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의 소설을 최근에 처음 읽었다. 작년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단편을 처음 읽었는데, 수상작보다 작가 선정작으로 읽은 「에우로파」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다른 소수자들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자주 상징으로 비유로 쓰이고 읽히는데, 에우로파의 화자인 ‘나’의 목소리는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으면서도 상징에는 그치지 않아서, 내가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내 생각을 누가 알아채고 활자로 옮겨놓은 것 같아서 여러 번 읽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우로파는 목성의 위성 이름이다. 나의 친구이자 내가 되고 싶었던 여자인 인아가 부르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 인아가 나를 처음 만난 날 부른 그 노래는 내가 억눌러왔던 갈망을 불러내기도 했다. 에우로파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아와 나의 관계가 결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것이 꼭 목성과 에우로파처럼 보였다. 나와 인아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후 6년을 지냈지만 다소 피상적인 관계로 머물렀는데, 서로 처음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둘의 변형된 관계 또한 사랑이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인아를 사랑한다고 해도, 인아가 나와 입맞춘다고 해도.

 

“그동안 나는 언제나 너를 특별하게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76)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77)

나는 인아가 싫어하지 않을 만큼 이따금, 잠깐씩 조심스럽게 입맞춰보지만, 그 이상을 인아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안다.(78)

 

 인아와 내가 여전히 친구이고 자매인 까닭은 내가 원피스를 입고 힐을 신고 진하게 화장을 하는 지정성별 남성이어서도 아니고, 인아가 이혼한 이성애자여서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것은 성정체성과 성지향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인아라는 여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되는 것 말이야. 도울 게 뭔지 생각해볼게.”(92)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태어났다면 뭘 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살아낼 수 있다면 뭘 할 것 같아?”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미칠 듯 뜨겁게 치밀어 오른 말들을 내가 입에 담았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게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93)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서 나를 건너다보는,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한 번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저기 있다. (94)

 

 거울 속에 인아가 보인다면,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87)이 거울 속에 보인다면, 내가 바라는 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인아를 사랑하고, 혹시 인아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언제나 바라던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의 거울 속에도 언제나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이 있다. 내가 단 한 시도 되고 싶었던 적이 없는 사람. 굳이 미워할 이유는 없지만, 가끔 미워지는 사람. 거울 속에 있는 몸, 지금 타이핑을 하고 있는 몸이 이것과 다른 형태였더라면, 불가능한 상상을 가끔 하게 될 때가 있다. 마법이라도 써서 남의 몸을 뺏을 수도 없고.

 

 나는 복종하듯 스위치를 내린다.(96) 인아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어둠을, 인아의 허락 없이는 걷을 수 없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낯선 나의 얼굴이 있고, 언제나 그리운 인아의 얼굴은 거기에 없다. 단지 목성의 곁을 맴도는 에우로파처럼, 혹은 에우로파에 결코 닿을 수 없는 목성처럼,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 그리운 얼굴이 있다는 것만이 저 불분명한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96)을 억누르는 것이다. 사실 나와 인아는 목성과 에우로파가 아니어서 서로를 깊게 상처 입히고 아주 멀어지는 일이 있을 줄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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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나비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7
데이비드 헨리 황 지음, 이희원 옮김 / 동인(이성모)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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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르네 갈리마르. 재중 프랑스 외교관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다지 특이한 점을 찾아 볼 수 없는,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 그런 르네가 한 여자를 만난다. 오페라 <나비부인>을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중국 오페라 배우, 송 릴링. 그녀는 르네가 경험해보지 못한 '동양적 매력'으로 그를 사로잡는다.

 

 

(...) (문득 담배를 꺼내어 문다.) 신사가 되어 주실래요?  담뱃불을 붙여주세요.

 

/ 갈리마르는 더듬거리며 성냥을 찾는다. /

 

갈리마르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손해보셨네요. 제 담배에 불을 붙여주셨더라면, 당신 눈가에 담배 연기를 내뿜어

주었을텐데……. 이리 오세요.

 

 

 

  르네는 그녀를 만나 사랑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져있던 남성성 (이 부분도 역시 르네의 '환상'에 불과하다) 을 확인한다. 르네의 세상에서 송은 그의 사랑이 없으면 결국 죽음을 택할, 지고지순한 ‘나비’였다. 르네는 새장처럼 좁은 환상 속에 갇혀 자신을 향한 송의 사랑을 맹신한다, 무려 20년 동안. 그 맹신은 송이 중국에서 파견된 스파이였다는 사실, 게다가 그의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였다는 사실을 르네가 직면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에 그는 송의 진짜 모습, 그의 참 존재를 거부한다.

 

  『M. Butterfly』는 많은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는 희곡이다. 그저 단순하게 ‘여장으로 외교관을 사로잡은 남자 스파이와 그 사실을 20년 동안 눈치 채지 못한, 머저리 같은 프랑스 남자의 이야기’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작품 자체가 가진 무게감이 꽤나 무겁다. 남성의 음경에서 시작되는 담론은 실속은 없고 허세만 가득한 그들의 권위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동양에 대해 서양이 가지고 있는 억지스럽고, 역겨운 우월의식을 ‘르네’와 ‘송’이라는 두 그릇에 담아낸다. 또한 가끔은 재치 있는 말장난으로, 또 무대라는 공간적 한계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상황 설정으로 극의 쉼표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송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모하는 장면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것도 그 사실을 ‘관객에게 직접 통보한 후’, 송은 가발을 벗고, 머리를 매만지고, 수트를 입는다. 이는 송이 그의 존재를 부정하려하는 르네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직접 응시하게 만드는 장면과 연결된다.

 

 

갈리마르

제발. 그건 불필요한 일이오. 난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소.

 

정말인가요?  제가 누군가요?

 

갈리마르

남자.

 

그걸 실제로는 믿지 않죠.

 

갈리마르

아니오, 알고 있소!  난 언제나 나의 행복이 일시적이고 나의 사랑이 속임수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알고 있었소.

그런데 의도적으로 그 지식을 내버렸던 거요.  기다림을 참아내기 위해선 별 수 없었던 거요.

 

갈리마르 씨, 이제 그 기다림이 끝났어요.

 

/ 송은 속옷을 벗는다. 그는 알몸이다. 정적. 서서히 송과 우리는 갈리마르의 흐느낌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웃음 소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제야 독자 혹은 관객들 역시도 송의 사실적 존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독자 혹은 관객들의 심리 역시 (송이 남성이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을지라도) 그렇게 반전을 맞이한다.

 

  허나, 작품을 둘러싼 많은 역사적 사실이나 일상에서 접근하기 힘든 소재보다 나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송은 정말로 르네를 사랑했을까?’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을 르네에게 과감히 드러낸 뒤, 그를 대하는 송의 태도는 다소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송은 분명 르네를 사랑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송은 르네에게 환상으로서의 자신을 그토록 주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환상 속에서라도 그의 ‘나비’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그 시작이 정치적 꼼수의 발판이었을지라도. 르네를 향해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라고 소리치던 송의 그 애절한 눈빛은 르네를 향한 사랑의 증거로서 손색이 없다.

 

 

갈리마르

(...) 이 진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평생 동안 저지른 실수에 대한 희생 말입니다. 저의 실수는 간단하고 분명했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남자가 비열한 자식이고, 별 볼일 없는 건달이라는 사실입니다. (...) 저는 그자를 차주기는커녕 그자에게… 저의 사랑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그것을 왜 인정하지 못 하느냐구요? 그건 저를 산산이 해체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랑이 제 판단력을 비뚤어 지게 했고, 제 눈을 멀게 했으며, 제 얼굴의 선마저도 다시 그었습니다… 마침내 거울을 바라보았습니다. 전 거기서… 한 여자의 얼굴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 무녀들이 갈리마르에게 나비의 가발을 씌워준다. /

 

 

 

  르네는 고백한다. 자신의 환상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나비’ 송을 얻으려는 욕망이 자기 자신을 속였다고. 결국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있는 극한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르네는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환상을 깨고 나와 스스로 ‘나비’가 된다.

 

  자신의 욕망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사실을 성찰하고, 결국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환상에 기꺼이 헌정하는 어리석은 남자, 르네 갈리마르. 그를 보면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윽고 르네에게 투영된 나의 모습에서 발견할 것이다.

 

 

언제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기꺼이 외면하고야 마는, 그래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내 안의 ‘기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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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딸들
D. H. 로렌스 지음, 백낙청 옮김 / 창비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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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H. 로렌스는 섹슈얼리티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커다란 요소가 성욕이라고 보았던 작가이다. 그의 단편 소설인 「프로이쎈 장교」에는 대위와 당번병 사이의 동성애적 코드가 오고 간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는 이들의 관계가 군대라는 공간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군대는 다른 무엇보다도 획일성이 강요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중 당번병을 향한 대위의 관심은 노골적이다. 대위는 “젊고 정력적이고 무의식적인 부하의 존재를 자신의 주위에 의식”하면서, “그 젊은이 개인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게 된다(152).[1] 또한 자신도 모르게 “당번병에 대해 중립적인 감정을 회복할 수가 없”으며, “저도 모르게 그는 당번병을 늘 지켜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이 작품은 서술한다(154). 그러나 당번병을 향한 대위의 이와 같은 욕망은 군대라는 제한된 체계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기에, 대위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쓰고, “당번병에 대한 감정이,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부하 때문에 자극되어 느끼는 감정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157). 그러는 사이 대위의 의식 속에서 이 “색다른 무엇[은] 계속 자라나도록 방치”된다(157).

 

반면 당번병은 대위의 욕망으로부터 도망쳐 군대 체계와 사회적 평범함의 범주에 편입하고자 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여자 애인이 있고 그녀를 위해 시를 쓰기도 하는 인물인데, “자기 자신을 손상시키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156), 급기야는 대위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해야만 한다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166).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당번병의 손에 의해 대위가 죽임을 당하고, 당번병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획일성을 강요하는 군대는 평범함을 강요하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위가 계속해서 당번병에게 저지르는 폭력은 그가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행동 지침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대위의 폭력에 대한 정당화일 수는 없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당번병을 향한 폭력이 대위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당번병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 여자를 데리고 며칠 떠나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짜 쾌락”일 뿐이며 대위가 “여자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그 폭력은 불가피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158). 즉, 동성애를 위한 사회적 언어가 부족한 군대라는 공간에서, 대위의 욕망은 언제나 잘못된 방식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대위는 결국 당번병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평범하지 않은’ 대위의 욕망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오히려 대위의 욕망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로부터의 불가피한 ‘탈출’이자 ‘회피’이다. 군대라는 획일적 공간에서 정해진 규범 안에 편입될 수 없었던 것처럼 평범함을 강요하는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대위의 처지가, 현대 사회의 성소수자들의 처지와 얼마나 다른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1] D. H. 로렌스, 백낙청 역, 「프로이쎈 장교」, 『목사의 딸들』, 창작과비평사, 2001. 이후로는 페이지수만 괄호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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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 -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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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있습니다! 
 
 
 
  
 
 얼마 전 한참 흥행 중인 영화 <아가씨>를 봤다. 주위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였기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티켓을 예매하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영화관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놀란 점은 남자 관객이 많다는 점이었다. <대니쉬걸>이나 <캐롤>을 볼 때의 분위기를 상상했던 나에게는 아주 의외의 일이었다. 나는 편견이 가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불안해졌고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마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감상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군.' 이었다. 너무 당연한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김영하의 <거울에 대한 명상>을 읽은 후의 개인적인 평가 역시 이와 비슷했다. 
 
 김영하의 <거울에 대한 명상>은 트렁크에 갇힌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불륜 관계의 가희와 '나'는 충동에 이끌려 강가에 버려진 채 세워져 있는 차의 트렁크 안으로 들어가고, 그 트렁크의 문이 닫히면서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만다. 둘이 눕기엔 좁아서 움직이기조차 힘든 트렁크 안에서, 둘은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섹스를 하며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나눈다.
 
 가희로 부터 '형'이라고 불리는 '나'는 이미지에 매우 신경을 쓰는 사람으로 트렁크 속에 갇혀서도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이야기하는 남자이다. 그는 가희의 친구인 성현과 결혼한 유부남이지만 결혼 후에도 가희와의 만남을 지속해오며 줄곧 성현을 상수도, 가희를 하수도에 비유한다. 
 
 
아내가 상수도라면 그녀는 하수도였다. 아내가 내게 깨끗한 물을 제공해주는 존재라면 가희는 그 물이 거쳐 내려가는 배출구였다. 누구도 하수구엔 관심이 없다. 막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264p)
 
(성현에 대해 생각하며) 아. 그러고 보면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나. 지리산 장터목 산장에서 새벽밥을 짓던 그녀는 지리산 안개의 현신 같지 않았던가. (271p)
 
(가희에 대해 생각하며) 어둠이다. 죽음이다. 파멸이다. 끝이다. 죽어라, 카르멘이여. 너 요부여. (272p)
 
 
 화자인 '나'의 입장에서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갈려진 두 여자는 지속적으로 창녀와 성녀의 이미지로서 소비된다. 심지어 트렁크 속에서도 '나'는 계속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천사 같은 성현과, 지금 자신을 이 상황으로 떨어트린 요부 가희를 비교한다. 그러나 트렁크의 문은 열릴 생각이 없고 마침내 (그의 표현대로라면) 실존이 위협받는 순간, 가희는 보란 듯이 '나'를 비웃으며 말한다.
 
 
형이 절 그렇게 만들었을 따름이죠. 형을 만나지 않을 때면 난 언제나 재치가 넘치고 유머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형만 만나면 말이 안 돼요. 아니 별로 하고 싶지 않았고, 그건 형이 제게 요구하는 방식이지 않았나요? 신파, 신파- 신파극의 배우가 할 수 있는 대사와 발성은 제한돼 있잖아요. (..)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야기해둘 게 있어. (..) 성현이는 다 알고 있어. 형과 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거.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성현이가 개의하는 건 형이 아니고 나야. (271-3p)
 
 
 가희의 말은 일면 통쾌한 복수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글에서 쓰인 레즈비언이라는 소재 자체가 이 반전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특히 글의 마지막의 '나'의 독백은 그러한 심증을 더욱 굳게 만들어준다. 
 
다시 희극이다. 모차르트다. 돈 조반니를 부르는 지옥의 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말이 무대를 뚫고 돈 조반니에게 달려온다.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나를 사랑했다면 그건 가희였을 것이다. 내 거울은 나를 속였다. 진정한 거울은 나와 함께 이 트렁크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 아니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렇다. 거울은 없다. (275p)
 
 
 사실, 동성애 자체가 반전의 요소로서 등장하는 텍스트는 꽤 많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반전일 수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결말이 대개 소위 뒤통수를 맞은 사람의 독백으로 끝난다는 점은 불유쾌하다. 심지어 그 독백이 자신이 배신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푸념과 그 상황에 대한 멋들어진 -대개는 철학적인 어떤 자아 성찰이 들어있는 듯한- 대사로 끝이 나는 독백이라는 점은 더더욱 그렇다. 이것은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캐릭터의 특징 중 하나로서 고심했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반전에 초점을 맞췄다는 느낌을 준다. 더불어 어린 시절 남자에게 강간당한 기억이 있어 남자가 싫어졌다는, 가희의 입을 빌려 나오는 서사 역시 레즈비언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서사를 쓰려고 했다기보다는 마지막 반전을 위해 준비된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 소설은 1995년에 쓰인 짧은 단편소설이며, 구조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소설이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결말이 작가의 의도라거나, 혹은 시대적 한계라는 이름으로서 평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에서 (이 소설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성소수자는 구조적 반전과 어떤 희극성을 위해 끼워 맞춰지곤 한다. 동성애뿐 아니라 온갖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삽입하는 것은 주위에 성소수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기에는 꽤 혁명적인 발상으로 여겨지고, 어쩌면 한편으로는 짜릿하고 속 시원한 한마디를 던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이 절 그렇게 만들었을 따름이죠' 라고 말하는 가희의 말이 어떤 짜릿한 쾌감을 주는 것은 분명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완전하고 찝찝한 뒷맛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성소수자의 이미지는 언제까지 비슷한 방식으로만 소비될까. 그러니까 결국은, '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군.'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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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8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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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화의 <나>는 2003년, 19세의 나이로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자살한 故육우당을 추모하기 위해 쓰인 청소년 소설이라고 작가가 직접 밝히고 있다. '못 쓸 것 같다'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면서, '쓰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쓰셨다고 한다. 익히 들어온 호칭이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육우당을 기리며 쓴 소설. 작품 속 주인공인 '현'은 그에게 가장 근접한 인물이면서도, 불신과 자기혐오를 쌓았던, 그래서 결국엔 살아남아야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정작 자살을 한 '상요'라는 인물은 단편적이고,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육우당의 전기가 아니라, 그를 기리기 위한 소설이니만큼 현의 내적갈등과 상요의 극단적인 선택이 그 당시 10대 동성애자들의 삶과 육우당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한다면 과연 내 인생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 45p

 

 주인공 현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 살고 있는 이혼가정의 열 아홉살 남고생이다. 녹차를 자주 마시고, 혼자서 써내려간 시 공책이 네 권이 다 되어가는 문학소년이다. 그만큼 나이에 비해 응어리진 것들이 많은 것일까, 친구에게 커밍아웃 한 번 하지 못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현은 자꾸만 자신을 깎아내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불안정한 가정에서의 생활도 그 태도에 한 몫 했지만, 소설의 초반부에서 자신도 인정하지 않은듯 어슴푸레하게 드러나는 성적 지향으로 어딘가 불우하게 그려지는 현의 모습은 위태롭기보단 어두웠다. 현은 전학온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하고, 상요에게도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그 애를 잃었다. - 95p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시달려오던 것들이 고스란히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자 현은 정신과로 향했고, 저를 끌어안는 그 아이를 뿌리친 뒤 못을 박았다. 변태새끼, 그 말을 뒤로 현은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리던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픔을 품고서.

 

 우리는 성적 소수자. 제우스의 번개로 내 반쪽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방랑자. - 134p

 

 위의 인용구는 소설 속 '상요'가 남긴 쪽지이자, 육우당이 남긴 쪽지의 마지막 내용이다. 뮤지컬/영화 헤드윅에도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를 차용하여 쓴 글은 담담하면서도 애잔했다. 상요는 비교적 짧게 등장한 인물이었다. 학교에 아웃팅을 당하고, 집에서도 일기장을 들킨 뒤 저를 낳아준 부모에게서 죽으라는 말을 들은 그는 '장자'를 들고다니며 읽던 차분한 인물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소설적 과장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성소수자들에게 혐오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에 대한 분노. 상요는 죽었는데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 - 172p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긴 시간과, 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남아있다고 느낀다. 거기서 절망을 느끼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을 더 내딛기 위해 노력하거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상요는 진심으로 이해해줄 단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살 수 있을지 몰랐다. 우리는 소수자라는 이유로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것을 생각해야했다.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2의 상요, 제3의 상요가 생기지 않도록, 추모하고 또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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