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특급우편
방현희 지음 / 열림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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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달리는 사람은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세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나의 존재와 나의 이끌림이 어떤 체험인지 밝히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부를 언어를 마련하는 것처럼.   

 

방현희 작가의 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에 수록된 '붉은 이마 여자'는 느닷없이 '첫째 날, 그녀는 막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35)' 듣는다.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녀는 뛰쳐 달려나간다. 물론 달려야 하지만 왜 달려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힘찬 달음박질은 어떠한 의심도 없이 경쾌하다. 독자 역시 숨 가쁘게 그녀의 달리기에 동참한다. 

 

'붉은 이마 여자'의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할아버지와 '내 남자', 진홍색 카펫을 짜는 여자와 마주친다. 처음으로 만난 할아버지에겐 흐트러짐 없이 춤추는 법을 배운다. 그 춤이 오로지 할아버지의 춤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는 아직 자신만의 춤을 춰본 적이 없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엔 '저들은 누구지?'라는 물음이 생겨난다. 무엇을 위한 춤인지, 왜 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자 그녀는 달아난다. 물음을 해소하지 못한 채 달리던 그녀의 눈앞에 진홍색 카펫을 짜는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짜던 카펫 위에 그녀를 올리고 펄럭인다. 속절없이 휘둘리는 동안 처음 춤을 일러준 할아버지의 조언이 귀에 머문다. '네 몸을 타라구'(39) 그제야 그녀는 춤이라고 할 만한 물결을 발견한다. 여자가 진홍빛 카펫 위로 자신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낯선 여자로부터 도망친다. 소설은 도망쳤던 그녀가 자신만의 춤, 자신만의 물결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은 처음 퀴어적인 체험을 하고, 이를 부정하지만 결국 재정체화를 하는 퀴어의 성장 서사다. '붉은 이마 여자'의 그녀는 퀴어를 향한 부정적인 편견을 맞닥뜨리고 내면화하기까지 한다. '내 남자'는 그녀의 강렬한 체험더러 병을 앓은 것이라고, 잊으면 낫는다고 말한다. 어느새 '내 다리가 또 다른 문을 열거야'(41)라고 자신했던 그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달리기 여정과 직접 체험했던 진정한 춤을 잊는 편을 택한다.  

 

그녀는 강렬한 이끌림을 주었던 여자와 다시 만나기 위해 달리고 주저앉길 반복했다. 과연 방해받고 지체된 시간만 남았을까? 집요하게 물은 끝에 그녀는 '달려야만 한다'에서 '멈추지 않아도 좋아(55)'라는 선언을 스스로 끌어낸다. 그녀는 태어난 지 일곱 째날이 지나고 마침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진홍색 카펫을 짜던 여자를 만난다. 자신을 카펫 위에 태우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를 열어주었던 그 여자는 '무척 익숙한 습기(57)'로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녀는 '내 남자'와 할아버지와 여러 춤을 추었지만, 그 여자와 함께일 때 가장 자연스럽게 춤춘다. 비로소 그녀는 '너는 여자? 아니, 남자? 아, 너는 사람. 여자이고 남자이며 할아버지이기도 한 너는 사람'(58)이라고 탄식한다. 여자가 바로 그녀가 겪은 모든 춤의 경험이 증명해준 이끌림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녀가 도망가야 했던 낯선 이도 아니며 '내 남자'와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춤을 출 수 있는 존재라고 깨달은 것이다.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으로. 그녀는 '순간 몇 세기쯤 살아낸 것 같(58)'다고 땀을 훔친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칠 일을 묘사한 '붉은 이마 여자'는 몇 세기 동안 이어진 퀴어들의 체험을 진홍색 카펫 위로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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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죽는다
마르셀라 이아쿱 지음, 홍은주 옮김 / 세계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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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백하건대 읽기는 쉬웠지만 알아듣기는 쉽지 않았다. 심리소설, 이라는 작은 카테고리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아주 치밀하게 ‘책 속의 책’ 구조를 취하며 온갖 풍자와 날카로운 지적들로 차 있다.

 서문에서 스포일러를 할 수밖에 없겠다. 이 책이 퀴어문학으로 분류된 것은 ‘책 속의 책’ 작가이자 주인공인 장 뤽 자메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혐오해온-그러나 스스로가 그 ‘환자’임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히 알고 있었던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죽는다>. 제목을 보고 고른 책이었다. 그렇지. 사랑을 하면 우리는 일말의 죽음을 맞이하지.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안일한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장 뤽 자메의 손과 입을 빌어 마르셀라 이아쿱이 ‘이상성욕자’들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쓰여진 대로 사랑이 위험하고 잔혹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책을 사흘 만에 완독하고 몇 주간 머리를 싸매며 다른 독자들의 감상을 찾아보고 다시 책을 읽기를 반복하다 내린 결론은 이아쿱이 이 책을 통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통속적이었고 이제는 정치적으로까지 변해가는 이슈, 바로 사랑을 매개로 많은 부조리들을 지적한 거라는 추측이었다.

 물론 사랑은 위험과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분명히 파괴하고 억압하며 사랑하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분명히 눈을 멀게 하고 몸을 내던지며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쉽게 볼 수 없지만 그런다고 없는 것은 아니었던 일들이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이아쿱은 바로 이런 것을 모조리 들춰내어 보여준다. 그리고 깊이 찌른다. “당신들이 억압하려 드는 가장 자유로운 가치인 사랑에도 끔찍한 사실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그것으로, 지배함으로 인해 억압이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이아쿱의 비판은 정확하다. 장 뤽 자메의 직업을 정신과 의사로 설정한 것은 다양한 내담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 그가 스스로의 동성애를 ‘치료’하고 억제하기 위해 정신의학을 배우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끝내 그 동성애와 더불어 자신이 규제를 주장해왔던 ‘억압하는 사랑’에 의해 의학계에서의 입지를 모두 잃는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지나치게 완벽한 호모포빅 언어 구사는 우습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퀴어에 관한 것보다도, 이아쿱이 공권력, 지배층을 상대로 취하는 강경한 태도다.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거짓말쟁이로 살았고 그 은폐야말로 진정 용기 있는 행위였다고 자부한다. 길에서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자기들의 비밀을 부모한테 또는 텔레비전에 나와 공개하는 걸 용기인 줄 아는 동성애자들을 보거나, 법률에 맞서 그네들을 결혼시켜 주는 시장 나리를 영웅 취급하는 것을 보면 솔직히 한심해서 코웃음이 나온다. 감춘 채 사는 것, 자신의 충동과는 정반대로 사는 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보다 몇 곱절 영웅적인 행위이다.(173)

 새 법률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이용한 캠페인을 통해 국민들에게 억압적 사랑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고,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커리큘럼에 스스로를 통제하고 보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내용을 넣기로 했다. 동시에 억압적 사랑을 감시하는 고등 위원회도 창설해 광고, 영화, 서적 등을 주의 깊게 검열해 정열적 사랑을 예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이 위원회에는 위반을 저지른 매체의 제작과 상영, 배포를 금지할 권리, 그리고 이 무서운 재앙의 씨가 불러오는 폐해에 관해 각 매체에 설명을 덧붙이도록(담뱃갑에 폐암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방침이다.(191)

 소설의 어조는 전체적으로 이렇다. 이쯤에서 제목의 본질로 돌아가보면, <사랑하면 죽는다>의 ‘죽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죽는 것은 사랑하는 ‘나’이다. 사랑하여-억압당하는, 스스로 굴레에 갇히는 ‘나’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다름아닌 감시이며 제한이고 지배이다. 그것은 ‘억압적 사랑’으로 치환된다.

 

 이 책은 2006년에 발간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제목만을 보고 고른 책이 신기할 만큼 2016년에도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많은 것을 사랑한다. 친구나 연인, 부모, 형제를 넘어 우리가 사는 곳, 생활하는 방식, 자유와 선택. 때로는 아슬아슬한 위험까지도. 그러나 우리는 곧잘 자발적인 사랑에서 자의를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그것을 더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익명의 섹스, 자위, 혹은 상업적인 섹스는 적어도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공권력과 통치자들이 이 점을 훤히 알면서도 입 밖에 내기를 꺼리는 것은 사람들을 섹스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사나운 정열에 희생시키고 싶은 까닭이다. 공권력은 순전히 성적인 유혹이 가볍고 유쾌한 관계를 만든다는 것도 알고, 그런 관계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뭘 주고받는지 실은 꿰뚫고 있다는 것도 안다. 아울러 사람들이 섹스를 위한 섹스가 대단히 특별하고 신성한 행위라는 진부한 환상을 품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도 안다. 공권력은 일체의 감상적 사랑을 배제한 섹스만으로는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러므로 대중을 시장 원리에 복종시키려면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공권력은 대중이 이 세상의 문제점을 들춰내지 않고 잠들어 있기를, 욕망과 꿈에 떨면서 몽롱하게 취해 있기를, 군소리 없이 사랑을 따르는 것처럼 다른 압제와 모욕도 얌전히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다.(85) 

 장 뤽 자메는 ‘이상성욕자’를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는 공권력을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뒤이어 나오는 구절에서도 부패한 권력들과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훼손하고 죽이는지를 밝힌다.

 하지만 사랑을 이용해 알토란 같은 이득을 챙기는 쪽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세력일 것이다. 대기업과 은행과 영화 산업 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분 좋게 들떠 있고, 인생이 장밋빛인 줄 알고, 뭐든지 받아들이고, 어떤 희생이라도 개의치 않으며 자기 자신조차도 잊어버리는 법이다. 설령 사랑이 종말을 맞는다 해도 그의 기억과 꿈은 기다리라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또 그런 일이 찾아올 것>이라고 속삭인다. 귀를 간질이는 그 한마디로 인해 우리는 참고 따르는 것이다.(86)

 이렇듯 이아쿱이 압제에 대항하여 외치는 바는, 왜 사랑하는 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철저하게 현실적인 시선과 지식을 기반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사랑을 하자. 지난 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이었던 "사랑하라, 저항하라"와 비슷한 결을 가진 말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조지 오웰의 <1984>를 다른 방식으로, 다른 매개로 쓴 책이나 다름없다. 두 책에서 '죽는' 것은 모두 사랑하는 자들이다. 사랑하면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할 것이고 저항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 사랑으로 완전하도록.

 

 

 


 

1) 장 뤽 자메는 타인을 파괴하고 학대한 사람을 '이상성욕자'라고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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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사랑했든 내가 사랑했든 창비청소년문학 55
송경아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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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책 표지에서 강하게 어필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말해본다. 이 작품은 퀴어 문학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었던 책으로, 굳이 리스트에서 찾지 않아도 도서관에서 지나가다 제목을 읽으면 '아 이건 퀴어 문학이겠구나' 하는 작품이었기에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어 두 번째 리뷰인 이번달 리뷰에서도 청소년 소설을 다루고 있는데, 필자도 아직 청소년 대열에 껴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소소히 든다. 간단한 작품 소개를 먼저 해보자면, 고3 성준이가 누나의 대학 선배에게 첫눈에 반한, 하지만 연애라는 주제보다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소소한 성장 소설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넌 경험이 없으니까 아직 이성애자인지 아닌지 몰라.'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 36p

 

첫번째 리뷰를 장식했던 '줄리엣 클럽' 이야기를 잠시 다시 꺼내 비교해보면, 3년 사이에 국내 청소년 문학에서 '퀴어'라는 개념이 꽤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이반사냥에 쫓겼던 낭만적인 조연에서, 성장해나가는 현실 속 주연으로. 그저 취향의 하나, 혹은 동정으로 주인공에게 이해받는 존재에 그쳤던 동성애자는 이제 당당한 성장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독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작중 호모포비아의 비중도 확 줄어들었을 뿐더러 퀴어에 대한 이해 또한 수준이 높아졌다. 물론 그동안 읽었던 작품의 폭이 좁아 미처 다른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둘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다르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강한 게이, 약한 게이, 이런 개념도 있을 수 있을까? 진성 게이, 가성 게이, 뭐 그런 거. (중략) 혹시 치료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나도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와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을까? - 53p

 

주인공 성준이가 게이이고, 성준이가 써내려간 독백이 소설로 옮겨졌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체성 혼란일 것이다. 많은 성소수자가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자신의 모습을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면, 성준이는 중학생때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긴 것이 그런 순간이었다. 이때의 독백들은 중학생답게 단순하고 풋풋해 읽고 있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낼 만큼 귀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씁쓸했고, 커밍아웃도 하지 못하고 혼자 기승전결을 마친 첫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랬다. 여담이지만 이 때의 소제목이 '마이 게이 라이프'였다는 점에서 한번 더 웃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왠지 굉장히 한심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 스물 될 때까지 여자애들이 관심 두는 종목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누나도, 여자랑 연애할 일도 없으면서 여성지와 패션 잡지를 통해 여자들 심리를 알고 있는 나도. - 78p

 

성준이에 초점을 맞추고 읽다가 다시 한 번 읽을 때는 성준이의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인용한 부분처럼 누나는 사람들이 '여성성' 이라고 말하는 것들과 반대로 털털한 말괄량이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에서 만난 선배를 짝사랑 하게 된 누나는 소위 '예쁜 여자'가 되기 위해 남동생에게서 여성성의 상징같이 느껴지는 것들을 배워나간다. 마치 틀에 자신을 맞추듯 지쳐서 반쯤은 강요당하는 모습이 스토리를 따라가다 우연히 등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작중에서 그녀를 짝사랑하는 성준의 친구가 정의롭고 멋진 그녀의 맨얼굴에 반했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누군가가 사랑해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감정은 어디서 시작되고, 무얼 먹고 자라나는 걸까. -125p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기에, 마지막 내용은 더 이상 리뷰에 언급하고 싶지 않아졌다. 전체적으로 풋풋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고, 필자가 마음대로 이 작품에 의의를 쥐어주자면 '청소년 문학 속 퀴어'라는 나무의 나이테 중 하나, 라고 하고 싶다. 점점 성장해 가는 시선에 소설을 읽으면서도 재미와 함께 기쁨을 느꼈다.

(+) 현재 성준이와 같은 고삼 입장에서 덧붙이자면, 저도 주인공이라고 대학 참 쉽게 들어간 것 같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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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바네사 벨
수전 셀러스 지음, 강수정 옮김 / 안나푸르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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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자매간의 애증 관계, 혹은 여성 예술가들 사이의 미묘한 경계심과 질투심만으로 범벅된 소설로서 읽히지 않는다. 수전 셀러스의 <그녀들의 방>은 내면적으로는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온전히 함께이기엔 힘들었기에 행복을 품에 안고 눈감을 수 없었던 두 여자의 예술적 투쟁으로의 레즈비어니즘을 이야기한 작품임에 다름없다.

 

 

소설의 화자인 바네사 벨은 자신의 여동생 버지니아 울프를 가리켜 ‘세상과 맞설 때 너와 나는 자연스레 동지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어처구니없는 세상, 즉 몸가짐이 단정하고 헌신적인 숙녀 혹은 천사의 모습을 한 보좌관과 같은 어머니를 요구하는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생득적으로 취하게 된 여성이라는 성별은 자매가 가진 예술적 야망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버지니아는 숙녀와 천사의 완벽하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펜 끝으로 찔렀으며 바네사는 그 생생한 살해 장면을 그녀 정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조하고 받아들인다. 매우 정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시냅스형성이 둘 사이의 가교가 되어 그녀들의 애정 관계와 예술 세계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바네사는 붓으로, 버지니아는 펜으로, 아름답고 처연한 달음박질을 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작품 속에는 바네사의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자주 언급된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네사의 그림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버지니아의 영혼이다.

 

‘붉은 계통의 두 색이 서로를 피하고 또 부르는 모습이 매혹적이다. 이따금 캔버스에서 한 발 멀찍이 떨어져서 봐도 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p.78)’ 

 

같은 계통의 붉은 색들이 그림 안에서 서로를 매혹할 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직사각형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낸 바네사는 그제야 비로소 스스로가 ‘내 집’, 곧 ‘자기만의 방’의 주인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바로 다음 장에서 버지니아의 존재를 어두운 주홍색이 다홍색에 섞여든 빛깔이라 표현하며 그녀가 있음으로 인해 자신의 흐릿한 색감이 빛을 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바네사의 예술에 있어 버지니아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음을 뜻하고 이것은 물론 버지니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버지니아는 자신의 가족과 그 주변의 인물들에 허구적 상상력을 덧붙여 생생한 문학작품으로 버무려내는데 그 작품들은 예술적 이상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바네사를 위한 것이었다. 소설 출간 전 자신도 좋아할 만한 책이냐는 바네사의 질문에 버지니아는 희미하게 애원하는 투로 대답한다. “나야 그러길 바라지......내가 하는 일은 대부분 언니를 위한 거라는 거 알잖아.(p.126)" 이외에도 바네사가 유달리 사랑했던 형제 ‘토비’의 이야기를 오직 바네사를 위해 쓰기로 한 점 등이 그러하다. 그녀들의 예술은 서로를 떼어놓고는 완성될 수 없었고 바네사는 버지니아가 있음으로 인해 균형을 유지하고 작품의 의미를 채울 수 있다고 소설 속에서 덤덤히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뜻을 같이 하는 동료이자 서로의 뮤즈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추구하는 예술적 이상에 있어서도 같은 팔레트 구획의 색깔처럼 연결된 존재였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연결은 결코 누군가가 대체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존재감과 성애적 감정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의붓 언니의 이른 죽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의붓 형제들의 정서적 학대 속에서 두 사람은 오롯이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애정의 영역을 오랜 시간 공유하게 된다. 언젠가는 자신들을 두르고 있는 그 모든 족쇄로부터 벗어나 둘만의 안락한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를 꿈꾸며 그 어떤 사랑의 연인보다 친밀한 시간을 어린 시절부터 함께 보내온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부둥켜안는다. 요양원의 벽이 사라지고, 우리는 한밤중에 놀이방에서 단 둘이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너는 나의 말썽꾸러기 염소, 나의 웜바트, 나의 생쥐다. 나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너의 털을 쓰다듬고, 너는 코를 내 뺨에 비빈다. 욕심 많은 원숭이 같은 네 입술은 배가 고픈 것처럼 장난스럽게 내 목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나는 다시 한 번 너의 돌고래 엄마가 되고 너의 입맞춤에 끈적끈적한 침 범벅이 된다. 아무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는 바닷속 깊은 곳으로 너를 데려가줄게.’(p.75) 

 

후에 버지니아는 결혼한 바네사의 남편 클라이브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긴다. “첫사랑을 대신하기란 힘들어요. 돌고래들은 다 아는 사실이죠.(p.102)” 그리고 둘만의 이야기에서만 주고받아지곤 했던 ‘돌고래’ 이야기에 바네사는 공연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표현한다.

 

 

 

버지니아에게 있어 문학에 대한 애정을 제외하고 평생에 걸친 단 하나의 사랑이 있었다면 아마 바네사였을 것이다. 그에 대한 암시가 소설 곳곳 버지니아의 대사나 두 사람 간의 대화, 마주침에서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 소설 속에서 버지니아는 클라이브와 만남으로써 자신의 통제력 너머로 빠져나가는 관능적인 언니를 바라보며 펜으로 종이를 맹렬히 긁어대고 후에 언니가 가지게 된 아이에게도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버지니아 혼자만의 쓰라린 애정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바네사에게 있어 버지니아 또한 평생 대체할 수 없었던 사랑의 존재이자 연인이었다.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감정의 실이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두 사람을 강하게 이었고 바네사 또한 실을 감아올리듯 소설 전체 속에서 끊임없이 버지니아를 부르고, 그리워하고, 찾아 헤맨다. 심지어 레너드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것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동생의 소식을 듣고 기운이 나서 곧바로 두 뺨에 생기가 되돌아 올 정도로.

 

바네사는 끊임없이 사랑할 존재를 찾는다. 하지만 단지 예술적 신념이나 육체적 끌림으로 인해 이어져 온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내적으로 충만한 만족은 결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바네사가 함께 그림을 그리던 남자, 던컨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녀가 그 안에서 버지니아의 영혼을 찾았을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고 문학적으로 지지해 준 남편 레너드 울프에게 죽기 전까지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했던 버지니아였지만 삶의 커다란 결핍을 느꼈던 그녀는 결국 강둑의 돌을 주머니에 한가득 넣고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은 우리의 예술작품이고 우리는 섭리의 한 부분‘이라 언니에게 이야기했던 버지니아는 바네사와 온전히 함께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그녀가 죽은 뒤 바네사는 자신이 그린 그림 속 여자가 사실은 붓이 아닌 펜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는 예술도, 삶도, 그 모든 것이 두 사람간의 강한 유대이자 연결에서 비롯된 것이며 심지어 그 자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바네사는 죽은 버지니아의 마지막 소설 표지 작업을 맡는다. 두 사람이 세상에 대해 맞서고 투쟁하고자 선택한 수단이었던 스스로의 문학과 그림이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 둘 중에서 한 사람이 항복하면 또 한 사람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투쟁에서 흘린 피를 목격한다. 그리고 저 멀리, 괴물처럼, 찬란한 색깔의 풍선이 둥실둥실 떠간다.(p.278)’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바네사는 이젤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노랗게 빛나는 햇빛을 응시하며 버지니아에게 독백한다. ‘네가 옳다. 중요한 건 창작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p.299)’라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버지니아에게 보내는 일종의 서신과도 같아 보인다. 함께 세상과 예술에 대한 꿈을 꾸며 사랑을 나누고 둘만의 해저로 들어가 걷기를 원했지만 이룩하지 못한 것의 완결에 바치는 사랑의 경구가 색색으로 흩뿌려진 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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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장난
전아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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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감독이란 죽은 떠돌이 개의 사체를 찍기 위해 찾아다니는 쪽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개를 향해 트럭을 내모는 편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 이름 말이야.71p

 

 어릴 적부터 문학 천재라 불리며 문단의 관심을 받아온 전아리 작가의 첫 소설집 ‘즐거운 장난’에 3번째로 수록된 단편 ‘내 이름 말이야’. 어딘지 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을 보고 난 뒤 제일 처음으로 든 생각은 숨이 탁 막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주인공은 다큐멘터리를 찍는 아주 평범한 학부생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지위는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그는 교내 다큐멘터리 동아리의 부장을 맡고있다. 하지만 그의 지휘 아래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들은 단 한 번도 대회란 대회에서 이렇다 할 실적을 낸 적이 없다.

 

 최근 공모전에서 또다시 떨어지고 부원 모두가 예민해진 어느 날, 조금 사나운 분위기 사이 주인공은 ‘그’를 문득 떠올린다. 맞은편 빌라에 사는 그 남자.

와인색 계열의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팬티는 거의 검은색만 입는, 가슴이 풍만한, 다리의 알통을 곧추세운 채 하이힐을 신고 주인공을 스쳐 지나갔던.

 

 과거, 직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의 친구 중 하나는 스너프 필름에 관해 이야기하다_예찬에 가까웠다_갑자기 주인공의 작품을 아마추어라 칭하며 쐐기를 박았다. 특이하지 못한, 시선을 끌지 못하는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비화제성에 대해 말하던 친구는 주인공에게 스너프 필름을 건네주고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현재, 주인공은 개의 사체를 찾기보다 개를 향해 트럭을 내몰기로 한다. 처음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결국 트럭의 손잡이를 손수 잡은 것과 마찬가지가 돼버린 그는 화장품 세트를 사 들고 부원들과 함께 맞은편 빌라의 남자를 찾아간다.

 

 

 

예상했다시피 그는 트렌스젠더였다. 에스트로젠 주사에 의지해 마냥 건전하지는 못할 업소에서 일하는 그는, 그리고 그의 집은 어딘지 어둡고, 습기 찬 느낌을 주었다. 부원들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상상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리라. 가는 몸매에 섹시한 얼굴을 가진 여자이기를 바란 걸까. 덩어리에 가까워 보이는 커다란 가슴과 화장실에 놓인 남성용 면도 도구들이 주는 이질감은 기대에 부풀어있던 그들의 눈을 냉소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주인공, 그리고 부원들의 태도가 마치 우리들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즉 하염없이 흘러가는 사회 속 우리들의 편견, 실망, 그리고 곱지 않은 눈초리가 주인공과 부원들의 행동을 통해 보이는 게 아닐까.

윗옷 사이로 흘러나온 브래지어, 화장실에 놓인 면도 도구, 치마 사이로 미끄러지는 듯 보이는 그의 시선,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찾아간 업소. 모든 것이 그 몰래 영상 속에 담겼다. 마치 그 몰래 모두가 그를 비웃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오직 그만을 제외하고 그에게 보이지 않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가령, 이 소설 속에서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라고 불리지 못했다. 인정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처참한 다큐멘터리_결국 그 다큐멘터리는 대상을 탔다_를 보게 된다. 마냥 좋은 사람들이라 믿었던, 그들에게서 배신당한 기분은 과연 어떨까. 단지 내가 되었을 뿐인데 이 세상, 사회에서 동떨어져, 마치 아무도 없는 바다 위 섬이 된 듯한 기분을 그는 느꼈을까.

 

 

다큐멘터리 봤어요. 홈페이지 가보니까 볼 수 있길래. 잘못 나온 게 하나 있더라구. 내 이름 말이야, 모영욱이 아니라 ‘모영은’이거든. -내 이름 말이야.79p

 

 결국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뜻은 그가 아닌,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편견과 실망과 눈초리를 향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악다구니가 아니었을까.

 

 며칠 후 주인공은 발신자가 불분명한 택배 하나를 받는다. 그 안에는 스너프 필름이 담겨 있었다. 한 사내의 성기가 잘려나가는 짤막한 스너프 필름 속, 터져 나오는 비명을 주인공은 그의 소리라 생각할까, 혹은 그녀의 소리라 생각할까.

 

 

 

저승사자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누군지 아세요? 옛날에는 명부를 조작하고 도망친 동방삭이었는데 지금은 우리 같은 부류래요. 흐흐. 그럴 만도 하죠. 저승명부에는 남자로 되어 있는데, 잡으러 가면 여자뿐이니 오죽 황당하지 않겠어요?...(중략)...죽으면 염라대왕한테 피해보상청구를 몇 배로 할 거라고 했어요. 명부에 여자로 올릴 걸 남자로 잘못 기재해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버린 그 정신적 살인에 대한 피해보상을. -내 이름 말이야.65p

 

 

 이 세상에서 그 누가 그녀에게 피해보상을 해줄 수 있을까. 저승엔 염라대왕이 있다 치더라도, 염라대왕도 없는 이 세상에서, 수군거리기도 바쁜 우리 가운데 그 누가 그녀에게 피해보상을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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