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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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도서관의 자료실에서 국내 퀴어문학 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찾아보니 몇 권 없었다. 소소한 풍경은 그 적은 책들 중 한 권이었다. 사실 국외문학에 비해 국내문학은 작품 내 퀴어서사의 분량이나 비중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추천하기엔 비교적 어려운 바가 없잖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리뷰의 의의로써 '비판적인 퀴어시점'을 토대로 국내 퀴어문학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소소한 풍경>에서는 보편적인 한국문단 속 기성작가의 손에 쓰여진 '다자연애'를 볼 수 있었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 11p

 

 소설의 첫부분(프롤로그)은 소설가인 '나'의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갑작스레 걸려온 'ㄱ'의 전화를 받고서,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라는 말에 강하게 이끌려 그녀가 살고 있는 소소(昭昭)로 향한다. ㄱ는 집주인에게 억울하게 내쫓겼던 세입자 'ㄴ'과 조선족 처녀로 위장하여 살고 있던 'ㄷ'과 함께 살다 ㄴ이 죽고난 뒤, ㄷ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상태였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는 ㄴ의 것이었고, 여기서 '나'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상상해나가며 '플롯 없는 소설 쓰기'에 도전한다.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 - 103p

 

 ㄱ는 처음에 ㄴ과 먼저 만나 함께 살았다. 신원도 불분명하고, 서로에 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남자를 집에 들이고, 함께 덩어리 진다는 -ㄱ는 어떤 형태의 성교를 덩어리 진다고 표현했다- 이야기가 퍽 기묘한 서사이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우리가 찾는 '퀴어'가 없었다. ㄱ와 ㄴ의 잠자리 도중 ㄷ이 다가와 하는 위의 대사가 소소한 풍경 속 '퀴어 서사'의 시발점이었다.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 그 짧은 말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해왔던 세 사람 간의 어떠한 관계가 뭉클뭉클 형성되는, 태초의 빅뱅 같은 한 마디로 묘사되고 있었다.

 

 적어도 우린 독점적 욕망으로 우리를 훼손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여겨요. - 209p

 우리에겐 그 무엇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덩어리져 있기 때문이다. - 263p

 

 '다자연애'라는 방식은 신기하다. 어쩌면 생각보다 보편적일 수 있을 수도 있지만, 필자에게는 마냥 생소하게 다가왔다.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세 명이서 그 마음이 맞을까, 라는 의문점이 떨어지지 않아서이다. 그들은 서로를 소유하려들지 않고, 삼각형이 아닌 원이 되어 유지되어가는, 어떤 면에서는 불안한 관계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방금 물으셨잖아요. 우리 셋, 무엇으로 맺어졌는가 하고요." "담배 같았단 말이니, 서로에게?" - 295p

 

 생소했던 '다자연애'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읽으면서도 아쉬웠던 점은 있었다. 우선 ㄱ은 오빠와 부모를 어렸을 때 잃고 결혼에 실패한 여자였고, ㄴ은 1980년의 광주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어머니를 요양소에 둔 채 평생을 떠돌다 자신이 팠던 우물에서 눈을 감았으며, ㄷ은 탈북자 여성으로 국경을 넘다 아버지를 잃고 증오하는 남자와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 돈을 부쳐야 하는 상황에서 소소로 향한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셋이 온전한 '사랑' 보다는 서로의 어두운 내면, 혹은 그 삶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죽음'에 끌려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따라서 소설을 끝마칠 즈음이면 그들의 사랑과 덩어리지는 행위는 하나의 기행처럼 여겨질 뿐 무언가 강하게 어필되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굳이 코멘트를 달지 않아도 될 만큼 높게 여겨지지만, 퀴어는 글쎄,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혹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셋의 모습, 서로간에 아무것도 문제시 되지 않는 관계와 동성애를 물흐르듯 묘사한 점은 인상깊었어도 유독 끝에 가서는 그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한없이 정의되어가고, 틀 안에 갇혀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자연스러움은 전체적인 기이함에 묻혀버린 위화감 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들이 보았던 소소한 풍경은 어떤 풍경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셋은 서로 같은 풍경을 보았을까? ㄴ이 죽던 그 순간의 덩어리진 적막을 떠올리며 리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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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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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린 꽃잎에 번성하는 목화진딧물의 냄새, 갓 말린 바다 냄새, 처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 혀끝이 열리고 온몸이 아리아리해지는 냄새, 태초의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 -무궁화.123p

 

 

정이현 작가의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수록된 다섯 번째 단편 소설, 무궁화의 첫 시작은 ‘나’가 묘사하는 그녀의 냄새로 가득 차있다. 어딘지 아늑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묘사 속 ‘나’의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아이가 있는 유부녀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한다. 남들의 눈에 위험한 불륜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에게 있어 이 이상의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을 가졌다. 귀를 드러내는 짧은 헤어스타일과 말간 피부는 해사한 소년 같아 뵈기도 했고,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진분홍색 잇몸은 과년한 처녀의 그것 같기도 했다. 앞 머리칼은 톡 튀어나온 이마를 절반쯤 가리고 있었고 희고 마른 얼굴과 작은 몸피가 아이보리빛 터틀넥 스웨터 속에 마치 강보에 싸인 아가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무궁화.127p

 

 

소설 속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을 고르라면 많은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이 부분을 짚지 않을까. 해사한, 이 짧은 단어 속에 ‘나’의 온갖 감정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첫 인상은 은은하면서도 강렬했다. 머릿속에 아른아른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이 수채화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여성 동성애자 사이트의 정기 모임에서 만난 유부녀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 ‘나’. 행복과 위기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나날들. 그리고 어느날 갑작스레 사라진 그녀. 결국 그녀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 문을 열지는 못한다.

 

 

그녀의 집은 정말 비어 있는 것일까. 저절로 다리 힘이 풀린다. 남편. 그녀의 남편이 너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으며, 그 애인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추궁하고 분노하는 것 말고는. 짐승처럼 소리 지르고 가재도구를 부숴버리는 것 말고는. -무궁화.143p

 

 

결국 ‘나’는 그녀를 찾지 못한다. 종종 함께이던 집에 영 혼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남은 것은 공허감 뿐이다. 메마르다, 라는 말 밖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이 글이 대한민국 아래 숨 죽인 채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의 차가운 시선이 두려워, 이 낯선 사회에서 어떻게든 숨어 보려는 누군가의 몸부림이 아닐까.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결혼을 한 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야. 그 한 마디에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보게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더욱 사랑할지언정 절대로 탓하지 않는다. 사실 누가 그녀를 탓할 수 있을까.

 

공중변소 옆에는 왜, 벌레 먹은 분홍 꽃들이 피어 있을까.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다 말고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라꽃이라 그래. 하수구와 공중화장실은 국가에서 관리하니까. 저 꽃에선 어쩐지 지린내가 나는 것 같아. -무궁화.136p

 

 

이 책의 제목 ‘무궁화’의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의 성기 모양, 그리고 동시에 그들 자체가 될 수있다. 소설 속 무궁화는 아주 잠깐, ‘벌레 먹은 분홍 꽃’으로 묘사되어 나온다. 제목을 통해 그 꽃이 무궁화라는 것을 간신히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나’와 그녀가 무궁화를 향해 보내는 시선은 마냥 곱지 않다. 공중변소 옆에 피어있는, 벌레 먹은, 지린내가 나는 것 같은 분홍 꽃. 짧았던 둘의 대화는 내게 어쩐지 비극적으로 보였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고있어, 라고 말하는 듯한 담담하면서도 슬픈 그런 말투였다.

 

 

사실 이 책의 내용 중 대부분은 둘이 함께 있었던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금 몽환적인 분위기 속, 나른한 기분으로 침대 위 나란히 손 잡고 누워 있는 듯한 분위기. 하지만 그 안개같은 행복보다는 비극적인 두 송이 무궁화에 마음이 가는 것은 왜일까.

두 무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남는 것은 시큼한 냄새 뿐이라고. 결국 우리 모두가 한 송이 무궁화일 뿐이라고. 지금 이 순간도 어디에선가, 몇 송이 무궁화들이 몸부림치고 있을지 모른다. 살아가기 위해서. 환영받지 못할 세상 속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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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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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내게 특별해지는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은 바뀌게 된다."

 - 전지적 긱또 시점의 스포일러 가득한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리뷰

 

 

 

낯선 두 사람이 열차 안에서 만난다. 외양으로 풍기는 분위기부터 확연히 다른 이 두 사람의 기묘한 만남이 시작되고부터 그들이 딛고 있던 인생이라는 정돈된, 혹은 정돈된 것처럼 보이던 소박한 옷장은 마구잡이로 뒤섞이기 시작한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속 두 주인공, 브루노와 가이는 열차 안에서의 그 기구한 만남에서 비롯된 인연을 통해 스스로의 심연에 숨어 있던 진실과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신경질적이고 과민한 금발 청년 브루노는 과묵하고 진지한 건축가 가이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그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인지한다. 그는 기차 안의 많은 승객들 중 오직 가이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간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쉬이 듣기 힘들법한 무시무시한 제안을 해 오는데, 그것은 바로 교환살인에 관한 것이었다. 가이에게 있어 현재 골칫거리인 듯 보이는 아내 미리엄을 본인이 살해해줄테니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어느 연결고리도 없을 두 사람이기에 그 누구도 범인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며 자신에게 제안을 해오는 브루노를 보며 가이는 그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혐오감을 느낀다. (브루노의 이 메스껍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안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속 라스콜리니코프가 행했던 도끼 살인, 즉 초인에 대한 도전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브루노는 가이를 본 처음 그 순간부터 열렬히 그를 갈망해버린 자신의 마음을 묶어놓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는 소설 내내 그가 되고자 했던 가이의 ‘형제’가 되기 위해 오로지 공범이 될 그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을 범죄의 영역을 통해 함께하고자 한다.

 

 

 

가이는 마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것처럼 위험한 냄새를 풍겨오는 브루노에게서 멀리 달아나기를 원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브루노는 열차에서 이야기한 계획을 실행하려 제멋대로 살해대상자인 가이의 아내 미리엄이 사는 곳에 찾아가고 그녀의 현관문을 바라보면서도 가이를 생각한다.

 

‘그 집을 바라보자 기분 좋은 전율이 온몸에 서서히 퍼졌다. 가이가 저 계단을 꽤 자주 오르내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만으로도 다른 집과는 달라 보였다. (p.87)’

 

가이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해버린 미리엄의 피살에 대해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며 브루노를 경멸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절대 그를 고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동안 그것은 브루노의 끈질긴 협박에서 비롯되는 두려움과 불안 탓인 것처럼 묘사된다.

 

 

 

한편, 브루노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소설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성은 그의 눈에만큼은 한없이 아름다운 여자로 비춰지는 어머니가 유일하다. 그는 미리엄을 죽이고 나서 그가 만들어낸 상상 속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여성을 죽였다는 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작가의 입을 빌려 털어놓는다.

 

‘사실,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성적인 쾌락을 느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가 여자를 미워한 건 전혀 아니었다. 미움은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는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죽였다면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p.133)’ 브루노가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가이에 대한 유별난 집착과 감정 또한 브루노가 가이를 사랑했음을 의심케 한다. 브루노는 어쩌면 가이의 영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지 않고서 못 배기겠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결국 자기 파괴의 영역에 들어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그들의 만남이 서로의 영혼의 밑바닥까지 들춰보도록 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그들을 새로이 태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 않아도 늘 함께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사랑하면서 그들 자아의 새로운 탄생과 죽음을 경험한다.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거짓과 진실, 욕망으로 얼룩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두 사람의 경험적 탐구에 다름없는 것이다.

 

 

브루노는 끊임없이 가이에게 닿기를 원한다. 연락을 하지 말아줬으면 하고 단호히 이야기하는 가이의 편지를 읽고 그는 ‘무언가에 베인 듯한 느낌이었다. 깊은 슬픔 혹은 죽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라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는 가이의 거절에 대한 상처로 소리 내어 엉엉 울거나 술을 마시고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의 이름을 취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이와 같은 브루노의 행동은 '브로맨스'라고 불리며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차용되곤 하는 단순히 남자들끼리의 애틋한 우정 비슷한 것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피살된 미리엄에 대한 무거워지는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심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기 시작한 가이는 결국 원한 것이었든 원하지 않는 것이었든 간에 브루노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데, 그는 그 일을 하기 전 자신의 집에 와 있는 브루노를 보며 익숙함뿐만 아니라 마치 형제와 같다고 느낀다. 브루노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는 가이에게 있어 끊임없이 애증의 감정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는 브루노가 자신에게 있어 이미 중요한 애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면서도 살인이라는 행위로 묶여버린 브루노를 자신의 반쪽 자아와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계속해서 부정하려 들지만 자신 안에 숨어 있던 욕망과 인간에의 진실을 끌어내어 보여준 브루노를 사건에 대한 수사가 끝날 때까지도 보호하기에 이른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을 짓눌러오는 불안감, 그리고 브루노에 대한 애증의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혼란스러워하던 가이는 맹목적인 모습으로밖에 다가오지 못하는 브루노에게 쏟아질듯 밀려오는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브루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고,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 가지 금기의 영역으로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소설의 말미부분에 이르러 브루노는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 가이와 그의 연인 앤, 그리고 가이의 친구들과 함께 탄 인디아호에서 브루노는 가이를 위해 건배를 하고 가이에게 자꾸만 무언가를 선물하려 하고 가이의 오랜 친구에게 자신이 ‘거의 평생 동안 가이와 아는 사이’임을 도전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가이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닫고 나서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몸을 내던져 자살하고 만다.

 

그는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가이의 이름을 목 놓아 외친다.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바다 안에서도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그의 사랑, 그의 형제, 그의 욕망이었고, 그는 그렇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에 잠긴다. 그가 그토록 온전히 가라앉길 원했던 심연 속으로 말이다.

 

 

 

가이는 그동안 자신의 범행을 주변 사람들과 앤에게 숨기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런 그를 비난하는 양 자신과 앤의 주변을 맴도는 브루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곧 브루노가 배에서 뛰어내렸음을 알아차리고서는 자신을 말리는 친구에게 주먹을 먹이고 그를 구하기 위해 어떤 망설임도 없이 갑판에서 뛰어내린다. 브루노는 마지막까지 ‘가이!’를 울부짖었고, 가이는 브루노를 만난 이래로 그에게 가까이 닿기를 처음으로 간절히 원하지만 브루노는 결국 바다 속에 영영 잠기고 만다. ‘그의 친구, 그의 형제는 어디 있을까?(p.339)’ 가이는 그가 자신의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음을, 자신의 다른 자아와 같은 존재가 죽어버렸음을 알고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모두들 그를 두고 한 사람씩 선실을 빠져나가다 그의 연인인 앤마저 뒤돌아서는 해당 장의 마지막 장면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가이 또한 그를 사랑했음을, 그와 브루노 사이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강렬하고 정서적인 영역이 존재했음을 명확히 하는 부분이다.

 

브루노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가이는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 의미하던 바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곧 자신의 범행 사실, 그리고 브루노와의 이야기를 죽은 아내 미리엄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남자 오언에게로 가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그를 찾아간다. 그의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던 오언의 반응에 거의 분노하다시피 하며 자신과 브루노의 범행을 모두 털어놓았지만 그는 사립탐정 제러드의 함정에 꼼짝없이 걸려들게 된다. 진실을 이미 털어놓은 상황에서 제러드를 상대해야만 하는 사태에 처한 가이는 그의 앞에서 원래 그가 말하려 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고 만다.

 

 

 

“날 잡아 가요.(p.362)”

 

그것은 아마 자신과 자아를 나눈 그, 형제, 자신의 존재를 새로 탄생시키고 죽게도 한 유일한 사람인 바로 그 브루노에게 건네는 마지막 회한어린 애상에서 비롯된 고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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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여기 머문다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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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단편작 「백합의 벼랑길」에는 동성연애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층에 사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272).[1] “머리카락이 긴 여자”와 “머리카락이 짧고 늘 바지를 입는 여자”는 “번갈아가며 짐을 들고 번갈아가며 운전을” 한다 (272-3). 그리고 “번갈아가며 세탁도 하고 요리도” 할 것이라고 서술자는 추측한다 (273). 제목인 「백합의 벼랑길」이 제시하는 이미지와 더불어,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작품이 퀴어 프렌들리하게 읽힐 수 있는 이유가 이 두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전경린의 이 소설을 다른 관점에서 퀴어하게 읽고자 한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이다. 이 글에서 ‘나’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취향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나’는 조곤조곤한 어투의 존칭을 사용하며 상대방을 ‘당신’이라고 칭한다. 햇빛 알레르기를 앓고 있고 하청을 받아 원고를 윤색하는 일을 한다. 계단참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나’의 특정된 젠더는 무엇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는 내내 필자는 ‘나’의 젠더를 남성이라 인식했었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 수록 되어 있는 서평에서는 너무 당연하게도 ‘나’를 여성 인물로 칭하고 있었다. 소위 ‘여성적 글쓰기’라고[2] 정의되는 특징적 문체 때문에 작중인물에 자연스럽게  ‘디폴트 값’을 적용한 셈이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콘텐츠와 문학에 이와 같은 ‘디폴트 값’을 적용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사실 「백합의 벼랑길」은 서술자를 남성으로 인식하고 읽을 때에 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웃 사람들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내 이야기라도 쑥덕거렸는지 소리없이 앙글거리던 눈들을 화들짝 피”하고 (271), “이웃 주민들의 눈빛에서 새어나오던 질책” (275)에 익숙해 져야 하며, “봄이 일 년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 해도 꽃놀이 한번 못” 가는 (283) 것은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이다. “아내와 나 사이에서” (281) 갈팡질팡하는 ‘당신’의 모습은, 최근 이성과 결혼을 한 동성애자들을 향해 쏟아졌던 ‘탈반’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나’가 결국 ‘당신’에게 이별을 고한 뒤, 햇빛 알레르기를 극복하고 햇빛 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전환치료를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과 맞물려 비판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나’에게 여성과 이성애라는 ‘디폴트 값’을 씌워버리는 순간,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영원히 소거된다. 작품 속의 동성연애자들은 “나를 가만히 놔둬요, 나도 당신들을 그대로 놔둘게요.” 라고 말하며(272), “외국인”이자 “서로 심판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무관심해진 타인들”로 남게 되는 것이다(281). 물론, 기존의 사회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퀴어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소수자 인권을 위해서는 다수와 연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남대문 상가에서 만나나 여자가, ‘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순간적으로 나를 밀어내고 돌아서는 작은 도마뱀 같은 초록빛 시선”을 건네야 했던 이유는, ‘나’가 무의식적으로 적용하는 또는 관습에 의해 ‘나’에게 적용되는 ‘디폴트 값’ 때문은 아니었을까(281). 이들이 결국 연대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에 남아있어야 했던 이유는 ‘디폴트 값’의 폭력은 아닐까. 필자는 독자들에게 전경린의 이 소설뿐 아니라 많은 문학작품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퀴어하게’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처럼 ‘퀴어한’ 읽기를 통해 우리가 지금껏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규범들이 사실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인지, 그러한 ‘디폴트 값’이 얼마나 많은 집단 간의 연대를 막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전경린, 「백합의 벼랑길」, 『천사는 여기 머문다』, 문학동네, 2014. 이하는 페이지 수만 표기.

[2] 여성적 글쓰기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성성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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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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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을 시켜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나는 느릿느릿 고춧가루와 간장과 식초를 부어 탕수육 장을 만들었다. 아무리 느리게 해도 탕수육 장은 이내 만들어졌다.

 

 탕수육 장에 들어가는 양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고춧가루와 간장과 식초. 서로 어울리는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양념은 탕수육 장이라는 이름 아래, 결국은 섞여서 탕수육을 찍어 먹기 좋은 장의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아무리 느리게 해도 탕수육 장이 이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작품 속 세 명의 여성―주인공 호은과 그녀의 엄마 윤진(혹은 미스엔), 그리고 윤진이 낳지도 않고 호은과 피가 섞이지도 않은 '딸' 승지는 서로 거부하고 밀어내고 '눈곱만 한 정도 들일 생각이 없는 듯이(p.49)' 외면해도 결국 '엄마의 집' 안에서 하나의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이 집에 왔었거나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름에 알파벳 N이 들어간다. 이름에 N이 세 개 들어가 호은이 '미스엔'이라고 부르는 (노)윤진부터 호은(Ho Eun), 승지(Seung ji), 윤진의 애인인 민경(Min kyuong), 호은과 승지의 아빠이자 윤진의 전 남편인 헌영(Heon young)까지. 이곳은 알파벳 N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알파벳 N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K, 오로지 호은만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호은과 연인 관계였다. K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작품의 초반부로, '아직도 유효한 상처(p.37)' '이젠 보고 싶지 않았다(p.38)' 등의 서술을 통해 묘사된다. 그러나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p.79)'라는 거듭된 서술에도 불구하고, 호은은 계속 K를 떠올린다.

 

텔레비전의 웅얼거림을 들으며 납작 누워서 처마 아래 군자란을 보니 시시각각 바뀌는 다양한 장면 속에서 K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하게 표정을 지으며 떠올랐다. 이젠 보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려보았다.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K가 더 생생하게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그 시절에 대한 혐오와 그리움이 똑같은 밀도로 육박해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좋은가 싫은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K는 해결이 필요한 내 감정의 과제였다.

 

 이후 K와 호은의 고등학교 시절 연애 과정이 10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히 설명된다. 하지만 그 긴 서술 동안 둘의 성별이 동성이라는 사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마치 성별이 중요한 사항이 전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런 태도는 엄마의 집을 구축하고 있는 다른 두 여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너 비혼족이니?"
"그게 뭐야?"

"결혼 않고 사는 사람."

"하든 말든 상관 없어."

"너 게이니?"

"상관없다니까, 그런 건."

꼬마가 아주 맹랑하게도 심하게 쿨한 척했다.  

 

"엄만 내가 양성애자라면 어때?"

"어떻긴? 그런가 보다 하지."

엄마는 의외로 쿨했다.

"엄만 왜 그렇게 관대한 거야? 내 친구 엄마들은 끓는 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펄펄 뛸 텐데. 잘못 발설했다간 집에 갇히거나, 쫓겨나. 그래서 다들 상자처럼 입을 꾹 닫고 최후까지 가족에겐 비밀로 하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구. 그게 인생인걸. 범죄가 아닌 이상, 누구도 그걸 억압해서는 안 돼."

 

 뒤이어 윤진은 호은에게 "그리고,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꼭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 덜 위험한 것도 아니야(p.148)"라든가 "하지만 네가 정말로 양성애자라면, 사회적 소수로서 피할 수 없는 불이익과 차별과 편견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야 해(p.148)"라는 말을 남긴다. 작가 자신이 성소수자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가 엿보이는 문장이다. 앞서 던진 호은의 질문이 가벼운 커밍아웃이었다면 윤진이 보인 반응은 나쁘지 않다. 앞서 윤진은 전 남편인 헌영과 그의 친구 경자의 관계를 의심했었다는 말을 꺼낸다.

 

"신혼에 말이야. 경자 아저씨와 니 아빠가 어찌나 붙어 지내던지, 난 두 사람이 애인이 아닐까, 의심했었어."

"동성애?"

"그런 거."

"아니었어?"

"하긴 동지애와 동성애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어. 동성애와 꽤 비슷한 거였을지도 몰라."

 

 이 구절을 보면 윤진이 동성애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며 어느 정도의 오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엄마의 집』의 주 소재는 동성애가 아니다. 21세기형 새로운 가족이 생성되어 봉합되는 과정 사이에 작가인 전경린은 운동권 세대의 몰락과 주체적인 여성 등의 소재를 끼워넣었고 젠더퀴어도 그 중 한 가지다. 이 작품도 앞서 언급했듯이 '탕수육 장'인 것이다. 탕수육 장은 하나의 양념으로서 맛을 가지지만 온전히 액체로 녹아들어 섞이지 못한다. 작품 내의 모든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젠더퀴어란 소재는 간장 위를 동동 떠다니는 고춧가루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호은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K를 만나 오해를 푼 뒤 온전히 끝을 내고 윤진과 헌영의 이혼을 떠올리며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 K와 호은은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고, 그때 호은은 이런 생각을 한다.

 

모두 떠나버린 괴괴한 기숙사 방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몸을 무는 벌레처럼 질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K는 왜 내게 다가왔을까? K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냉담할까? 무엇을 피하는 것일까? 무엇을 부정하는 것일까? 대체 진심이 뭘까? 우린 무엇을 한 것일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두 사람은 2년 4개월 만에 호은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재회한다. 호은은 K가 '근본적으로, 그러니까 생리 화학적으로 달라진 것 같(p.171)'다고 생각하지만 K는 호은에게 "선밴 여전하네(p.171)"라는 말을 던진다. 하지만 호은 역시 그때와는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반문하던 2년 4개월 전과 달리, 그녀는 '진실은 실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데,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그 많은 진실들을 다 놓쳐버리고, 우린 무지와 오해 속을 살아간다(p.176)'라는 독백을 남긴다. 또한 그때의 서로를 '그때 우린 불우했다. 그리고 어렸다(p.177)'고 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호은은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보는 데에 성공하며, 이것을 스스로의 문제의식으로 끌어간다.

 

K와의 관계에서 내가 후회하는 것은 우리 관계가 시련에 처했을 때, 친구들의 여러 가지 말과 비난과 그들의 측도에 휩쓸려 내 진심의 갈피를 잃었다는 것이다. 나와 K의 가치를 저버렸을 때 우리 사랑의 생명은 물거품처럼 꺼져버렸다. 그러니, 오래 나를 괴롭혔던 실연의 아픔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사랑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뒷걸음질칠 것만 같다. 사랑은 나를 격정적으로 만들고, 균형 잡힌 관계들을 훼손시키고, 내 일상의 페이스를 무너뜨린다. 내 사랑에 대해 내가 보는 눈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반드시 끝이 난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이런 호은의 사랑에 대한 고뇌는 작품 중후반부 내내 이어진다. 이것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은 윤진이다.

 

“그럼 사랑이란?"

엄마는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호은아. 사랑이든 삶이든, 난 그게 내 몫의 강물을 헤엄쳐 건너는 일 같아. 그 물은 내 존재로부터 솟아나와 큰 강을 이루어. 누구에게나 혼자 건너야 하는 강이 있는 거야. 언젠가 아저씨와 내가 헤엄쳐 건너야 할 물을 다 건너고 햇살 따스한 기슭에 닿아 옷을 말리면 좋겠다. 그게 결혼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아. 넌 사랑의 결실이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흔히 말하듯 아이, 하나의 가정 같은 거 아닐까…

"사랑의 결실은 변태야. 변화를 겪고 달라지는 것."

 

 윤진의 말에 따르면 호은 역시 K와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셈이다. 그녀는 승지와의 만남과 K와의 재회 등을 계기로 변화하여, 사랑의 공포에서 벗어나 '나만의 강물(p.280)'을 꿈꾼다. 헌영이 승지에게 "호은이를 언니라고 불러(p.43)"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다고 해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란 말은 할 수 없(p.44)'다고 말하던 호은은 작품 후반부에 "나를 언니라고 불러(p.244)"라는 말을 남긴다. 젠더퀴어는 단순히 호은이라는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호은을 정립시키는 데 필요한 것, 즉 정체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작품 내내 끝없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끝끝내 그 결실을 맺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의 집』은 이전의 전경린 작품은 물론이고 순문학 계에서도 다른 맥락에 서 있는 작품인 셈이다.

 

 

 

 

1) 전경린, 『엄마의 집』, 열림원, 2007, p.21.

2) 위의 책, p.79.

3) 위의 책, p.41-42.

4) 위의 책, p.147.

5) 위의 책, p.70-71.

6) 위의 책, p.89.

7) 위의 책, p.182.

8) 위의 책,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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