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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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첫 사랑은 달콤쌉싸름한 기억일 테지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퀴어가 경험하는 첫 사랑은 정체성 확립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보다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퀴어라는 단어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변환될 수 없듯, 어떤 이는 첫 사랑을 만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인식하는 데 성공하지만 누군가의 첫 사랑은 첫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기도 한다. 이 리뷰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누군가의 첫 사랑에 대한 서사로 읽고자 한다.

 

이성애만 존재하는 세계에서의 동성애

 

 중학생들에게 권장도서로 읽히기도 하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신학교를 중퇴한 경력이 있는 저자의, 변형된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한스는 헤세와 마찬가지로 신학교를 입학했다가 자퇴하며 그 과정에서 하일러라는 소년을 만난다. 선생님들과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석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와 달리 하일러는 문학에 빠져있는 소년으로, 애초에 강제로 입학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일이 없었다. 우연한 계기로 하일러와 친해진 후로 한스는 점차 의무감으로 하던 공부에서도 손을 놓아버리고, 둘은 더더욱 다른 무리들과 어울리는 대신 서로에게만 의지하게 된다. 서로 입을 맞추고(130) 하일러가 공부하는 한스를 꾀어서 함께 침실로 가자고 졸라대기도 하는(137) 식으로. 어느 날 하일러가 한스에게 “너는 젊은 여자의 뒤꽁무닐 따라가 본 적이 있니?”(185)하고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일러는 이 물음 이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른 도시까지 탈주를 하는 바람에 학교에서 퇴학조치 당하고, 한스는 하일러의 탈주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과하게 부진한 성적으로 선생님들과 학생들로부터 적대시되다가 이전부터 좋지 않던 건강이 더욱 쇠약해져 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른다.

 

 한스의 이야기는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로도 이어져서 엠마라는 외지 여자와 짧은 연애를 맛보기도 하지만, “당신도 나를 사랑해요?”(262)라는 엠마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으면서 다음 날 그녀가 자신에게 말도 않고 떠났다며 그녀의 문란함을 탓하는(268) 모습을 보인다. 학교를 떠난 후로 하일러는 한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한스의 꿈에서(255), 무의식에서(270) 하일러가 엠마와 함께 등장하는데, 한스에게 하일러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친구밖에 없다. 소설에서는 ‘게이’라든지 ‘동성애’라는 단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한스의 주위에는 사실상 자신을 제외하고는 동성애를 부정적으로조차 설명해 줄 사람이 하나 없다. 동성애가 없는 세계에서의 동성애는 그리하여 유별난 우정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라는 단어에, 친구라는 단어에 하일러를 끼워맞추는 일은 한스에게는 버거워 보인다. 한스에게 하일러는 첫 사랑이라는 단어를 찾지 못한 첫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스가 엠마에게 느낀 감정은 하일러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의 착시였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를 하는 데 끼어들고 싶은 여자애가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애 이야기를 그 애 앞에서 즐겁게 하는 것처럼. 하일러에게 한스는 소년기의 방황 중 하나였던 것도 같지만 한스에게 하일러는 가까이 있어도 잡히지 않는 동경이었다. 동경하는 상대가 권하는 일이라면 마땅한지 따져보지도 않고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상대는 내가 그와 같다고 오해한다면. 한스에게 하일러는, 어쩌면 누구나의 처음이 그렇듯,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 어른들이 주입한 공명심을 꺼리면서도 정해진 직선의 길을 성실하게 걷던 한스가 직선 밖으로, 돌부리와 강가에게로, 하일러에게로 이동한 것을 단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삶을 바꿔놓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이면서 사랑 이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나 동성애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한스는 하일러를 친구 이외의 이름으로 정할 수가 없어서 그저 막막했을 것이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마을 전체가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해치기 위해서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중학생일 때, 중학생 권장도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스에게 하일러의 입맞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자꾸 의문이 들었고 시간이 지나서는 이런 책을 읽히면서도 동성애를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묘사했던 서평에 배신감이 들었다. 『수레바퀴 밑에서』는 반어적/모순적 서술이 두드러지는 작품인데, 신학교를 나서고 아마도 이성애 사회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적응했을 하일러에 대한 소설의 마지막 서술은 이렇다. "그 정열적인 소년은~어엿한 한 인간이 되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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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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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그것은 갈무리 되고, 어떠한 결말을 맺는다. 그 후에 관객들은 그 결말에 대하여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면서 퇴장하지만, 서사 안에 남겨진 자는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건이 남긴 후유증들은 삶의 미세한 틈으로 속속 들어와 박힐 것이다. 남겨진 자는 그것을 참아 내거나, 그것에 굴복하거나, 혹은 무력해지는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스쳐갈 것이다. 그러니 일상은 오로지 남겨진 자의 것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 은 남겨진 자 ‘조지’의 어떤 하루를 그려내고 있다. 특정한 하루가 아닌 ‘어떤’ 하루라 지칭하는 이유는 이 작품 바깥에 있는 조지의 또 다른 하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는 연인 ‘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부재를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었고, 있고, 계속 있을) 일상 곳곳에서 확인하고 깨달으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맞붙여왔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 보니 볼품없이 늙어가고 있다.

 

조지는 그 누구보다 ‘홀로’다. 심지어 자신의 육체 앞에서도. 그는 본래의 자신,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모습(조지는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을 연기하는 자신, 그리고 타인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경계 짓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깨닫게 되는 건, 자신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짐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맥락 없이 자신을 향해 쳐들어오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으로 인해 조지는 연인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부분들까지 서슴없이 표출한다.  ‘조지 아저씨’,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인간은 때때로 무언가를 잃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아니, 조지, ‘과거’라니까! 어떻게 내 말뜻을 모른 체 해?”

과거란 지나간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지.”

“아니 이런, 어떻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어?”

“아니, 샬럿. 정말이야. 과거는 지나간 일이야. 사람들은 과거를 지나간 일로 생각하지 않지. 그래서 박물관 같은 걸 만드는 거야. 그렇지만 샬럿이 원하는 건 과거가 아니야. 영국에서 과거를 찾는 게 아냐. 뭐, 이 경우에는 샬럿이 찾으려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옳겠지.” (p.159)

 

 

또한, 짐의 부재가 확인된 그 시점부터 조지에게 과거란 추억이나 기억이 아닌 그저 ‘지나간 일’이다. 아무리 과거를 미화하고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한들, 앞으로 계속될 노화와 매일 아침 부엌의 스토브 앞에서 잠깐씩 스치던 짐의 팔꿈치를 떠올리고, 슬퍼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커피 내릴 준비를 하는 자신의 어떤 하루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신 조지는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고 몰입하고 파헤친다. 짐에게서 떨어져 나온 자신에 대해 사유한다. 하지만 내리게 되는 결론은 언제나 간단하다. 트럭에 치인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샬럿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을 사람은 짐이었을 것이라는,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는, 그야말로 우연에 관한 심심한 진술뿐.

 

 

 

02.

 

<싱글맨>은 아침에 홀로 일어나 자신의 삶이 ‘급히 끝날까 두려워’ 하며 죽음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해, 온갖 사유로 뒤덮인 하루를 보낸 후, 침대에 누워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고’, ‘사랑을 해야’,‘현재를 살아가야 한다’고 미약하게나마 희망을 좇기로 마음먹지만, 결국 두려워하던 ‘급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조지의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나와 당신은 그의 하루에서 도대체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조지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급한 끝’을 기어코 맞이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남겨진 자는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서로를 너무나 많이 사랑해도, 연인보다 먼저, 혹은 늦게 세상을 떠난다하더라도 결국 당신은 완전한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물론, 조지의 죽음이 누군가에겐 슬픈 결말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끝이 조지의 어떤 하루들이 모여 이뤄낸 성과처럼 느껴진다. 조지는 짐과 긴 시간동안 사랑을 했고, 짐이 떠난 후, 사랑이 남긴 빈자리에 서서 자신의 나름대로 남겨진 자의 본분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과 사랑이 떠나고 남긴 여진을 온몸으로 견뎌낸 바보들만이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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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어
안 소피 브라슴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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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어』을 발표할 당시 안 소피 브라슴은 열일곱 살이었다. 그녀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구상했다는 이 소설은 살인을 저지렀던 열여덟 살 소녀 샤를렌 보에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소설의 문장은 충격적인 사건에서 좀더 거리를 두고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파격적이고 강렬한 살인이라는 단어로 진입하는 대신, 샤를렌의 은밀한 기억을 파헤치는 것이다.

 샤를렌은 현실과 유리된 아이다. 그녀는 이를 두고 ‘세계는 나를 주목하지 않았고, 나는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p.14)’고 표현한다. 이런 샤를렌의 불안정한 입지는 후에 그녀를 중심으로 형성된 퀴어적 관계 구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샤를렌을 최초로 현실로 끌어낸 것은 다섯 살 때 만난 바네사였다. 스스로를 ‘작은 괴물(p.25)’이라 지칭하던 샤를렌은 ‘파란 사탕을 닮(p.25)’은 바네사를 통해 변화한다. 그 당시 샤를렌과 바네사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는 데는 때로는 말 한마디, 눈짓 한번으로 충분했다. 때로는 침묵만으로도 족했다. (…)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 우리의 생각, 우리가 하는 놀이, 우리의 세계는 모두 똑같았다. 우리는 같은 행성 위에 살고 있었다. 멀고, 이상하고, 다른 행성들과 떨어져 있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타인에 대한 몰이해(p.28)’를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던 샤를렌에게 있어서 바네사는 최초의 ‘주고받음’이었다. 하지만 열한 살 때 둘은 헤어지게 된다. 샤를렌은 바네사와의 이별이 ‘내 어린 시절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p.35)’한다고 느꼈다. 바네사가 떠난 뒤 중학교에 진학한 샤를렌은 호흡 곤란을 느낀다. 글을 통한 소통이 부정당했던 그때처럼. 그러나 초경을 겪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갖기 시작할 때쯤 샤를렌은 사라를 만난다. 사라를 본 순간 샤를렌은 자존감을 상실해버린다. 천식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던 그녀는 쉬지 않고 달리는 것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살을 시도해 병실에 누워 있던 샤를렌에게 사라가 병문안을 온다. 샤를렌은 사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받았다고 느꼈고, 안정감을 느(p.56)’낀다.

 

“내가 쇼팽 중학교에 처음 왔을 때부터, 너는 줄곧 내 호기심을 끌었지. 너는 혼자이고, 말이 없고, 무엇인가에 갇혀 있었지. 네가 불행하다는 걸 알아, 샤를렌. 분명히 그래. 너에겐 자아가 없어. 또 나는 네가 이렇게 병원에 있게 된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 그렇지? 너는 천식발작이 일어나면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너무 힘들면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너는 계속해서 뛰었어.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다 알고 있어. 네 마음 이해해.

 

 사라는 바네사가 주지 못했던 것을 샤를렌에게 준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삶을 발견하려는, 다시 태어나려는, ‘숨쉬어야 할’ 필요성이(p.58)’며, 새로운 샤를렌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샤를렌은 사라와 함께 지내면서 빠르게 안정감을 찾는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녀들의 관계는 파국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라는 샤를렌을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샤를렌은 그저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p.62)’다고 표현할 뿐이며, 작품 내내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샤를렌은 ‘대체 사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 아이, 내 삶을 변화시킨 그 아이를(p.66)’이라 말하며 답답함을 직접 토로한다.

 사라는 샤를렌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그녀에게 존재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때문에 샤를렌은 사라가 ‘생을 사랑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 해가 갈수록 강해지는, 한없는 욕구를 느(p.73)’끼게 된다. 그러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라는 샤를렌에게 싫증을 내는 한편 그녀를 지배하며 사디스틱한 쾌락을 맛보기 시작한다. 이해의 통로가 막히면서 샤를렌은 ‘단단한 덩어리가 다시 내 목구멍을 죄(p.82)’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오로지 그애를 가져야 했다. 내가 첫발짝을 뗄 수 없는 이상, 그애가 나에게 오게 해야 했다. 사라는 진실로 나에게 하나의 강박증이 되었다. 사라는 내 삶 속에서 필요불가결한 것, 내가 갈망하는 모든 지표, 과거, 내 모든 행복, 내 자유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샤를렌은 사라 앞에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녀의 ‘말들은 꽉 막혀버린 (…) 목구멍 속에 고정된 채 남(p.87)’는다. 대신 샤를렌은 자기 안으로 틀어박혀, 자신이 애착을 가질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나를 우리 가족이나 이 세상과 다르게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애착을 가질 대상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사라였다.

그때부터 나는 사라에게 내 모든 것을 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사라와의 관계에 더욱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나는 내 가족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삶 자체보다도 사라를 더 사랑했다. 나는 사랑이 왜 그렇게 멀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은 선(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 증오에 이르기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명예를 희생하는 것이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고, 불가피하게 악(惡)을 행하는 것이다. 내가 사라에게 준 사랑, 그것은 비뚤어지고 고통스럽고 격렬한 열정이었다. 광기가 나를 갉아먹었다.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 그것은 그 아이, 바로 사라였다.

 

 사라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결심한 뒤, 샤를렌은 우연히 바네사를 만난다. 바네사와의 만남은 사라에게서 벗어날 기회였다. 샤를렌은 사라와 있었던 모든 일을 울며 털어놓고, 얘기를 전부 들은 바네사는 샤를렌을 끌어안는다.

 

“널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 방법만 안다면 그렇게 할 텐데 말이야.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알아. 강박증이 어떤 건지도. 나도 너처럼 그걸 겪었으니까. 다만, 어느 곳에 있건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잊지 마.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 샤를렌, 그 무엇도. 나에게 그렇게 약속한 게 바로 너잖니. 잊지 마.”

 

 이후 바네사는 교도소에 있는 샤를렌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너의 파란 천사가(p.112)”라는 서명이 첨부되어 있다. 흥미로운 건 바네사는 샤를렌과 같이 젠더퀴어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인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바네사는 샤를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푸른 꽃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바네사 역시 샤를렌의 곁에 머물지 않는다. 이때 바네사를 대신하여 등장하는 인물이 막심이다.

 샤를렌에게 영향을 끼치는 캐릭터 중에서 유일한 남성인 막심은 무성적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열여섯 살 소년치고는 너무 약해 보였(p.136)’이고 ‘다른 남자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미로움을(p.143)’ 지니고 있다. 다섯 달 동안 둘은 진지하게 관계를 맺게 되고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사라를 잊을 정도로 막심을 사랑(p.153)’한다고 여기면서도 샤를렌은 ‘어떤 불안 같은 것이(p.157)’ 뱃속에 달라붙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된다.

 

“할 말이 있어, 막심.”

나는 그애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애의 반짝이는 시선에 눈이 부셨다. 나는 중얼거렸다.

“가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꿈을 꿔.”

나는 막심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막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애의 시선이 그때처럼 나를 겁나게 했던 적은 없었다.

 

 막심은 바네사처럼 ‘진한 파란색(p.173)’의 눈을 갖고 있다. 바꿔 말하면 막심은 샤를렌의 마지막 이상향, 혹은 마지막 구원자였던 것이다. 막심은 사라처럼 끊임없이 이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샤를렌은 막심과 함께 있으면 편히 호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막심은 샤를렌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며 이는 결말 부분에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후반부에 묘한 지점이 나온다. 샤를렌이 사라를 살해하는 계기로 작용한 전화 통화에서, 사라는 샤를렌에게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살려고 떠나는 거야. 너에게서 도망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려고 말이야. 너의 존재는 내가 성숙하는 걸 방해해. 너는 아직도 어린애야. 더 이상 너를 감당할 수가 없어. 물론 나는 어떤 점에서는 네가 내 뒤에 있지 않으면 숨쉴 수가 없지. 하지만 너는 나를 숨막히게 해. (…) 네가 이런 식으로 영원히 나에게 매달린다면, 나는 절대로 발전할 수가 없어. 너는 나를 숨막히게 해. 그러니까 나를 내버려둬. 그럼 안녕.”

 

 사라는 샤를렌이 자신의 숨을 막히게 만든다는 것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소통의 불가능으로 호흡 곤란을 겪고 있던 것이 샤를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지없이 언어는 의식 위를 미끄러져 간다. 사라의 말은 샤를렌에게 닿지 않았다. 샤를렌은 밤중에 사라의 집에 들어가 자고 있던 사라의 얼굴 위로 베개를 짓누른다. 자신이 겪던 호흡 곤란의 고통을 사라에게 확실히 느끼게 만든 것이다.

 사라가 죽은 다음날 샤를렌은 막심을 만난다. 막심은 샤를렌에게 “샤를렌, 그만 해. 나는 알고 있어(p.189)”라고 말하며 자신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하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샤를렌은 ‘숨쉬는 것을 잊어버(p.189)’린다. 그리고 샤를렌은 자신과 막심이 전혀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막심은 내 손목을 잡고 오랫동안 나를 응시했다. 나의 증오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내게서 진실을 끌어내려는 듯.

“샤를렌, 내 눈을 봐. 그리고 네가 한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해봐.”

갑자기 나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막심이 내 얼굴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막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고통과 혐오와 수치심을 느끼기는 하지만 내가 그 증오스러웠던 삶으로부터 영원한 승리자가 되어 빠져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막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작품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샤를렌은 ‘그 사건 이후, 내 안에서는 나 스스로도 구별해낼 수 없는 두 가지 정체성이 충돌하게 되었다(p.15)’고 말하고 있다. 불완전한 정체성을 지녔던 소수자는 자립하지 못하고 붕괴된 것이다. 『숨쉬어』는 이해받고 싶었으나 이해받지 못했던 한 소녀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인정투쟁의 과정과 그 실패를 담은 작품인 셈이다.

 

 

 

 

1) 아니면 이런 불안정한 입지 자체가 성소수자인 그녀의 포지션과 연관된 것일 수도 있다.

2) 바네사의 파란색 이미지는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두드러진다. 파란 사탕, 파란 향기, 파란 꽃, 파란 천사…….

노발리스의 『푸른 꽃』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3) 안 소피 브라슴 저, 최정수 역, 『숨쉬어』, 문학동네, 2007, p.26-27.

4) 위의 책, p.56-57.

5) 위의 책, p.82.

6) 위의 책, p.105-106.

7) 위의 책, p.111.

8) 위의 책, p.157.

9) 비약을 섞어서, 헤테로와 젠더퀴어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10) 안 소피 브라슴 저, 최정수 역, 『숨쉬어』, 문학동네, 2007, p.172.

11) 위의 책,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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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이 - 제7회 이화글빛문학상 수상작
이진송 지음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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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수업 시간을 떠올려 본다. 그때 나는 낯선 언어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습득하기도 전에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그 전에도 내 존재를 묘사할 언어가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를 떠올리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뿌연 안개가 내린 것처럼 답답했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름을 붙여주자 그제야 안개가 조금 가셨다. <승강이>는 메타소설 형식을 취하며 이러한 막막함을 다룬다. 

 

 주인공 정인은 스스로 불어불문과 공식 지진아라고 자조한다. 낯선 불어가 두려워지자 과연 자신을 표현할 언어란 것이 있을까 고민한다. 정인은 소설 창작 스터디 '승강이'를 지켜보며 소설 쓰기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소설의 제목이자 모임의 이름인 '승강이'는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는 일을 뜻한다. 모임의 구성원은 고집이 세고 예민한 성정의 인욱과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지호뿐이다. 이 두 사람과 이후에 모임에 가입하는 '강'은 정작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라 헤매는 정인에게 다양한 삶의 내력과 글쓰기 방식을 보여준다. 

 

 지호는 '세 아버지', '화냥년', '바이섹슈얼' 같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인물이다. 누군가는 불편하다 말하지만, 정인에게 지호는 '성별과 나이에 따른 호칭을 완전히 제거하고, 오롯이 자기 이름만을 내민 사람(26p)'이 된다. 독특한 삶이 글쓰기 소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가족 트라우마는 쓰지 않는다. 대신 체중을 일부러 늘리거나 머리를 짧게 자르는 등 외형의 조건을 바꾸며 글을 쓴다. 이것이 지호만이 쓸 수 있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강 역시 남다른 내력을 글로 풀어낸다. 한국에서 곧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강은 한국 바깥에서 쉽게 그 사회적 위치가 전복된다. 강이 아시아 남성과 미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강은 어려운 한국어를 떠듬거리며 글을 쓴다. 모두가 무시한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기록한다.

 

 어떤 이야기는 강처럼 이미 끝난 사유를 마무리하며 자신을 갈무리하는 작업이다. 어떤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혼란을 억지로 매듭지으며 마련되기도 한다. 정인은 인욱이 가장 가까운 인연이었던 연인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그리고 글 바깥에서, 여전히 사랑과 혼란의 언저리에 선 둘을 목격한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 붙들려는 노력(143p)'이 넘실거리는 소설, 그리고 조금 다른 현실의 두 사람은 정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인욱은 오랫동안 쓰지 못하는 정인에게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지어보라 조언해준다. 하지만 그 어떤 조언도 정인에게 와 닿지 않는다. 마치 승강이와 다름없는 합평 시간에 인욱과 지호가 하듯 말이다. 이들은 "합평에서 들은 말들 중 채 절반도, 소설을 수정하는 데 반영하는 법이 없었고 어떤 말을 들어도 상처 받거나 휘둘리지 않(52p)"는다. 결국, 정인이 무언가를 쓰기 위해선 쓰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이야기' 쓰기란 존재와 직결되므로 다른 어떤 글쓰기보다 어렵다. 정인의 경우 가까운 이야기란 주변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인데, 그들에게 상처가 될까 쓰기도 전부터 겁을 먹는다. 하지만 사실 정인의 두려움은 '이야기 없음'이 드러날까 겁나는 것에 가깝다. 정인은 무탈한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이 원망이 무색하게도 정인은 '지하철 자뻑녀' 사건으로 단번에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언어가 진실에 닿기를, 내 존재를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믿음이 거짓말과 진실의 뒤범벅인 마녀사냥으로 빠르게 바래버린다. 다행히 정인의 주변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찍겠다고 자유롭게 나라 밖을 걷는 고모가 있었고, 유쾌하게 위로할 줄 아는 승강이 구성원이 있었다. 정인은 그제야 자신에게 효용이 있는 언어를 발견한다. 물론 정인의 발견은 언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직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만 쓰려고 하는 강의 글을 첨삭하다 문득 인욱은 "외부의 모든 요인을 제거했을 때, 과연 그 사랑이 얼마나 오롯한 형태로 남을 수 있을까?(144p)" 하고 묻는다. 사랑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아닌 것을 묘사해야 하며 나를 서술하기 위해선 내가 아닌 것과 나의 관계를 써야 한다. 누군가에겐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없을 수도 있다. 나와 부딪히며 '이야기'를 만들어낼 사람이, 사건이 없다면 그럴 만하다. 혹은 정인처럼 써야 할 이야기 자체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인욱은 오랫동안 쓰지 못한 정인에게 "소설을 쓰려면, 하다못해 자기와 가까운 이야기를 쓰려면 지금까지 있던 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탈주가 필요(200p)"하다고 말한다. 

 

 정인에겐 물리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이상의 정신적 탈주가 필요했다. 정인은 결코 자신이 이야기가 없다는 것에 상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정인은 긴 시간 멤버들의 글쓰기를 보아왔다.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셈이다. 지호는 정인에게 너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다독여준다.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을 수 있을까? 

 

 인욱은 같이 쓰는 것이야말로 거대한 판타지라고 말한다. 여럿이 벌써 그 '판타지'가 쉽지 않음을 증명하며 승강이를 거쳐 갔다. 그런데도 인욱이 '함께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계속' 나를 짓기' 위해서일 것이다. 공들여 타인의 글을 읽고 말을 보태며 함께 쓰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문장에 가까워진다. 인욱과 지호와 강이 그랬고, 마침내 정인까지 첫 소설을 완성한 것처럼.

 

 동이 트는 새벽녘, 정인은 지호에게 전화를 걸어 소설을 완성했다고 말한다. 흐릿한 새벽에도 오히려 머리는 상쾌하고 몸은 열에 들뜬다. 그 열에 들뜨는 시간이 모여 거대한 판타지를 현실로 견인한다. '승강이'는 함께 쓰다 나를 지을 수 있게 돕는다. 비록 애매하게 갈무리해 혼란스럽기만 한 글을 내놓아도 '승강이'에선 너의 글쓰기라며 격려받는다. 이렇게 홀로 서고 나면 함께 내는 빛에 힘이 실리고, 이를 갈망하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초대하는 길이 된다. 

 

벌써 미간에 주름이 잡힌 인욱과, 오늘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모호한 모습의 지호가 더럭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둘은 그 단어가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뜻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그 말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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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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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또는 스스로와 사회 사이에 대한 크고 작은 괴리감을 느끼며 살아가고는 한다. 그 과정에는 체념, 부정, 실망 같은 경험들이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이 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괴리감이란 삶을 나타내는 징표의 하나라고 봐도 되겠다. 이은조의 <나를 생각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괴리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나에게서, 당신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다양성을 말이다.
 

 

 denial [명사] 1. (무엇의 사실성·존재에 대한) 부인[부정] 2. (권리 주장에 대한) 거부 3.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사실에 대한) 부정

 

 사전에 등재된 ‘디나이얼’의 뜻이다. 외에 거부, 거절, 절제, 극기 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요즘 들어 디나이얼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유독 자주 발견하고 있었다. 바로 그 디나이얼 퀴어로 보이는 인물들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 주인공 장유안의 할머니가 오랜 친구를 사랑했음은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뒤늦게 발견되었고, 장유안의 어머니와 관해서도 어머니가 친구 한주와 깊은 감정적 연대를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서술이 있었다. 언니 장재영은 유미연과 동거하며 유미연의 아이를 함께 키우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디나이얼인가 싶은 생각으로 읽어나가다 의아해졌다. 디나이얼이란 무엇일까. 내가 누군가를 일컬어 디나이얼 퀴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는 올바른 지적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디나이얼이란 자신에 대해 자각하고도 부정하는 상태라고 한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 그렇다면 자각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퀴어적인 것에서 눈을 돌려도 디나이얼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장유안과 그의 애인도 사랑에 대해 혼란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승원은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 5년째 연애 중인 승원과 나였다. 군대 동기처럼 만난다는 농담이 더 이상 기분 나쁘지 않다.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연인이다. 승원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대뜸 집으로 오라고 했다. 문득,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51p)」에서 「연애가 지겨웠던 거였고 두려운 거였지 승원이 지겨운 건 아니었다. 나의 아름다운 시절들이 시간과 함께 소진해 버렸다는 아쉬움 때문에 새로운 사랑에 자신이 없다고 미리 겁먹었다. (중략)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 친구들과 헤어지기 위해 비겁하게 결혼 얘기를 꺼냈던 적이 있다. 승원에게도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240p)」까지. 함께여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라는 듯 행동하던, 이럴 거면 왜 연애를 하는지 회의감을 갖고 있던 그들이다. 장유안이 무엇을 모른 체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사회적·암묵적으로 학습된 자기 부정, 이탈하지 않으려는 심리 등은 곧잘 혐오로 이어지지만 혐오를 내포한 부정으로도 이어진다. 사회는 아직까지도 개인이 스스로를 부정하여 다수와 결속될 것을 요구한다. 즉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각의 여부와도 관계 없이 다양한 디나이얼 상황에 강압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부모의 오랜 기대에 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시선과 검열에 지기도 한다. 인물들의 개연성 없어 보이는 행동이나 충동적인 말들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디나이얼 상태는 퀘스쳐닝과 유사한 일종의 출발 지점이라고. 괴리를 줄이는 과정은 개인이 자신의 온전함을 쫓는 과정이다. 거기에는 타인의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전에 필자가 쓴 황정은 작 <파씨의 입문> 리뷰에서와 마찬가지로, ‘과연 타인을 쉽게 수식해버려도 괜찮은가’라는 말을 번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어만 치환해도 된다. '모두가 디나이얼이면서 디나이얼이 아닌 세계'.

 

 

 필자는 현재 퀴어로서 소수 중에서도 소수로 정체화했다. 여기까지 이르는 중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정당한 적이 있다. 그 경험은 필자가 그때까지 한 번도 느끼지 않았던 격렬한 디나이얼 상태를 가져왔다. 정말 내가 나라고 믿어온 것이 아닌 다른 것이었는지에 대해 무한한 회의를 거쳤고 심지어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리되는 기분이었다. 떠올리면 종종 등골이 서늘하다. 네가 무엇이 아닐 것이라는 말에 그토록 흔들렸는데, 만일 다른 누군가는 내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정과 외면이 강할수록 돌아가는 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모두 나의 선택일 뿐이다. 나를 정하는 일은 언제나 내가 해왔고 앞으로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타인의 괴리에 대해 또다른 타인은 이름을 수여할 수 없다. 내가 나를 부정해도 타인은 나를 부정할 수 없듯, 내가 나를 부정했다고 하기 전에는 타인이 '너는 부정했다'고 할 수 없다.

 필자가 뒤늦은 불안에 몸서리칠 때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장유안의 어머니는 딸들에게 던진다. 이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는 출발 지점을 떠나게 된다. 인용으로 글을 마친다.

“딸들아. 다르다는 거, 그거 그냥 다른 거지 틀린 건 아니지?”

 재영이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방에 침묵이 고였다. 엄마가 다시 이불을 젖히고 재영과 나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잘못된 거 아니지? 나쁜 거…아니지?”

 나는 엄마에게 바짝 다가가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263p)

 

 

 


1) 출처: Oxford Advanced Learner's English-Korean Dictionary

2) http://rainbowbookmark.com/xe/review/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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