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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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파도와 같다. 언뜻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벽에 조금의 균열이 생기고 결국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의 자아와 관계 또한 별다를 것 없어 보이던 하나의 가는 금으로 인해 폭삭 주저앉을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최정화 작가의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바로 그 일상 속 미세한 균열을 포착하여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출렁임을 이다지도 섬세하게 잡아낸 작품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속 주인공 ‘나’는 기민한 사람으로, 주인공과 정반대되는 성향의 독자라면 그 예민함에 '이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병적인 예민함이 야기하는 아름다움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거나 혹은 한번쯤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나’의 입을 빌려 말해지는데 이를 통해 읽는 이들은 주인공의 의식 흐름에 자연스레 동참하고 동화된다. 이것은 ‘지극히 내성적인’이야기인 동시에 ‘지극히 섬뜩한’이야기이며 그 섬뜩함의 이유는 전부 독자의 온전한 공감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와 떨어진 시골에서 말동무라고는 ‘경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여자친구뿐이던 주인공의 집에 어느 날 한 여성 소설가가 와 함께 지내게 된다.  거의 혼자 생활하는 시골에서의 삶, 그리고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유일한 친구 경선과의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주인공은 누군가와의 친밀하고도 보다 가까운 관계를 필요로 하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던 와중 주인공의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할 사람이 나타나고 그녀는 그 선생님의 존재를 기꺼이 ‘특별함’이라는 범주의 관계에 넣기를 소망한다. 주인공이 선생님, 이라고 부르는 오난영이라는 소설가와 주인공 간의 관계 변화와 그에 따른 주인공의 심리 변화가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말수가 적고 늘 정돈된 생활을 추구하며 좀처럼 가까워지기가 힘들었던 선생님이 주인공에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이자 주인공 '나'는 매우 기뻐한다. 선생님과의 산책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서 ‘어쩌면 처음 선생님을 봤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 마음 속 독백을 하기도 하며, 선생님을 이미 특별한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자신의 서술을 통해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어 선생님과 주인공의 관계는 선생님의 소설을 주인공이 읽고 감상평을 말해주기 시작하면서 더 깊어지고 동시에 아리송해진다. 주인공은 자신의 말에 선생님이 보이는 크나큰 반응의 변화에 묘하게 좋아지는 기분을 느끼는데, 한 사람의 반응이 어떤 한 사람을 심하게 일렁이도록 만든다는 것은 곧 특별취급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주인공은 바로 그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해지는 관계의 쾌감을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얻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느낌, 그 느낌은 주인공에게 있어 원고를 쥐고 있는 순간만큼은 ‘관계의 주도권’을 쥐도록 해주었지만 결국 타인의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이윽고 선생님과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봤을때 어쩌면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크게 마음이 상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마음이 상했었으나 시간이 지나서 아무렇지 않은 기분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더 이상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본인과 자신의 글 자체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보다 적확한 이유는 선생님 본인이 아니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가슴을 졸이고 관계에 대해 고심하고 안타까워하고 손톱 끝을 물어뜯을 뿐이다. 왜냐면 이것은 ‘지극히 내성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하는 것의 과정을 주인공과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독자는 모두 엿볼 수 있다. 호기심, 그리고 마음을 열게 되는 사건, 과정, 서로의 반응과 관계에서의 권력을 탐색 후 조그마한 균열로 인해 생겨난 오해와 멀어짐까지.

 

모든 관계는 사실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이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선생님의 모든 것을 자신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 표면의 소통이 닫혔을지라도 자신의 가슴 속에 뭉쳐있는 실타래들을 벌건 눈으로 하나하나 풀어내며 본인의 마음과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관계가 어색하게 끝이 나고야 말면 이런 헤엄을 반복한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경우 자신 또한 특별한 그 누군가에게 더없이 특별한 사람이고픈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듯 자신이 만들어낸 관계의 허상은 애석하게도 거짓일 가능성이 있는 법이다. 주인공에게 선생님은 이미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선생님에게 있어 주인공은 자신의 책을 헌정한 찬란한 여름의 추억을 만들어준 ‘그 여성’이 아니었을 수 있다. 이런 오해와 거짓은 항상 수많은 관계를 무너뜨리거나 생채기를 내곤 하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혹 누군가와 사랑하고 싶다면 당연하게 알아야 하고 겪어야 할 진실인지도 모른다.

 

 

 

금이 가고 깨어져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유리 조각의 반짝이는 단면을 섬세하게 포착한 관계의 시. 나는 이 이야기를 충분히 있을법한 레즈비언 서사로 읽었다. 이토록 자의식 과잉의 예민한 인물들과 여리디 여린 독백가운데 숨겨진 소름끼치는 섬뜩함이라면, 나는 언제까지고 최정화 작가의 다음 소설집을 기다릴 용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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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멋진 꿈에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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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주의자인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지적한 바 있듯이 구조로서의 언어는 촘촘하지 않다.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언제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실존하는 것 위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어떤 방식으로도 대변되지 않는 부분을 잔여물처럼 남긴다. 언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기억할 때, 이와 같은 불완전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형성과정에서부터 이미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언어구조 속에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언제나 충분히 또는 정확히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일까? 조해진의 작품 속 ‘나’는 계속되는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완전히 명징화되지 못한 대상으로 남아 부유한다.

 

“매기야, 난 누구니?”

야옹, 매기는 오랜만에 스스로 고양이임을 인정하는 울음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그러니까 난 누구냐고. 야옹, 녀석도 언어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좀더 큰 소리로 야옹, 한다.[1]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나’와 고양이 매기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이들은 서로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두 언어간의 소통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고양이의 언어는 ‘나’의 모습을 정의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해진은 이것이 비단 인간과 다른 종(種) 사이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같은 문화권 안에 살아가며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 하더라도,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뿐만 아니라 모노-섹슈얼리티 중심, 유성애 중심으로 이루어진 언어 구조는 그로부터 빗겨난 개체의 정체성을 충분히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언어 구조 속에 완전히 포함되지 못하는 존재란 ‘나쁜’ 혹은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튀지 않기 위해 페이스를 조절”하고 “야유를 받지 않기 위해 정상적인 포즈를 취해주”는 ‘나’처럼(207),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성의 범주에 편입되고자 한다. 그것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사회적 시선과 힐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상성의 범주 안에 꾸역꾸역 맞추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아는 소거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정해진 정형성”을 따라가는 한 “전체 인테리어에 디자이너의 고유한 숨결을 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병원 인테리어(99)나, “옷에 모델을 맞”추기 위해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감행해야 하는 준(76)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기존의 범주에 맞추려 하다 보면, 고유한 존재는 사라지고 사회로부터 강요 받은 이미지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가 유경(여성)과의 과거와 준(남성)과의 관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강요는 개체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일 수밖에 없다. 조해진은 양성애자인 ‘나’의 정체성을 내세워 이와 같은 명징화의 폭력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자아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껏 경험해 온 역사의 축적이다.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그 축적된 역사 속에서 고유한 개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패턴화할 수도 없는 것이고 특정한 언어로 단순화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가령, ‘나’는 유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으로 ‘일탈’한 것이 아니다. 유경과 준을 각각의 방식으로 사랑한 것이다. 그 모든 역사를 껴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불완전한 언어 구조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을 때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는 언어의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퀴어들의 아침」이라는 조해진의 첫 번째 소제목이 상기시켜주듯이, 퀴어(queer)란 그와 같은 선택을 거부하고 ‘이상하게’ 혹은 ‘모호하게’ 남기로 선택한 집단이 아니었는가? 물론, ‘나’가 결국 “진짜 악몽이 시작되는 곳”인 도심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221), 우리는 언어의 구조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불완전한 언어로 인한 소통과 대변의 불가능은 패배나 좌절의 신호가 아니다. 애당초 소통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던 언어와 구조에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안에서 내부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퀴어들이 가진 힘인 것이다. 하여 퀴어는 새로운 언어로 말한다. 기존의 언어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1] 조해진, 『한없이 멋진 꿈에』, 문학동네, 2009, 53p. 이후는 페이지 수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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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걸작선
브램 스토커 외 지음, 정진영 편역 / 책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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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 뱀파이어는 인간의 금지된 욕망, 그 중에서도 성적 페티쉬가 형상화된 크리쳐다. 뱀파이어가 무는 부위는 목이나 가슴 등 성감대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희생자는 피를 빨릴 때 성적 쾌감에 가까운 쾌락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항상 낯선 남자로, 희생자는 아리땁고 가녀린 여성으로 상정되어 있던 것도 이런 맥락과 닿아 있다. 특히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그 시절, 뱀파이어와 희생자의 관계는 이성 간의 성관계를 연상시켰다. 시대의 한계였다.

 그러나 여기 지금, 레즈비언 뱀파이어 캐릭터인 카르밀라가 있다. 카르밀라는 문학작품 최초의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이후 여성 뱀파이어 캐릭터의 원형으로 자리잡았다. 뱀파이어로 등장하니만큼 그녀의 행동은 기존 뱀파이어들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뱀파이어-희생자 관계는 「카르밀라」만의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외로이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숫기가 없는 편이었지만, 당시에는 분위기에 취해 말도 잘하고 대담해져 있었다(p.40)'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인 로라는 카르밀라를 처음 보았을 때 첫눈에 반한 사람 특유의 대담한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카르밀라는 그보다 더 대담하고 노련하게 로라를 대한다.

 

"(…) 좌우간 우린 어렸을 때부터 운명적으로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나 봐. 나는 너한테 이상하게 끌리는 느낌인데, 너도 그런지 모르겠어. 지금까지 내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는데 지금 생긴 건 아닐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맑고 까만 눈동자가 나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녀에 대한 내 감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끌리는 느낌"이었지만, 동시에 왠지 반감 같은 것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분명한 감정 속에서도 가장 또렷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었다. 그녀는 내게 관심을 보이며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너무도 아름답고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가.

 

 호감과 동시에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당연하다. 로라는 지금 그 당시에는 금지되어 있던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다음 페이지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젊은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심지어 사랑한다(p.43)'라는 문장으로 정당화한다. 이러한 로라의 반감은 작품 초반부에 계속되는데 딱히 특이한 부분은 아니다. 카르밀라의 격렬한 스킨쉽에 대한 감정의 흐름을 로라는 친절하게 '그런 기분이 지속되는 동안은 그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지만, 애정이 점점 커져 숭배가 되고 혐오가 되는 것이 느껴졌다(p.46)'고 설명한다. 그 당시 사회에서 지탄받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의외로 이런 지점은 카르밀라가 뱀파이어라는 부분을 통해 쉽게 넘어가버린다. 카르밀라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로라가 이런 감정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언뜻 보면 레즈비언 혐오처럼 느껴질 수 있는 지점이나,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고찰을 뱀파이어라는 장치를 통해 서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밀라의 구애는 격렬하다. "사랑인 동시에 잔인한 환희(p.46)"라든가 "너는 내 거야. 내 것이어야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p.47)"라는 문장에 로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나는 종종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 같잖아. 그러지 마, 싫어. 나는 널 몰라. 네가 그런 표정으로 이상한 말을 할 때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이러한 카르밀라의 모습은 로라의 시점에서 '남성적인 면모(p.48)'로 표현되지만 작중 카르밀라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기품 있고 세심하여 여성적이다. 그 당시 여성만의 질병처럼 여겨졌던 히스테릭한 면모까지, 카르밀라는 완벽하게 여성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로라가 카르밀라에게 느끼는 반감은 그 당시 레즈비언들이 겪었던 사회적 시선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자신의 여성을 노리는 낯선 남성이 형상화된 것이 일반적인 뱀파이어라면, 카르밀라 역시 레즈비언이 공포의 대상이었던 뱀파이어로 형상화된 것이다. 작중 내내 로라의 마을 슐로스에서는 많은 이들이 죽어나간다. '삼림 감시원의 딸(p.49)', '돼지 치는 아저씨의 젊은 아내(p.50)', '젊은 농부의 누이(p.54)' 등 희생자는 모두 여성이다. 누군가의 딸이나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누이로 호명되는, 남성에게 종속된 채로 호명되어지는 이들이다. 결말 부분에서 카르밀라의 처단자들이 모두 나이 든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다.

 

 한편 로라에게 사랑을 말하는 카르밀라의 언어는 언제나 직설적이다. 이것은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특수한 크리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허용되는 언어다.

 

"카르밀라, 넌 너무 낭만적이야. 네가 하는 얘기는 하나같이 대단한 연애 소설 같아."

카르밀라는 말없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카르밀라, 넌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해. 뭔가 애절한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난 누구와도 사랑에 빠진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걸. 하지만 상대가 너라면 모르지."

달빛 아래 속삭이던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카르밀라는 흐느낌에 가까운 거센 탄식과 함께 수줍어하는 묘한 얼굴을 다급히 내 목에 파묻고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잡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뺨이 홧홧하게 내게 전해졌다. "자기야, 자기야." 그녀가 웅얼거렸다. "나는 네 안에서 살고 있어. 나를 위해서라면 넌 목숨까지 바치겠지. 나도 그만큼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뜨거운 열기와 온갖 의미가 가득한 눈길로 카르밀라는 나를 읭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차가웠다.  

 

 또한 카르밀라의 사랑론 역시 로라에게는 너무 버겁다. "내가 냉정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사랑은 언제나 이기적이지. 사랑이 깊을수록 더 이기적이야. 네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워. 저는 죽을 때까지 나를 사랑하며 함께할 거야. 아니면 저승에서까지 나를 증오하며 함께하든가. 난 타고난 성격이 냉담한 편이지만 무심한 건 아니라고(p.63-64)"라는 문장이나 "응, 아주 잔인하고 기이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어. 사랑은 희생을 원하는 법이니까.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희생 말이야(p.64)"라는 문장을 볼 때 카르밀라가 원하는 희생이 무엇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뱀파이어로서의 희생이라고 하면 역시 카르밀라에게 온전히 피를 빨려 사망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카르밀라가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원하는 희생은 그게 아니다. 카르밀라는 로라가 자신의 동반자가 되길 원한다. 이곳을 떠나 단 둘이서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라와 카르밀라가 영유하던 둘만의 생활은 슈피엘스도르프 장군의 등장으로 종말을 맞는다. 조카딸을 밀라르카, 혹은 카르밀라, 아니 미르칼라 카른슈타인 백작부인에게 잃은 장군은 카르밀라를 '악마(p.27)', '살인마(p.87)', '괴물(p.104)', '그년(p.114)'으로 호칭한다. 레즈비언인 카르밀라는 기존 사회의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탈락한다. 카르밀라가 작품 내내 고수하는 고귀하고 품위 있는 태도와 정반대되는 모습이다. 또 이것은 작품 말미에서 주인공이자 희생자였던 로라가 카르밀라를 죽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던 것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로라는 카르밀라를 자신의 기억 속 형태로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   

 

(…) 뱀파이어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 사랑의 열정과 비슷한 격정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인내와 책략을 구사함으로써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든 뒤 접근하지요. 자신의 열정에 싫증이 나고 유혹한 상대방의 생명력이 고갈될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하지만 그럴 때는 식도락가의 섬세함으로 살인의 쾌락을 아끼고 절제합니다. 그래서 능란한 구애의 기교로 서서히 상대에게 다가감으로써 쾌락의 강도를 높여가지요. 이때는 상대에게서 연민과 동의 같은 것을 구하려고 안달하는 것 같아요. 보통은 상대방에게 거침없이 다가가서 힘으로 제압한 뒤 질식시키고 생명을 모조리 빨아들임으로써 축제를 끝냅니다.

 

 어쨌거나 로라는 카르밀라에게 특별한 존재였음은 확실하다. 로라가 '내 증상은 삼 주째 계속되고 있었으나, 인근의 사망자들은 고작 사흘을 앓고 죽었으니 말이다(p.72)'라고 서술한 것을 볼 때나 슈피엘스도로프 장군의 조카딸도 오래 가지 못하고 죽었던 것을 볼 때 이 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로라도 마찬가지이다. 희생자 포지션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라는 작품의 끝을 맺으며 이런 말을 남긴다.

 

(…) 지금 이 순간까지 카르밀라는 종종 모호한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때로는 장난기 많고 나른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때로는 폐허가 된 예배당에서 몸부림치던 악마가 되어 나타나지요. 그렇게 꿈결처럼 상념에 잠겨 있노라면 종종 응접실 문가에서 카르밀라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앞서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심한 동요를 일으킵니다. 귀하의 거듭된 청이 있었기에 몇 달 동안 신경 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이 글을 쓴 것이며, 그래서 용케 파멸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오랫동안 낮과 밤을 끔찍하게 만들고 독신의 삶을 소름끼치게 만든 극도의 공포를 다시 떠올린 것입니다(p.118)"라고 로라가 서술했던 문장과 서로 부딪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독신'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볼 때, 어느 쪽이 로라의 진심에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로라에게 있어서 카르밀라는 처음으로 만난 친구이자 황홀경을 맛보여 주었던 사람이었고 첫 구애자였다. 또한 그녀는 카르밀라의 최후를 전달받았을 뿐, 직접 목격하진 못했다. 어떤 의미로 레즈비언 흡혈귀였던 카르밀라는 로라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이 아니었을까. 당시 금기시되었던 동성애를 행했기 때문에 기득권을 쥐고 있던 나이 든 남성들에 의해 처단당했던 여성들의 모습이 카르밀라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1) 조셉 셰리드 레퍼뉴, 「카르밀라」,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9, p.40-41.

2) 위의 책, p.47.

3) 위의 책, p.60.

4) 위의 책, p.119-120.

5) 위의 책,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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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5
토마스 만 지음, 강두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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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태어나 정상성을 동경해본 기억이 있다면 토니오 크뢰거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한스를 사랑한다. 한스는 어깨가 넓고 하체가 날씬했다. 머리는 찰랑거리는 금발이다. 얼굴은 갈색으로 그을렸고 남국적인 예리한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눈초리는 쏘는 듯이 부리부리했지만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이 눈을 덮고 있어 어둡고도 섬세해 보였다. 한스는 마치 몽상하듯 수줍게 세상을 바라보았다.

 한스는 우등생이었고, 발랄하며 씩씩했다. 한스는 승마를 하고 수영도 하며 체조도 잘했다. 선생들은 모두 한스를 좋아했고 치켜세웠다. 친구들은 한스의 호감을 사려고 안달이었고 거리를 지나갈 때면 많은 사람들이 한스를 붙잡고 안부를 물으며 금발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토니오는 게으른 학생이었고 선생들은 그를 안좋게 생각했다. 성적은 초라해서 아버지는 토니오에게 화를 내곤 했다. 토니오는 바다에서 요트를 타고 수영을 하기 보단 모래 위에 누워 변화하는 바다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쪽이었다. 토니오는 마땅치 않은 짓이라고 생각했고, 방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시를 쓰는 일에서 손을 뗄 수 없었던 소년이었다.

 검은 양말을 신은 날씬한 다리로 탄력있고 절도 있게 걸어오는 한스를 토니오는 길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기다렸다. 토니오는 한스를 여러 면에서 자신과는 정반대의, 대립되는 존재로 생각했다. 토니오는 한스를 동경했다. 하지만 한스처럼 되고자 하지는 않았고, 한스가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주기를 뼈저리게 바랬다.

 토니오는 실러의 책 <돈 카를로스>를 한스에게 권한다. 한스는 그것보다는 고속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있는 말 그림책을 좋아한다. 토니오는 <돈 카를로스>의 내용을 한스에게 설명한다. 한스는 <돈 카를로스>를 읽어보겠노라고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말에 더 관심을 보인다.

 토니오는 앞으로 한 번도 한스를 잊지 않을 것이다. 토니오는 한스에게 인정받고 싶고, 한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싶다. 토니오는 한스처럼 곧고 즐겁게, 순박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게, 신과 사람들 모두에게 인정받고 순진하고 행복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살고 싶다. 하지만 토니오는 인생을 다시 한번 시작한다고 해도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을 예감한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가 올바른 길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헤메기 마련이다.

 한스가 <돈 카를로스>를 읽는 것은 사실 별 상관 없는 일이다. 고독해서 우는 왕 이야기는 한스와 별로 관계 없을 것이다. 토니오는 한편으로는 한스가 <돈 카를로스>를 이해했으면 좋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스가 자신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한스는 지금처럼 그대로 명랑하고 씩씩해야하며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할 것이다. 토니오는 한스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고 가방을 팔에 끼고 앞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토니오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건 이미 패배당한 것이고, 괴로움을 달게 받아야 하는 일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다. 한스는 결국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명랑하고 밝게 살아갈 것이고 토니오는 토니오로 남을 것이다.

 박공 구조의 집들이 늘어선 골목 안으로는 눅눅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얼음도 눈도 아닌 부드러운 우박 같은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구름에 가리어 우유처럼 흐린 겨울 해의 지질한 빛이 비좁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토니오는 우울한 선망과 동경, 경멸과 행복감이 섞인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어갔다.

 

*추신 : 이 글에 나오는 표현들 중 많은 것은 토마스 만의 표현을 강두식[2004, 문예출판사]이 옮긴 것을 조금 변형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인용부호가 너무 많으면 가독성을 해칠 것이고 또한 표현들의 순서를 바꾸고 부분적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의 인용도 아닌 것들도 많아서 한 문장 한 문장 일일이 인용부호를 붙이진 않았다. 이 글 전체에 넓은 의미에서의 인용부호를 붙였다. 특히 많이 참조한 부분은 강두식[2004, 문예출판사]의 9p, 11p, 16p, 100p다. 다만 표현들이 제시되는 순서와 내러티브에는 손을 대었다. 일부 내용만을 따서 내러티브 구조를 바꿔 제시한 것은 내가 이 소설을 그런 식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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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하나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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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가져온 로망중에 하나는 이층집에 대한 로망이었다. 처음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직은' 시민결합의 다양한 형태를 기대하는 개인으로서) 미래 계획에서 빠지지 않았던 것이 '서울 근교에 작은 마당이 딸린 이층집을 사고 오순도순 살자는 것'이었으니 꽤 심지가 깊은 로망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 짧은 계획 안에 요약되어있는 나의 욕망이 너무나도 노골적이라서 부끄러울 정도이다. 대체 한번도 살아본적 없는 이층집에 대한 로망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서울 근교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더불어 '마당이 딸린' 따위의 디테일한 설정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마지막이 ‘오순도순’ 이라는 단어로로 요약되는 것은 대체 어째서란 말인가. 다른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층집이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한 설정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심지어 이 집을 머리속에 구현 할 수도 있다. 그림을 잘 그렸다면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로망이 시발점은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보던 TV드라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 접했던 이층집이 나오는 드라마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가 2N살이 된 요즘도 TV 드라마의 유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지, 드라마 피크타임에 채널을 켜면 여기저기서 내가 머리속에 구현하고 있는 이층집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고백하자면, 나의 미래계획은 거의 모든 면에서 TV드라마가 재현하는 이성애 커플의 결합 계획을 따르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그 이후로 한평생 행복한 삶을 꾸리는 행복하고 따듯하고 '오순도순'한 가족으로의 계획 말이다.

 

 아뿔사. 그런데 여기에는 큰 장벽이 하나 있다. 무엇이냐하면 나는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를 비롯하여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은 퀴어들이 매우 많으며, 퀴어중에는 시민결합의 어떤 형태든지간에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만약 '결혼'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관계 맺음을 통해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Happily  ever after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뿐이겠는가? 가족들의 반대와 일과의 충돌, 금전적 문제, 사회 규범적 문제 등등등.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30대의 퀴어에 대해서 도저히 상상할 수 가 없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30대의 퀴어는 거의 대부분 금발이거나 블론드의 머리를 하고 선글라스를 낀 혹은 히피같은 의상을 입은,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는 미드속의 그들 뿐이다. 이건 퍽 이상한 일이다.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수많은 퀴어들이 30대만 되면 뿅! 하고 사라진단 말인가? 알다시피 그것은 절대 아니리라.

 

 

 

 

 

 야마모토 후미오의 <내 나이 서른하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겪는 서른하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 <밴드>라는 단편은 기타리스트 하나마루와 아이돌 미쿠리와의 소위 '포카포카'한 연애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나마루는 스스로를 "이미 소년 같은 보이시한 이미지로는 팔리지 않(112p)"는다고 생각하는 서른하나의 여성 기타리스트이다. 한때는 그녀의 '보이시함'이 밴드의 장점으로 먹히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것이 먹히지 않는다고, 일종의 한계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하나마루는 미쿠리를 만난다. 하나마루는 아이돌인 미쿠리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지만, 미쿠리는 하나마루가 처음 발매했던 앨범을 보여주면서, 처음 하나마루의 음악을 듣는 순간부터 좋아했다는 고백을 한다.

 

 제법 뻔해보이는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은 유쾌하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종종 평가 절하되곤하는 '보이시'한 30대 여성의 매력적인 연애 이야기라니. 그것도 이성애 가족을 전제로한 불륜이 아니라니! 이전의 퀴어를 재현하는, 특히 레즈비언을 재연하는 수많은 서사들은 그들로 부터 성애적 측면을 제거하고, 친구 이상 연인이하의 미묘한 감정을 강조하거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에게 휘둘려 불륜을 저지르는 스토리로 그려져오곤 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서 나는 이 작품이 소위 '티나는 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흔히 취업시즌이 되면, 서른이 넘으면 자연스레 머리를 기르고 소위 여성스런 옷차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작품의 하나마루는 특별히 남자인체 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주위의 시선에 맞춰 자신의 행동양식을 바꾸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방법대로 기타를 단련하며 서른 하나를 살아간다. 

 

 몇년 전까지만해도 서른은 너무나도 멀어보였는데, 벌써 나의 서른은 어떨까를 고민하고 기대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신기하다. 막상 가까워지고보니 서른이라는 것도 어쩌면 별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약간 들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서른이 얼마나 특별하느냐와 별개로, 퀴어의 삶에서는 참고할 만한 사례가 너무나도 적다는 것은 항상 불안을 야기한다. 내가 꿈꾸고 계획했던 미래가 '결혼'을 중심으로 획득되는 이성애의 결합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종종 알 수 없는 불안에 빠지곤했다.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30대쯤 되면 '탈 동성애'하는거 아니야? 하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하고 난 뒤에서야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가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점에서 소위 티나는 부치의 연애 이야기를 다루는 <밴드>는 가볍지만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티나면 어때? 30대면 어때? 30대의 연애는 또 어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가오는 30대가 조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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