미로운 소설이 되어있다. 비록 책상에 앉아 글을 쓰지 않지만, 삶을 살아내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영인은 작품 바깥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자신의 삶이라는 작품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영인과 글쓰기의 관계는 성정체성의 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인의 삶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신을 거절하는 남자들을 견디다 못해 욕망의 대상을 여성으로 치환한 뒤, 면도칼을 씹는다는 소문의 여고생 R에게 고백하고, 키가 작고 공주 같은 K와 첫 키스를 나눈다. 그 후 남성인 S선생님을 짝사랑했다가, 『강철군화』를 읽는 남자 B에게 반해 동거를 하고, 선을 본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와 헤어져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독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키스 이외에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영인은 양성애자일까? 아니면 치기 어린 마음으로 여자를 잠깐 만나 본 이성애자일까? 영인과 교제하다가 남자와 결혼한 K는 동성애자일까? 성관계를 통해 별다른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영인은 혹시 무성애자가 아닐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인은 그 무엇도 아니다. 영인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대신에,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삶이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겪어온 많은 만남도 영인이라는 한 인물을 구성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무엇‘이다’라는 개념이 바깥에서 올 때에 그것은 언제나 폭력을 동반한다. 한 사람의 젠더 혹은 성적 취향을 하나로 규정지으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모호한 것, 그리고 변화하는 것에 대한 차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이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는 사회 체계 속에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 무엇‘이다’라는 규칙 속에서 스스로 부딪히고, 자문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정의함으로써 서서히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개인은 삶의 바깥에서 이미 완성된 성 정체성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물음표들 속에서 그 삶을 직접 살아가며 성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글쓰기란 언제나 미완성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바르트의 통찰, 그리고 소설을 쓰지 않는 주인공의 삶이 고스란히 소설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강영숙의 통찰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 땅 위의 많은 성 소수자들의 삶과 닮아있다. 끝나지 않는 과정의 연속이었던 영인의 삶이 결국 하나의 소설이 되고, 그녀가 지금껏 만나며 욕망해온 많은 사람들로 인해 개인의 서사가 완성되는 것처럼, 그것은 이미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질문하고 의심하라. ‘이다’라는 명제를 거부하고 내가 무엇 ‘일 것’인지 고민하며 끝없이 움직여라.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누구를 욕망하는지, 나는 무엇인지, 묻고, 답하고, 뒤집고, 반박하고, 살아가라. 그리고 많은 질문 속을 헤매며 구성된 정체성이 영인의 경우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 되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1] Roland Barthes, “The Death of the Author,” The Norton Anthology of Theory and Criticism, ed. Vincent B. Leitch et al., W. W. Norton: London, 2001. 1466-70. 필자 번역. 이하는 페이지 수만 표기.

[2] 강영숙, 『라이팅 클럽』, 자음과 모음: 서울, 2010. 이하는 페이지 수만 표기.

 

 

 

작성: 시브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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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 - 2001 제8회 21세기문학상 수상작품집
강석경 외 지음 / 이수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필자가 리뷰한 여섯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001년 제8회 21세기문학상 대상 수상작,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

 시나리오 작가인 관에게는 세 명의 주변인이 있다. 관과 관계를 가진 후 임신하자 관에게 결혼을 압박하는 ‘O’, 끈질기게 관에게 ‘수작하는’ 닥터 박, 관과 결혼하고 이혼했으며 ‘회의(懷疑)의 남매’인 ‘재연’. O는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노골적인 미래를, 닥터 박은 무의미로 치부하고 싶은 과거를, 재연은 관이 살고자 하는 환상, 꿈을 상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관에게 압도적인 짜증을 느꼈다. 관이 미래도 과거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연을 뒤늦게, 그리고 마치 차선책처럼 사랑하지만, 재연은 관의 사랑을 불길에 던져 꿈으로부터 내쫓는다. 허공을 지켜보던 재연이 목도리를 풀어 불길 속으로 던졌다. (중략) 내 사랑을 너는 액처럼 태워 버리는구나.(45p)

 세 사람은 각기 관이라는 혼란을 몰이해 진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관에게는 두 경우만이 있다. ‘시나리오’ 속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 발붙이거나, 스스로가 ‘거세’되었다고 믿으며 무너지거나.


 그리고 이 짤막한 소개와 더불어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해보는 것이 글의 진짜 목적이다. 급진적 여성해방주의자라고 자처하는 O가 관도 밉지는 않았다. (중략) 적어도 O는 요조숙녀인 체하지 않아서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여성해방주의자 O는 임신을 알리면서 돌변했다. (중략) 네가 결혼하지 않겠다면 혼자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했다. 생명주의자로 돌변한 O 앞에서 관은 파렴치한이 되었다.(39p) 과연 작가가 이 문장을 어떤 사유로 적은 것인지.

 나는 두 가지로 큰 방향을 잡았다. 하나는 작가가 1900년대 중후반 사회상이 드러나는 가치관을 가진 명예남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O를 여성 이미지의 압축으로 삼아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급진적 여성해방주의 이론에서는 결혼 제도에 대한 집단적 문제제기와 성적자기결정권 등의 신체자유를 외쳤다고 하는데, 막상 ‘성적 억압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겠다고 공언했다'는 O는 “네가 뿌린 생명에 책임을 져라”라고 말하며 관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즉 작가가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결여했거나, O에게 몰이해의 성격을 주어 ‘나쁜’ 여성 캐릭터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작가가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때문에 당시 남성상을 관이라는 캐릭터로 만들어 질타한 것. 관에게 치우친 3인칭 서술에서는 그의 마구잡이 혼란과 회피성—심사문에서는 현대인의 그것으로 말해지는—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딸을 사랑하게 됐는데 그 엄마와 무의미하게 몇 번 잔 적이 있다고 사랑을 포기해야 하니?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야. 성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든 실수하고 죄도 지을 수 있어. 경박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과거 때문에 미래까지 저당잡혀야 하나?”(40p)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의 거세된 시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 역시 이 경우에 연결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둘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전자의 의구심이 단지 나의 공부가 부족해서 드는 것일지, 아니면 충분히 논의의 소지가 있는 것인지도. 그리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로 뒤에 실린 작가의 자선작 <물 속의 방>을 뒤늦게 읽고서야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깝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너무 아슬아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 두 작품만을 가지고 작품 전반에 나타난 그의 가치관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삼십여 년 전의 사회상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는 점은 결코 2015년의 독자에게 실이 되지 않았다.


 필자에게 페미니즘을 연결지어 글을 쓰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었고 하나의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식이 부족해 여러 자료를 참고했지만 단기간의 공부로는 모자란 점이 많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아예 쓰지 않으려 했다. 고작 이만큼의 사고과정을 드러내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관처럼 회피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의 지표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작성: 김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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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파라다이스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그녀의 거짓말」은 주인공 여자의 신체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손목에 솟아오른 복사뼈를 따라 올라가 보면 당신의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에 이른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손톱이 어여쁘다”와 같은 서술(9)[1]은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때 여자는 “말이 없다”(9). 말을 할 수 없다. 이미 누군가의 손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MTF 트렌스젠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성전환 수술로 인해 빚더미에 앉게 되고 매일을 수금업자에게 쫓기는 주인공의 삶도 눈길을 끌지만, 그보다 본고는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키워드 중 하나인 ‘가짜’ 담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작품 속에는 두 명의 가짜가 등장하는데, 바로 이혼으로 인해 서로에게 ‘가짜 남편’과 ‘가짜 아내’가 된 남자와 여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짜들’이 걷는 행보는 서로 평행을 이루는 듯 하면서도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작품 속에서 두 ‘가짜들’은 공통적으로 일종의 죽음을 경험한다. 의도치 않게 살충제를 넣은 콜라를 마시게 된 ‘가짜 남편’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생각에 도망친 ‘가짜 아내’는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한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기회는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남편은 무덤 문을 열고 나오는 나사로처럼 되살아나는 반면, 죽음을 물리치지 못한 아내는 ‘가짜로서의 속성’을 더욱 굳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사체를 닦던 남편이 아내의 “가짜 성기”(35)를 발견하는 순간, 여자는 “칼자국과 바늘자국이 선명”한 “가짜 음순과 가짜 질”을 지닌, “이제는 가짜가 되어버린 나의 아내”로 완전히 낙인 찍힌다(35).

 

그렇다면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녀를 가짜로 만드는가? 그녀는 왜 “화장실에 갈 때마다 […] 징그러운 남의 살”을 보며 울음을 터트려야 했을까(33-4)? 아내에게 ‘가짜’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수술로 만들어진 그녀의 신체 때문이다. 즉, 아내의 정체성은 그녀의 몸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성격, 직업, 배경, 인간관계 등 한 개인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요소들은 사라지고, 이때의 아내는 몸뚱이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된다. 여느 카니발리즘(cannibalism) 영화에서 보이듯, “지난가을 담가 놓은 포도주 병을 비우고 […] 옮”겨 담을 수 있는 고깃덩어리에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다(35). 결국 그녀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생물학적 신체에 구속하려는 사회의 규범적 질서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미 우리의 ‘몸’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100)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2] 그러나 여전히 ‘진짜 몸’ 이라는 본질적 개념을 상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난 모든 몸을 타자화하려는 태도, 그리고 신체를 통해 개인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인식이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가짜’를 만들어내고 그들을 살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을 살해한 남자는,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기 전 “너?”라고 묻는다(28). 그 짧은 한 마디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타자화와 경멸의 뉘앙스는 우리 주변의 가짜들이 매일 같이 견뎌야 하는 폭력이다.

 

「그녀의 거짓말」의 주인공은 죽은 뒤에도 글의 화자로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때 상황을 바라보며 서술하는 여자의 영혼(혹은 원형 또는 본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자신이 꿈꾸던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태어났을 때처럼 남성의 몸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수술자국이 선명한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세 가지 형상 중 어느 것이 ‘진짜’인가? 이와 같은 서사구조를 통해 이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영혼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 것인가? 과연 그 그림은 ‘진짜’ 인가?

 

 

 

[1] 강지영, 「그녀의 거짓말」, 『굿바이 파라다이스』, 씨네북스, 2009. 이하는 페이지 수만 표기.

[2]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역,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작성: 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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