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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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단편소설 「월경」은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서술과 작가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돋보이는 글이다. ‘은하수’라는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공은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 장면을 들킨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에 피살되는 장면을 목격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작중 ‘계집’이라고 불리는 은하수 종업원은 공사장 인부들과 관계를 나누는 성 노동자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인 서술자와 ‘은하수 계집’의 관계이다.

 

주인공 ‘나’는 여성성이 거세된 인물로 묘사된다. 풍요로움과 섹슈얼함을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잘려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의 몸은 “작정이라도 한 듯 자라기를 멈추”어, “젖가슴은 열세살 몽우리로 남아 있고 키도 150센티미터가 안”되며, “열두살에 시작한 생리도 이젠 하지 않게 되었다”고 묘사된다(62).[1] ‘나’의 몸은 “노인의 거죽처럼 처지고 볼품없어 보이”며, “듬성듬성 제멋대로 뻗은 털들 사이로 보이는 누렇게 질린 두덩과 밋밋하게 뻗은 얇은 틈”(74)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소거된 혹은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몸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여성성이 제거된 나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풀이 우거지고 녹이 슨 철로의 황폐한(barren)[2] 이미지와 닮아있다. 이와 같은 서술들은 ‘나’를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마치 잃어버린 여성성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은하수 계집’의 몸을 탐닉한다. ‘나’는 “문틈에 눈을 대고 숨을 죽인 채” 목욕을 하는 “계집의 엉덩이를 훔쳐보”며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쑥 넣거나 체벌을 하듯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상상을” 한다(70). “내가 좋아하는 건 은하수 손님들이 하는 것처럼 계집의 엉덩이를 만지기도 하고 가슴을 주무르기도 하면서 자는 것이다”(71). ‘계집’의 몸은 ‘나’의 것과는 달리 “비옥한 대지”(74)라고 묘사된다. “봉곳하게 솟은 계집에 무덤”에서는 “향긋한 풀냄새”가 나고, “두덩에서 안쪽으로 결을 고른 풀들은 윤기가 흐르고 진한 색을 띠고 있다”(74).

 

그러나 ‘나’의 시선을 따라 ‘계집’의 풍요로운 신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지정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신체는 반드시 여성으로서의 ‘생식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그것이 결여된 ‘나’의 신체는 부족하고, 결핍되고, 모자라고, 고장 난 신체일까?

주인공 ‘나’는 철로에 의해 외부와 단절 되어있다. ‘나’는 “철로를 가로지를 수는 없”으며, “철로는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안전선,” 혹은 “방어벽” 역할을 한다(65). 심지어는 “철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한 전류가 느껴”지며, “철로는 강력한 힘으로 나를 밀쳐내”기도 한다(76). 철로에 가로막혀 있는 ‘나’의 모습은 마치 여성이라는 이름에 주어지는 경계선에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철로를 넘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다. “철로를 아직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65).

 

주인공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정사를 나누었던 공간이자 은하수 계집이 푸른 모자를 쓴 사내와 정사를 나누는 공간인 방은, ‘남녀의 결합’이 현현하는 곳으로 아주 분명한 이성애 중심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에 피살당하는 장면을 보아야 했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신체를 박탈당함으로써 헤테로섹슈얼리티를 실천할 수 없는 ‘나’는 그 방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척되어왔다. 그 방은 “내가 넘지 말아야 할 문지방” 너머의 곳이었고, ‘나’가 “머릿속으로 방문에 대못을 박은 다음 […] 지워버”린 장소였다(79).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 “못 쓰는 방”(78)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계는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한 가운데 앉아 정사를 나누고 있는 계집과 사내를 향해 “팔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다”(83). 사내와 몸을 나누며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고 있는 듯”한 계집의 몸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83), “질투를 느끼”게 하는 푸른 모자의 사내에게 또 팔을 휘두른다(74). 그 순간 경계는 무너지고, 주인공에게 강요되던 정형적 여성성도 함께 소멸한다.

 

정형화된 개념에서 벗어날 때, ‘나’는 글의 제목처럼 월경(越境),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철로를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철로에 발끝을 대본다. 맨발에 차가운 쇠의 느낌이 전해져온다. 나는 감전되지 않는다. 은행잎 하나가 날아와 발부리에 닿았다가 철로 사이에 몸을 누인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철길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가 걸었던 길을 조심조심 밟아 걷는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잠든 곤충들의 낮은 숨소리가 들린다. (83)

 

색(色), 여성성, 그리고 풍요로움의 상징인 보름달빛이 ‘황폐한’ ‘나’의 몸 위로 찬란하게 쏟아진다. “더이상 차오를 수 없는 보름달은 스스로 몸을 허물어 경계를 지”운다(83).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을 때, 그녀의 몸 위로 흩어지던 초승달 모양의 칼자국과는 달리, 경계를 허무는 보름달 빛을 받으며 ‘나’는 비로소 몸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월경(月經)이 끊어진 ‘나’는 이제 스스로 월경(越境)하는 사람이 되어, ‘몸’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마구잡이로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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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람을 기다리며
잉그리드 고돈 그림, 앙드레 솔리 글, 김영진 옮김 / 달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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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인 마테스는 뱃사람을 기다린다. 그가 기다리는 뱃사람은 바다로 떠나며 마테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마테스, 내 꼭 다시 돌아올게.

그때 우리 같이 떠나는 거야.

배를 타고 온 세상을 둘러보자고.

너랑 나, 우리 둘이 말이야."

 

 이건 명백한 고백이다. 때문에 마테스는 '한시도 쉬지 않고 바다를 지켜(p.7)'본다. 그러나 마테스의 지인인 로제나 우편배달부 펠릭스는 이러한 마테스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듯하다. 빵을 가져온 로제는 마테스에게 "마테스, 빵 가져왔어! 뱃사람은 그만 잊도록 해. 그 사람은 벌써 오래 전에 널 잊었을 거야. 지금쯤 무인도에 누워 햇볕이나 쬐고 있을걸. 아니면 바다 속에 빠져 버렸든지.(p.7)"라고 말한다. 펠릭스 역시 "(…) 또 뱃사람 타령이야! 그 사람 고래한테 잡아먹혔을지도 몰라. 해적한테 붙잡혔을 수도 있고……(p.9)"라고 마테스에게 말한다. 하지만 마테스는 로제나 펠릭스의 이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로제와 펠릭스 역시,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다(이 부분은 뒷부분에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예정이다).

 다음날은 마테스의 생일이고, 로제와 펠릭스 그리고 또 다른 지인 엠마까지 모여 파티를 연다. 하지만 마테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뱃사람 생각뿐이다. 때문에 마테스는 '뱃사람이 좋아하는 술(p.12)'도 미리 준비해둔다. 그리고 이들은 마테스의 생일 파티에서 자리에 없는 뱃사람과, 그런 뱃사람을 기다리는 마테스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펠릭스는 마테스의 생일 선물로 '병에 든 모형배(p.15)'를 주는가 하면, 엠마는 '진짜 뱃사람들이 입는 스웨터를 손수 떠서 선물(p.15)'한다. 그러면서 "뱃사람이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뜬 거야. 둘이 바다로 나갈 때 입으라고(p.15)"라는 코멘트도 남긴다. 또한 이들은 '아무도 뱃사람이 좋아하는 술의 병마개만은 따지 않(p.17)'는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테스와 뱃사람이 아닌 또 다른 퀴어 커플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펠릭스의 흥겨운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다들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p.17)'는 구절이 등장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로제와 엠마, 펠릭스, 마테스밖에 없으며 일러스트에는 마테스가 춤추는 모습이 없다. 대신 로제와 엠마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부분은 묘하게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이후 생일잔치가 끝난 밤, 뱃사람이 마테스의 등대로 돌아와 둘이 해후하는 장면의 묘사는 이러하다. 

 

(…) 두 사람은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빙글빙글 원을 돌았습니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지요.(…)

 

 즉 이 작품에서 '춤'이란 행위는 우정 이상의 친밀도를 나타내는 동작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로제와 엠마, 그리고 뱃사람과 마테스뿐이기 때문이다. 둘은 결국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뱃사람은 마테스와 했던 약속을 지켰고, 마테스는 뱃사람의 말을 믿고 계속 기다렸다. 둘에게 남겨진 엔딩이 어떨지 바로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한편 아침이 되자 로제와 펠릭스가 등대로 마테스를 찾아온다. 그러나 뱃사람과 떠난 마테스는 없고, 로제와 펠릭스는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p.26)' 마테스의 등대로 찾아온다. 그리고 그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펠릭스가 말했습니다.

"배를 타고 뱃사람을 찾아갔을 거야. 놀랄 일도 아니지 뭐."

로제도 한마디 했습니다.

"우리를 잊어버릴 테지.

어디 무인도에 난파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고래한테 잡혀먹었을지도 모르고."

"배가 가라앉았거나."

"해적을 만났을지도 모르지."  

 

 이제 마테스를 기다리던 등대에서 로제와 펠릭스가 마테스를 기다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테스의 행방에 대해 둘이 나누는 말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함. 뱃사람을 기다리던 마테스에게 둘이 건넨 말이었다. 다르게 보면 그들은 마테스가 그토록 기다리는데도 한참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은 뱃사람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친구인 자신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말없이 등대를 떠난 마테스에 대한 서운함을 일부러 험한 말로 푸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마테스를 아꼈다. 마테스에게 그 사람은 죽었을 거라고 말할지언정, 마테스가 이상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뱃사람을 기다리는 그를 존중했다.

 

 『뱃사람을 기다리며』 속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퀴어성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축하하거나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감정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감정을 존중하고 아무렇지도 않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렇기에 이 그림책 속 세계는 묘하게 따스하다. 이후 마테스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 따스함은 언제까지나 페이지 사이에서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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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땅끝으로 간다 아름다운 청소년 4
이성숙 지음 / 별숲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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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퀴어문학 리뷰를 쓰며 접한 국내 청소년 문학이 네 번째로 접어들었다. 이 작품은 청소년 자살을 키워드 삼아, 네 명의 아이들이 자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중 표지에 그려진 기한이라는 주인공과 마리라는 여자아이가 주로 스토리를 끌고 간다. 이 책을 퀴어문학으로 분류하게 한 '샤인'이라는 등장인물은 표지에 없다. 기한과 마리를 제외한 등장인물이 다소 평면적이고 단편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소설의 조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첫 문단부터 이야기하지만, 리뷰에서 다룰 '퀴어한'부분은 분량이 적다. 다소 부자연스럽거나 유치한 문장들도 많이 등장한다. 다만 MTF 트랜스젠더 청소년인 샤인의 사연은 왜곡 없이 임팩트 있게 그려졌고, 조연에 대한 특유의 무심함이 이 소설에선 순기능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난 그렇게 살 수 없어. 한 번도 내가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난 여자니까. 몸만 남자로 태어난 여자니까. -99p

 

 책에 등장하는 샤인은 MTF 트랜스젠더이다. 첫 등장에서는 그저 핑크색 스키니진을 입고서 만화 대사처럼 딱딱한 말투를 쓰는, 빼빼 마른 남자아이로 묘사된다. 필자는 처음부터 이 소설에 그가 등장하는걸 알았지만, 핑크색 스키니진에서 감을 잡지 못한 사람은 그의 커밍아웃에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는 조연보다도 약간 단역 같은 비중을 갖고 있었지만, 작품 내에서 두 번이나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첫 번째는 모두가 같이 쓰기로 한 돈을 갖고서 자신의 옷을 사버린 일이었고, 두 번째는 그 옷을 입고 한겨울 강물에 빠져버린 일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상투적인 퀴어서사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죽기로 한 순간에 자신이 있고 싶었던 옷을 입은 그 심정이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 자신으로 살 수 없었던 그, 아니 그녀의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샤인은 처음부터 살고 싶어서, 제대로 살고 싶어서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134p

 

 그녀의 범행(?)이 드러나며 이어지는 커밍아웃에 아이들은 놀라지만, 그것이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나쁘다면 나쁘고, 좋다면 좋은 점이었다. 그녀를 쏘아붙이고, 혐오 발언을 했던 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희생하면서도 강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은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 마음먹었을 때 주인공인 기한이 떠올린 독백이었다. 살고 싶어서 선택한 죽음. 어쩌면 죽음에 대한 충동과 함께 찾아오는 건 살고 싶다는 충동이 아닌가 싶다. 어느 누가 단순히 죽고 싶어서 죽는가. 자살은 죽고 싶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살 수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으면 끝일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옆에 남겨진 사람들 가슴에 그 죽음이 고스란히 남거든. -170p

 

 샤인의 짧은 등장에 대한 고찰은 마쳤으니, 이제 이 소설이 주는 중심 메시지이자, 아쉬운 부분에 대해 써보겠다. 위의 인용된 구절이 포함된 대사들은 하나하나 판에 박힌 교과서적인 이야기였다. '그걸 누가 몰라?'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인데, 맞는 말이라서 더 밉상이었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높다. 우연히도 지난달 올렸던 리뷰에서도 누군가의 자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살은 어떤 사고보다도 정신적으로 더 참담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생물도 살아야 한다는 본능을 갖기 마련인데, 그것을 초월할 정도의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아직 꽃피우지 못한 젊음에게 못다 한 삶을 포기하지 말라 말하고 싶은 것은 충분히 알겠다.

 이 소설에 대해 전반적인 감상을 쓰자면, 무거운 소재를 희망적으로 풀어낸 '청소년'소설이었다. 전지적 퀴어 시점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소설에 등장한 네 명은 다 소수자였다. 나약하고, 막막하고, 세상에 외면당한 아이들. 샤인의 행동들과 커밍아웃이 별다른 문제 없이 받아들여진 것도 그런 정서를 바탕으로 네 명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절망 속에서도 살아 있기에 아름다운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라고 맨 앞에 쓰인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아름다운 생명이다. 그 모습이, 삶이 어떠하든 고통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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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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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게보르크 보흐만의 단편소설 ‘고모라를 향한 한 걸음’은 서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문제를 지적하며 처음으로 작가가 여성 서술 시각을 취한 작품이다. 이 작품 전까지 그녀는 남성 서술 시각만을 취한 작품만을 썼으며 이에 대해 자신이 대개 ‘남성적’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작가의 고백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작품 속 주인공 샤를로테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마주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제한적 시각과 생각은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샤를로테가 생각하기에 흔히 여성들의 입맞춤은 무저항이고 ‘가느다랗고’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는’것들로 표현된다. 또한 그녀에게 구애하는 여성인 마라의 언어는 샤를로테로 하여금 사내들의 그것과 달리 ‘근육이 없는 언어’, ‘보잘 것 없는 언어’로 읽혀지고 들려진다.

 

샤를로테가 사는 사회는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 상관없이 그녀의 남성 연인인 프란츠에게 노래하듯 말을 건네야만 하는 사회다. 어리광을 부리듯 스스로를 축소시키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고서 모종의 목적을 위해 현 사회의 기득권이자 분별 있는 강자로 묘사되는 ‘남성’을 확대시키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하는 그런 세상. 여기서 모종의 목적이란 크게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아마 그녀 존재의 사회적 생존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가부장주의와 헤테로 규범이 지배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인형처럼 살아온 여성 샤를로테에게 있어 각성의 순간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형태의 애정, 또 다른 여성인 마라의 구애와 함께 찾아온다.

 

호모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당연한 듯 배제하고 살아왔던 그녀에게 있어 마라의 사랑은 일종의 중대한 차원의 메시지 역할을 한다. 처음 샤를로테가 생각하기에 마라의 사랑은 광기 그 이상도 이하의 것도 아니었으나 마라에게서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서 정해진 여성성의 한계 너머를 보며 그녀의 생각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p. 171 그녀의 감정과 생각은 일상적인 궤도에서 뛰쳐나와 갈길을 잃고 허공으로 질주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자유롭게 달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무엇이든 불가능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똑같은 실체로 구성된 존재와 함께 살아가서는 안 된단 말인가?

 

 

호모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여성이 여성으로 온전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은 꽤나 흥미로운데,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실체로 구성되어 있는 마라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마라와의 관계의 가능성을 통해 스스로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사회와 자신이 한정지었던, 그야말로 정상적이고 일상적이라고 단정 지었던 섹슈얼리티 규범의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 퀴어니스는 솟아나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깨달음의 순간은 성공적으로 제공된다.

 

 

 

p. 176 남자와 여자라는 것이 효력을 잃을 때에, 이런 관계가 종말을 맞을 때에! 라고 외치며 샤를로테는 마치 ‘죽은 자를 애도하듯’ 프란츠를 생각하고 슬퍼한다.

 

 

물론 그녀는 전혀 학습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이제는 ‘죽어버린’ 사내들의 유령과도 같은 형상 주변을 배회하기도 한다. 이성애와 이성애 결혼생활(당시 순응과 습성으로 얼룩진)을 제외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정도로 깨어나기야 하지만 지금껏 선행된 사례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마라와의 낡은 ‘동맹’이 와해될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샤를로테는 어느 누구의 여자도 아닌 그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욕망을 일깨우는데 성공했고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재정의하고 정체화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샤를로테는 정해진 계율을 뒤흔들고 싶은 욕망에 가끔씩 시달리곤 했으나 그 통상적인 계율을 대처할 다른 묘수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고 그저 흡수되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마라가 자신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를 통해 또 다른 묘안을 깨닫게 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것은 호모 섹슈얼리티, 레즈비언 관계를 통한 주체적 여성정체성의 확립이며 동시에 다른 여성과의 친밀한 유대 관계를 통한 굳건한 연대이다.

 

 

p.180 그녀가 마라를 사랑한다면 모든 것은 달라질 것이다. 샤를로테는 소녀 시절을 상기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숙한 성인 여성, 어느 누군가의 부인이자 그림자가 아니었던 그 시절. 마라와의 관계를 선택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왕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이르러 샤를로테는 또 한 가지의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과거의 그 자신과도 같았던 존재를 ‘소유’하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 1차적 각성의 순간을 겪은 후 그녀는 마라와 같은 여성, 즉 사회의 많은 여성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남성을 보필하듯이 자신을 열렬히 사랑해줄 존재를 원한다. 자신에게 소리를 질러도 화를 내지 못하고, 한 번도 결정이라는 것을 내려본 적 없는, 기다란 머리칼을 가진 연약한 생명체를 말이다. 마치 자신이 프란츠에게 했던 것처럼 그와 같은 여성상을 마라에게 구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샤를로테는 종국에는 마라와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죽어 있다고 느낀다. 샤를로테 자신의 과거를 천천히 살해함과 동시에 그녀의 사랑만을 원하며 무너지는 마라의 수동성을 살인하는 것이다.

 

결국 두 여인이 어떤 합일도 이루지 못한 채 잠드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의 결말이 샤를로테의 무력함을 묘사하는지, 혹은 어떤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는지는 오롯이 독자의 판단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샤를로테가 흘리는 눈물을 두고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기존 사회질서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소수자 관계의 공허함을 표현한 것이라 이야기할 가능성은 충분하고 이미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왔다. 허나 사실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는 그러한 비극을 뛰어넘은 훨씬 커다란, 만족스러운 희망이 가득 차 있다. 분명한 것은, 샤를로테는 어쨌거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란 사실이다. 그녀는 더 이상 ‘위대한 어머니, 위대한 창녀, 사마리아의 여인’등의 형상으로 살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였으며 이미 이성애 중심 사고를 벗어나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도한 바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결국 그녀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가능성을 만들었고 보다 넓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마라와의 새로운 연애 관계이든, 혹은 사회의 속박을 벗어나 진행되는 다른 남성 존재, 퀴어 존재와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관계이든, 주도적으로 임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찾는 것이든 온전히 그 자신으로써 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목도하고 그 가능성의 문을 연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간에 ‘퀴어함’은 소설 속 시대에서도,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가장 자기답게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퀴어 존재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그런 세상이며 그것은 최종의 목표이자 우리가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다. 더 주체적이고 더 능동적이고 더 대안적인 관계, 그러한 관계의 모색은 필연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맞닿게 된다. 샤를로테는 바로 그 과정을 겪었다. 그녀는 호모 로맨틱, 섹슈얼리티의 여로를 통해 자아 탐색의 과정을 거쳤으며 그것으로 더 이상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에 굴복하지 않는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지점에 이른다. 앞으로 견뎌내야 하고 타개해야 할 수많은 억압의 가시덤불이 있을지라도 아마 샤를로테는 그 유해한 ‘가시’들을 정원 가위로 잘라내려는 시도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아마 마라가 그런 샤를로테의 곁에서 정원 가위를 함께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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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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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거미여인의 키스. 344p

 

 

‘거미여인의 키스’ 는 아르헨티나의 대중작가 미누엘 푸익의 작품으로, 서술 없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발렌틴과 동성애자 몰리나가 나누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다. 매일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제가 보았던영화 이야기를 해준다. 그가 입에서 나오는 여섯 편의 영화 이야기로 인해 현저히 다른 성향의 두 남자는 서로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닮아가며 점차 사랑하는 사이로 변하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 소설에서 독특한 특징 한 가지에 주목해 보았다.

 

 

그것은 바로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해 주는 영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한테 뭘 배웠지?」

「설명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야. 하지만 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었어.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거미여인의 키스. 344p

 

 

몰리나는 감옥 생활의 따분함을 잊기 위해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준다. 하지만 사실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는 하나의 ‘장치’이다. 바로 영화는 동성애자인 몰리나가 발렌틴을 유혹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독특한 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이 둘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영화인 ‘캣피플’에서는 몰리나는 여주인공인 표범여인 이레나에, 발렌틴은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심리분석가로 나온다. 이 이야기로 몰리나는 발렌틴의 마음을 건들인다. 세 번째 영화인 ‘매혹의 오두막’에서 발렌틴은 잘생긴 젊은이로, 몰리나는 그런 그를 사랑하는 추한 하녀로 비유된다. 매혹의 오두막이 전하는 메시지는 ‘영혼의 사랑만이 참다운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인데 여기서 몰리나는 자신을 위로하는 동시에 발렌틴에게 위로를 받고자 한다.

마지막 영화인 ‘멕시코 영화’는 1950년대의 여러 멕시코 영화를 섞어 조합한 이야기이다. 둘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사랑이다. 이 즈음 발렌틴과 몰리나는 서로를 깊게 사랑하게 된다. 영화 속 두 남녀는 거스를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서로를 향한 노래를 부른다. 영화 속 남자는 죽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의 노래를 생각하며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발렌틴은 이 엔딩을 두고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진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한다는 의미니까’라고 말한다. 이게 바로 둘의 진정한 사랑을 암시하는 것이다.

 

 

「발렌틴, 너에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한 얘기 또 해서 미안해. 전에 한번 말했는데, 넌 그 말을 별로 달갑게 여기질 않았어」

「……」

「몰리나, 남에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래, 약속할게」 -거미여인의 키스. 344p

 

 

작중 초반 좌익과 마르크스주의에 깊게 빠져있던 발렌틴은 이상주의적이고 감성적인 몰리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감옥 안에서도 공부를 하고, 혁명과 동료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몰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변한다. 정확히는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닮게 된다.

 

 

그런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전한 마지막 부탁은 마치 이 세상 모든 동성애자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동성애를 좋게 보지 않았던 발렌틴이 본인의 의지로 말했기에 그 의미가 더욱 컸다. 당시 사회상과 그들이 처한 환경 내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보이고, 진정한 사랑을 말하는 발렌틴과 몰리나가 행복하길 바란다. 거미 여인이 된 몰리나와 진정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알게 된 발렌틴이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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