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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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Waking up begins with saying am and now. (잠에서 깰 때, 잠에서 깨자마자 맞는 그 순간, 그때에는 ‘있다’와 ‘지금’이 떠오른다.)

 

 이 책을 번역할 때, 번역자는 ‘am’을 어떤 한국어 표현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읽은 번역본에서는 ‘am’을 ‘있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있다’라는 말은 평범해서 별다른 연상이 일지 않는다. ‘존재한다’라고 했다면 의미는 구체화되었을지 몰라도 어감이 딱딱해졌을 것이다. 이 문장의 ‘am’은 ‘있다’의 일상적인 느낌과 ‘존재한다’의 의미를 포괄하면서도 독자에 따라서 배타적으로도 읽힐 수 있는 복합적인 표현일텐데, 이런 표현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을 찾기는 어렵다. ‘있다’는 알맞은 번역어가 아닌 것 같지만, 더 적합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서두의 ‘있다’와 ‘지금’, ‘나’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떠올린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첫 문단에 ‘있다’와 ‘지금’, 그리고 ‘나’는 코기토의 진행 순서대로 배치되어있다. 의식이 들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그것이 느껴지는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 인지된다. 그런 후에야 천천히 ‘나’라는 것이 파악되고, 거기에서부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추론되는 것이다. 

 

 ‘여기’라는 공간이 인식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느낌의 덩어리에서 ‘나’가 되고 기억과 감각의 뒤섞인 다발로 존재하다가 대뇌의 작용으로 의식과 겉모습이 알맞게 정리되어 마침내 사회적으로 적합한 형식을 갖춘 자아인 ‘조지’가 된다. 그렇게 ‘조지’가 된 후에야 조지는 집을 나서고, 녹나무거리를 벗어나며 고속도로를 통해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이 있는 대도시에 도착한다. 데카르트가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찾아낸 ‘존재’라는 단단한 발판을 디디고 세상을 연역해내듯, 이 소설은 가장 확실한 것-있다, 지금,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불확실한 것-조지, 집, 녹나무거리, 사회-으로 나아간다. 

 

 소설에서는 하루 동안 조지가 사회에서 겪는 갖가지 일들이 묘사되지만 그중 딱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16년간 동거한 조지의 애인 짐이 교통사고로 죽은 일이라든가, 짐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든가하는 주인공에게 중요한 변화를 준 사건들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일어난 것들이다. 그 일들은 오래 전에 종료된 채로 늘어진 여운만을 소설 안의 시간에 드리우고 조지는 속으로 남을 저주하고 징벌하는 상상을 하는 정도를 빼곤 대체로 조용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조지’가 하루 동안 겪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소수자로서 조지가 당하는 차별과 그로인한 불쾌감에 대해서도 말하며, 오랫동안 동거한 애인을 사별한 상실감을 묘사하지만, 이것들은 소설의 소재일뿐 주제가 아니다. 이 소설의 주제(주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면)는 ‘있다’와 그것에 수반되는 ‘지금’이다. 이 소설은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있음’과 관상동맥이 막히며 뇌가 멈추게 되면서 ‘있음’이 끝나고 ‘지금’이 멎을 때 까지의 다양한 있음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 

 

 하루 동안의 벌어지는 조지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지는 죽음을 맞지만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인 것도 아니다. 속도감을 부여하는 기승전결식의 구조가 없는 이 소설의 시간은 느릿하게 흐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형식은 보다 삶에 가깝다. 이야기에 가까운 삶이 아닌, 삶에 가까운 이야기. 어떤 커다란 서사의 단계로서의 시간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지금’들.

 

 자신의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데카르트의 고립된 자아는 외롭다. 이 소설의 느릿한 시간에 짙게 배여 있는 정서도 외로움이다. 조지는 짐이 죽어서 외롭고, 박해하는 세상 때문에 외롭고, 이해받지 못해 외롭지만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다. 조지는 짐이 죽지 않았어도, 세상에 의해 환영받는 존재였어도,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어도 여전히 외로웠을 것이다. 조지가 처한 여러 상황들은 외로움의 부분적 원인이기도 하지만 외로움의 양상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외로움을 몰아내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어지는 ‘지금’들의 무의미함을 극복하려 삶에 목적과 이야기를 부여한다. 그런 노력은 얼마간 성공적일 수도 있다. 아찔한 것은 그런 시도들 틈에 벌어지는 공백이다. 이 소설은 그런 시도들이 모두 벗겨진 '지금'과 '있음'을 그린다. 이 소설이 삶을 닮아있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아찔하다. 

 

추신 : 디자이너 톰 포드의 영화 감독 데뷔작인 같은 이름의 영화가 유명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먼저 봤다. 영화 [싱글맨]은 확실히 조지에 관한 영화다. 소설 [싱글맨]이 ‘있다’와 ‘지금’에 관한 작품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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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만나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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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지만) 고백하자면, 첫키스는 이불 속이었다. 따듯하고 포근한 이불과 이불속으로 들어오던 연한 햇빛이 기억난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한낮인지라 이불속은 흐린 회색빛으로 환했다. 나는 그때 이때쯤 종소리가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때의 바깥 풍경을 기억할 수 없다. 이불속은 아주 좁고 따듯하고, 그리고 누군가와서 장난스럽게 손을 뻗으면 부서질수있을만큼 연약했다. 우리는 이불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이불이 벗겨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둘이 간신이 끌어안고 누울 수 있는 그 좁은 공간이 분리된 오후의 전부였다

 

 퀴어의 경험은 어떤 의미의 분리 혹은 추방(43p)’들이다. 퀴어하지 않은 것들, 소위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로부터의 분리, 자신을 재정의하는 과정이 퀴어 경험의 출발점이 된다. 어떤 추방들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고 어떤 추방들은 독특함의 증거가 되기도 하며 자신의 프라이드가 되기도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특별히, 고통스럽게 추방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연인인 K와 함께 누워 몸을 보듬을 공간이 없어 고시원에서 섹스를 하고 개새끼들은 꺼져라라는 통보를 받은 주인공과, 연인이었던 남자로부터 소리 소문도 없이 추방당한 어쳐라는 남자가 그 둘이다. 둘에게 추방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때문에 그들의 모든 삶을 추방당한 그 상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한다어쳐는 연인이었던 칼 박을 찾으러 한국에 와서 주인공을 만난다. 어쳐는 추방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한국의 여러 곳을 전전하지만 결국은 칼 박을 찾지 못한다. 몇 달 동안 한국을 헤매며 어쳐는 아마도 분리된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칼 박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편 주인공 역시 상처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K와의 이별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가지 못한채 약간의 우울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새로 사귄 연인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고 여전히 K의 기억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추방이 그들에게 얼마나 급작스럽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실은, 모든 사랑은 분리의 경험이다. 타인의 경험세계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쳐는 칼 박을 사랑했으나, 영어 한마디 하지 못하는 아시아계인 동양인이 캐나다에서 겪어온 경험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칼 박을 찾으러 한국으로 온 이후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여서, 어쳐가 만나는 한국의 풍경들은 모두 어쳐에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는 K의 심경을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남자와 함께 모텔에 들어가기 힘들어했으며 결국 산으로 올라가 동사하고 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이 가진 그 고유한 경험세계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몇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실 추방되고 유폐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분리된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홉 살때 처음 느꼈어. 조금 이른 편이었지. 3일정도 내 방에서 한발자국도 안나갔어. 3일동안, 탈진하도록 춤을 췄고 너무 지치면 이온음료를 마셨지. 정말 긴 시간이었어

(...)

우리는 이내 샌드위치 가게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고요하게 서로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정지된 시간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단단한 막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우리의 일생이, 본적도 없고 들어본적도 없는 시간까지 섬세하게 교환되는 기분이었다, 그 때, 폐쇄된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이 열리면서 뚜벅뚜벅, 누군가 걸어나와 우리를 지나쳐갔다. 푸른눈의 아이였다. 몇 번의 탈진을 반복했을 아이의 얼굴은 3일사이 청년의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밖에서 그애를 기다리고 있던 열두 살의 깡마른 소년이 아이의 손을 잡더니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이좋게 걸어가는 그들을 우리 역시 말없이 지켜보기만 할뿐, 불러세우지는 않았다. (48-49p)

 

 

 어쳐는 결국 칼 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찾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는 칼 박을 찾기 위해 캐나다를 떠나 한국에 왔으며, 찾지 못함을 인정하고 한국을 떠났다. 추방은 어쳐를 움직이게 했고 다른 시간 혹은 다른 공간속으로 자신을 던질 수 있게 했다. 거기에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한 때 칼 박과 겹쳐봤을지 모르는 주인공에게서 새로운 mr.park을 보게 되고 난 후, 어쳐는 토론토로 돌아간다. 마침내 긴 외로움의 한 장을 끝내는 것이었다. 한편 어쳐가 돌아간 후 주인공은 K의 부고를 듣는다. 그리고 나서 토론토로 향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쳐가 말해준 토론토 광장으로 가지 않고 다만 전화기를 들어 어쳐에게 전화를 건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건넨 후 전화는 끊어지고, 주인공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다. 주인공 역시 자신의 역사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곳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감옥이 되고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성이 되오.*” 어느 만화에서 들은 대사이다. 우리는 모두 추방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유폐의 역사이다. 분리의 어느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추방되었다고 여기고 고통 속에 자신을 멈춰 세운다. 유폐는 필요하다. 어쳐가 3일동안 춤을 추던 그 좁은방, 주인공과 K가 간신히 드나들던 고시원의 작은방은 스스로의 마음이 익어가는 공간이다. 하지만 추방이 고통스러운 날들에, 외로움이 자신을 죽이는 날들에, 우리는 한걸음을 나아서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스스로를 유폐시킨 벽장 속에서 한걸음 걸어 나오는 것, 고통스런 기억을 갈무리하는 것, 상처 위에 예쁜 밴드를 붙여주는 것 등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일수 있다.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일, 그리하여 모든 일의 마지막장, 춥고, 마치 인생의 끝인 것만 같은 북쪽도시에 다녀오는 일. 그곳에서 가만히 안부를 묻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추방할 수 없어.”(52p)

 

 

 

 

 

 

*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6화

 

 

덧붙임> 나는 소설은 일종의 극복의지’”라는 말에 따라 이 책을 추방과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읽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우리에겐 가끔씩, 추방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마음의 안식만을 말하기엔 추방은 너무 잔인할 때가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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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클럽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6
박선희 지음 / 비룡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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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이 소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줄리엣 클럽은 프리즘을 통과한 햇살처럼 각각 다른 빛으로 빛나고 있는 낭랑 17세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청소년 소설 특유의 발랄함이 특징인 이 작품을 전지적 퀴어 시점으로 읽어본 이 리뷰에서 다루게 될 가영과 아람의 사랑 말고도, 애간장 녹이는 짝사랑, 순결 콤플렉스를 밀쳐내고 벌이는 제법 정열적인 사랑, 10대 소녀답게 스타 가수에게 쏘아올리는 사랑 등 여러 형태의 사랑이 여러 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변화를 두려워하는 곳이 바로 학교야.'"-26p

 

 소설의 목차부터, 이반 사냥이라는 챕터가 버젓이 쓰여있는 만큼 가영과 아람의 사랑은 주인공과 가깝지 않은 관계에 있음에도 소설의 큰 지분을 차지한다. 학교라는 공간에 같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것이 가람과 아영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이유였다. 소설에서 일명 '사냥개'하고 불리는 학주는 다른 학교에서 일어난 퀴어 파티 소동에 영향을 받아 '이반 사냥'을 벌이게 된다. 연인 관계인 아람과 가영이 그 사냥개의 먹잇감인 셈이다. 아람이 시를 적은 종이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면 가영이 받아 읽는다니, 작가는 무척 로맨틱한 방법으로 둘을 묘사했다.

 

'"그녀의 소망은 행복해지는 건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 - 142p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학교라는 한정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퀴어 서사의 '정석'을 도장 찍어놓듯 찍어놓았다고 생각한다. 아람과 가영은 열렬히 사랑하고, 학주는 전형적인 '악당형 포비아'로 등장해 악담을 퍼붓고, 가영은 자유를 외치는 투사처럼 삭발까지 감행하며 반항하고, 두 아이들의 엄마가 학교를 찾아오고. 아무튼 결국엔 미래를 기약하며 둘 중 한 명이 반 강제로 전학을 가게 된다는 극적이면서도 평범한 서사. 어째서 소설 속 두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애절함'을 갖고 '성숙한' 연애를 해야했으며, 사회의 약자로써 받는 압력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는 '비극'을 겪어야 했을까? 물론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청소년 소설 특유의 극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역시 여고생들의 이야기이니만큼 그녀들의 마지막도 우중충하지 않고 밝게 반짝였다. 수십개의 종이비행기들과 함께.

 

'"거부한다는 건 의지의 문제지만 사랑한다는 건 의지를 벗어난 문제야. '사랑하겠다.'가 아니라 '사랑하게 되었다.' 뭐 그런 거지. '나는 같은 남자 혹은 같은 여자를 사랑하였다.'가 아니라 '사랑을 하게 됐는데 그게 같은 남자 혹은 같은 여자였다.' 가 되는 거고." - 102p

'"걔네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거지. 머리가 복잡해서, 그냥 불쌍하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어."' - 271p

 

 소설 속 여러 인물들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반응도 제각각 담아내었다. 언제나 그렇듯 생각이 조금 성숙해 독자의 가이드를 자처하는 인물,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인물, 그리고 나머지 호모포비아들로 갈려 하나씩 저마다의 결론을 내려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을 읽으며 군고구마 한 소쿠리를 물 없이 먹는 기분이었다. 분명 이 소설을 처음 접했던(무려 4년 전) 시기에는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만큼 퀴어로 살아가며 많은 것들을 새로 배운 것 같다.

 그래도 그나마 마음에 드는 인물은 있었다. 떠나는 가영의 뒤로 수많은 종이비행기들이 떨어질 때, 아이들에 합세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서 "이것 말고 아무것도 해 줄 게 없구나." 라며 중얼거렸던 영어 선생님. 소극적이지만, 변화는 그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제일 마음에 드는 대사 한 줄로 설레었던 첫 리뷰를 마치겠다.

 

'"남을 자유롭게 해야 자기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어. 수업은 이것으로 끝!"'-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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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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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방금 전까지 나와 쓰러질 것처럼 웃어대다가도 다음 순간 창밖을 보며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평생에 걸쳐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그애는 절대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지닌 아이처럼 체념한 채 살아가다가도 가끔은 의문을 풀고 싶다는 듯 똑바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럴 땐 누구도 그애를 도울 수 없었다. -달의 바다.63p

 

 

 흔히 우리가 말하는 취준생, 즉 취업 준비생인 주인공 은미는 할머니의 비밀스러운 부탁으로, 단짝 친구 민이와 함께 미항공우주국 NASA의 우주비행사인 고모를 만나러 간다.

 계속해서 기자 시험에 낙방하는 은미와 성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민이. 이 둘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가 고모를 만나게 되고, 고모가 우주비행사라는 사실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 행복한 인생이란 실현되지 않는 꿈 앞에서도, 이를 긍정하며 용기 있게 또 다른 선택을 해나가는 것임을 결국 깨닫는다.

 

 

 정한아 작가의 소설 달의 바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작중 은미와 은미의 고모에게 맞추어져 있는 매력적인 포커스. 나는 이것을 민이와 은미 두 사람 사이를 향해 돌려 보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단짝 친구였던 은미와 민이. 다만 민이는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다르다. 은미의 엄마는 민이더러 “저애는 뭐가 되려고 저런 계집애 같은 짓만 한다니.”라고 혀를 찬다. 하지만 은미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과 죽이 잘 맞는 민이가, 자라며 조각 같은 미남으로 자라는 민이가, 소중한 친구 민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 은미에게 민이는 굉장히 많이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뒤에도 자신의 수술 결심을 알리는 둥 자신이 예전부터 해왔던 끊임없는 고민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서스럼없이 은미에게 보여준다.

 

 

 그런 민이에게 은미는 말한다. 장난 아니었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라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은미가 민이를 ‘여성스러운 남자’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이 아닌, 여성스러울 뿐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그런 은미에게 민이는 굉장히 실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며칠 뒤, 은미의 고모를 만나기 위해 은미와 민이는 미국으로 가게 된다. 민이에게 있어 미국은 성적 소수자의 종합운동장과 같은 곳이다. 이때까지 해왔던 고민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민이는 굉장히 설레여하고, 은미는 그런 민이를 어중간하게 바라본다_어째서 그렇게 한결같이 비꼬는 거야? 하고 민이는 은미더러 말했다_아직은 그런 그의 모습이 편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은미의 시선은 결국 변하게 된다. 남자에게 대시를 받는 민이, 여성스러운 옷을 잔뜩 사고 너무나 행복해하는 민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른 민이를 가장 곁에서 바라보고, 무엇보다 남성과의 데이트를 실패하고 확신을 잃은 사람처럼 떠는 민이를 보며_결국 끝까지 좋은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_그가 혼자서 수없이 했을 고민들, 그리고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날 바다의 물살에 휩싸인 채 민이에게 입맞춤을 함으로서 절정을 맞이한다. 그때 왜 그랬어? 라는 민이의 질문에 은미는 대답한다.

 

키스해보면 알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여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달의 바다.141p

이제 고민은 그만해. 너는 나보다도 더 여자니까. 완벽하게. -달의 바다.141p

 

 그렇게 둘은 민이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며 화해 아닌 화해를 한다. 귀국 후, 민이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술을 받는다. 수술을 마친 민이에게 은미는 온갖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민이는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민이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하지만 나는 민이가 백화점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탈의실 밖에서 겉옷을 들고 기다려줄 수 있다. 전화를 걸어와서 울기 시작하면 멈출 때까지 들어줄 수도 있다. 그것이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기다려주는 것. 그날, 민이가 바다 한가운데서 내 입술에 자기의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입술을 대고 가만히 멈춰 서주었던 것처럼. -달의 바다.148p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은미는 이제 민이의 꿈을 알고 그의 선택, 그 이후의 인생을 꾸밈 없이 긍정함으로써 그의 상처와 행복을 앞으로 함께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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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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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은 이번으로 어느덧 세번째다. 시간을 역행하듯 <소년이 온다>, <노랑무늬영원>, 그리고 <바람이 분다, 가라> 순으로 읽었다. 이 소설은 <노랑무늬영원>에 실린 단편 <파란 돌>과 연계된다.

 한 편의 독립영화 같은 소설이었다. 한강의 소설들은 모두 영화 스케치 같은 느낌인데, 깔끔하게 다듬어진 최근작들에 비해 확실히 이 소설은 더 산발적이고 거칠다. 어쩌면 그래서 이때에 이 소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그런 싸한 분위기가 어울린다.

 <소년이 온다>와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의 진원지에서 일어난 파동이 현재나 미래를 어떻게 엄습하는가, 그것이 어떤 잔해를 남기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등장한다.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열기는 죽음이며 가장 시린 냉기는 사랑이다. 이 소설의 '잔해'는 바로 그것이다. 사랑, 차갑고 고요한 것.


 죽은 서인주를 중심으로, 그녀를 어떤 신화로 만들고자 그녀의 죽음을 자살이라 말하는 강석원이 있고, 그녀가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며 죽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 말하는 이정희가 있다. 정희는 강석원과의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강석원의 '서인주 평전'에 반박하기 위한 인주의 조각들을 찾아나선다.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좀체 맞춰지지 않던 인주의 조각은 강석원뿐 아니라 정희 역시 처절한 광기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광기가 예리하게 서로를 겨누고, 인주의 작업실은 강석원에 의해 불타고 만다. 정희 역시 죽음의 문턱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이 정희에게 새로운 승리―파란 돌을 쥐어주었다. 삼촌이 말했듯 파란 돌을 줍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다.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344p)」 또한 인주가 말했듯, 아주 오래 살아야 했다. 「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327p)」

 강석원이 불태운 인주의 흔적들은 마치 인주 본인인 것처럼 정희에게 불을 옮겨 붙인다. 그것이 그녀를 뜨겁게 되살릴 것임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에는 정희의 식사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그것은 정희 본인을 위한 밥이 아닌 인주로 인한, 애도로써의 밥이다. 삶과 사랑은 먹음이라는 행위로 꾸준히 이어지기 마련이다. 애도의 식사는 언젠가 그쳐야 하고, 우리는 슬픔의 화염 속에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 인주는 정희에게 한사코 자기 먹을 것을 내어주려 했다. 정희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음식도 마치 자신이 차린 듯 정희에게 도로 들이밀었고, 괜찮다는 말을 밥 먹이듯이 먹이곤 했다. 「괜찮아, 라고 인주는 나에게 말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오른손으로 내가 처음 숟가락을 쥐었을 때였다. (……) 먹어도 괜찮아.// 맛이 있어도 괜찮아.// 윤이 흐르는 밥 한 공기를 비울 때까지 그 목소리를 듣는다. (176p)」 이처럼 인주는 정희를 위해 수없이 많은 것을 선택해왔을 것이다. 그 선택이, 정희를 살려내고도 자신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고 해도.

 선택은 우주와 별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어진다. 인주는 죽기 전, 화가로서의 말기에 죽은 삼촌이 그렸던 것과 똑같이 별의 폭발을 그렸다. 「늙은 별이 터지며 나온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간구름을 수축시킨다. (……) 이 수축된 성간구름이 별이 되기 위해서는 구름의 질양이 일정한 값보다 커야 한다. 이것이 중력수축에 필요한 '진스의 임계질량'이다. 구름의 질량이 임계질량을 넘어서는 순간 별의 일생이 시작된다. (18p)」 삼촌과 인주―별들의 죽음은 마침내 정희―새 별의 일생을 일으킨 것이다.


 마지막장의 제목이자 소설의 제목인 '바람이 분다, 가라'는 삼촌과 인주가 정희에게 남겨준 말이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 밝힐 때 비로소 달의 뒷면에 다다를 수 있다. 인주의 메모, 강석원의 비통, 흩어져 있던 모든 조각들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 지키고 싶어했는지, 그 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앎으로써.

 정희는 앞서 '너는 이제 차가움이지. 죽음이지.'(177p)라는 독백으로, 죽음을 냉각의 이미지로 여겼다. 이는 강석원이 인주의 미술관을 '달의 뒷면'에 짓겠다는 글을 쓴 것과 유사한 오해다. 그러나 정희는 인주를, 인주는 정희를 간절하게 사랑했다. 사랑의 방향을 이해하지 못한 강석원에게 '달의 뒷면'에 다가가기란 불가능했다. 

 정희는 다시금 독백한다.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하지만, 어쩌면 너도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까./ 내가 너를 몰랐던 것보다 더.(335p)」 그렇다. 사랑은 서로를 모른다는 것을 진실로 아는 것이다.


 한강이 이 소설에서 말한 것은 죽음으로 부서진 사랑이며 사랑으로 부숴낸 죽음이었다. 사랑과 죽음을 엮어낸 많은 고전들이 비극과 함께 남겨주었듯 사랑과 죽음이 낳은 새 별의 이름은 삶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 고 인주가 부드럽게 등을 떠밀었다. 정희가 다시 처음으로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봄이 왔어.


 노란 위액을 끝없이 토해냈다. 차라리 죽어서 끝내고 싶은 통증이었다. 눈두덩을 후벼 파는 안두통, 펴지지 않는 허리, 헝클어진 머리로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었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때문에 허리를 접고 걸었다. 보도블록들 틈으로 파릇한 싹이 돋은 것을, 가로수 밑동에 물이 오른 것을, 사람들이 봄옷 차림으로 걸어가는 것을 흔들리는 시야로 봤다. 미친 여자처럼 겨울 외투를 껴입은 채 그 눈부신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384p)


 쓰는 동안 푸른새벽의 <사랑>을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사랑, 흔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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