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산지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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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은 세 명의 가족이 160층짜리 백화점의 비상계단에 갇힌 상황으로 시작한다. 이 비상계단은 어딘가 이상하고,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으레 있어야 할 층수 표시가 없고, 비상계단의 문은 단 한 층도 열리지 않으며, 붉은색 비상표시등은 온 공간을 불길한 붉은색으로 채운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비상계단에 들어가지 말라고 쳐져 있는 빨간 띠를 넘어 들어왔다. 또한 모두 정확히 몇 층에서 계단으로 들어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오륙 층, 아마 지하 3-4층, 십몇 층, 몇 층에서 두어 층 내려왔는데, 그런 식이다. 아무도 여기가 어디인지, 몇 층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모두 층수 표시도 없는 비상계단을 헤맨다. 1층에서 구출을 한다는 방송을 듣고 내려갔다가, 사실 진짜 ‘구해야 할’ 사람들은 옥상에서 구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올라가거나.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없고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는, 그 자체가 복잡하게 꼬인 미로이며 하나의 세계인 것 같은 비상계단에 모두 갈 곳을 잃고 서 있다. 그 곳에 주인공의 어린 아들 환이가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그린다. 물고기를, 전부 서로 다른 물고기를 열심히 그린다. 사람들은 이제 환이가 그리는 물고기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환이가 적는 숫자로 새롭게 층수를 센다. 과거의 기억에 의지해 세상의 기준을 맞히려던 사람들이, 틀릴지언정 그들의 기준을 정립하고 계단을 오른다.

 

  이 소설의 내용이 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책에서 현실성을 찾지 않기를 바란다. 소설 안에서의 개연성은 있지만, 당장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소설은 허구이고, 진실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장르니까. 누가 봐도 현실적이지 않은 요소로 주인공의 현실과 독자인 나의 현실까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의 매력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이만 말을 줄인다. 결말을 말하지 않겠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을 아끼고 싶으며, 읽은 사람과는 열띤 토론을 벌이고 싶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무한히 달라지는 해석의 방향을 모두 알고 싶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 가지고 있는 상징이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고, 해석에 따라 주제마저도 달라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문단을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삶에는 이유가 없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에게 삶은 오기였다. 승리하고 이겨내려는 집념이 아니라, 제자리에 꼼짝 않고 버틴 채 서 있기 위한 아집이었다. 여러 가지 지상의 말들로 화려하게 이름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그것이 시간의 수레를 가로막은 사마귀의 몸짓임을 알고 있었다. 거대한 바퀴에 몸통이 짓눌려 질질 끌려가면서도, 어디까지 갈 테냐 끝까지 시간에 매달리는 발버둥.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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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 사계절 1318 문고 1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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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퀴어 소설이라고 듣고 읽었다.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어디에도 ‘레즈비언’이라든가 ‘퀴어’ 같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한 퀴어 소설이다.

 

주인공 할링카는 보육원에 살고 있다. 할링카의 유일한 희망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로우 이모. 이모가 언젠가 자신을 꺼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주 이모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할링카에게는 이상한 친구가 있다. 보육원에서 제일 예쁜 로즈마리는 평소에는 말을 한 마디도 섞지 않지만 밤만 되면 침대로 찾아와 등을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로즈마리가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링카는 그걸 알고 있다. 이 관계는 할링카가 보육원에서 가장 어린 레나테와 친해지며 깨지게 된다. 할링카는 레나테가 자신의 동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귀여워한다. 어머니 쉼터를 위한 모금에서 얻은 초콜릿을 나누어 주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둘은 더욱 친해진다. 한 번도 싸움을 한 적 없던 할링카는 레나를 위해 엘리자벳에게 주먹을 휘둘러 벌을 받기도 한다. 이야기는 할링카가 레나와 함께 자신이 사랑하는 로우 이모의 집에 가기로 하며 마무리 된다.

 

처음에 책을 덮었을 때는 약간 헷갈렸다. 나는 분명 퀴어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어디를 봐서? 하지만 곧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만약 레나와 할링카 중 한 명이 남자였다면 나는 둘은 서로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게 꼭 사랑인가? 친구끼리는 이럴 수 없어? 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할링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특이한 캐릭터였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딱히 흥미를 느끼는 일도 없다. 무기력한 것 같지만 실은 일부러 무기력한 모습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할링카는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적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자신이 직접 말하기에는 굉장히 슬픈 말이다. 하지만 정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아마 진짜로 아무렇지 않아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할링카는 이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

 

이상적인 결말은 로우 이모가 다시 할링카를 데리고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레나와 할링카가 함께 로우 이모의 집으로 가는 것으로 책을 끝냈다. 할링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로우 이모에게 제일 사랑하는 레나를 데리고 가는 것. 아마 이게 할링카에게는 최고의 행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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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보일드 키튼 1
헨(HEN) 지음 / 큐블리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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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은 여러모로 특이한 작품이다. 일단 책의 제목부터 내세우고 있는 것은 '소프트보일드' 장르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 장르는 남성 중심의 서사이자 냉철하고 이성적인 문체를 특징으로 갖고 있는 '하드보일드'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탐정 및 수사물의 기본 공식을 밟아 나아가되 보다 감성적인 묘사 기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프트보일드' 장르를 표방하는 동시에 여성 퀴어 서사까지 담고 있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은 출간에 앞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을 통해 후원을 받았는데, 출판사인 큐블리셔는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속에는 여성간의 연대와 사랑이 있습니다. '소프트 보일드'라는 제목의 의미답게 두 사람은 사건을 해결하며 마주하는 모든 순간 순간 냉소적이기 보다는 끝 없이 아파하고, 한 없이 공감하며, 또 최선을 다해 서로를 지지해 줍니다. 거대한 사회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은 그들이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결국 '언젠가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아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뿐입니다. 그들은 만화 속 인물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우리들의 얼굴입니다.

 

때문에 『소프트 보일드 키튼』 속 모든 인칭대명사는 '그'로 통일되어 있으며, 성차별적인 언동도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주인공인 '재인'은 보험사 특수조사팀 소속 보험조사원이라는 다소 특이한 직종을 가지고 있지만 등장하는 인물 그 누구도 그가 여성이라는 점을 문제삼지 않는다. 이는 '재인'의 조력자인 '은영'에게도 해당된다. '은영' 역시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팀에 소속되어 있는 형사이며, 성별을 이유로 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하는 일도 없다. 둘은 자신들 앞에 놓여진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은 「프리-프락」과 「베르겔츠 고트」, 그리고 「더 로드킬러」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소설집이다. 첫 장인 「프리-프락」에서는 부딪쳐서 서류를 쏟는, 다소 클리셰적인 만남을 통해 두 주요 인물인 '재인'과 '은영'이 만나게 되며 두 번째 장인 「베르겔츠 고트」에서는 본격적으로 연대하며 서로 간의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 

 

"죽진 말아요, 우리."

은영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에 재인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정 좀 붙이자고 채근하던 첫 사건 때에 비해 서로 간에 신뢰라는 게 조금 생긴 것도 같았다.


"황 형사님, 저 이 일 계속 해도 되는 걸까요?"

"……척 보면 안다면서요."

아 모르겠어요! 척 봐도 모르겠어! 재인이 투정을 부리듯 발을 좀 구르고는, 이내 피식 웃으며 은영 쪽을 올려다봤다. 경찰청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저 여자, 좀 멋있네. (…중략…)

"잘 하세요."

"그래요…?"

"네. 경찰이셨으면 같이 일하고 싶을 만큼."

 

또한 사건이 진행될 때마다 둘은 신뢰뿐 아니라 애정도 천천히 쌓아가게 된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에는 대놓고 드러나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술과 묘사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우정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 놀리듯 웃어 보인 은영이 이내 그 웃음 그대로 어서 가시라고 손을 흔들어 준다. 저렇게 웃어 보이면 또 참 화사한 사람이란 말이지. 자주 좀 웃어주면 좋겠지만 그의 직업이 그걸 허락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인은 경찰청을 벗어나며 살짝 웃었다. 둘이서 무슨 야유회인지 조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간만에 입에 담아보는 '야유회' 세 글자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설렌 것 같기도 하고. 경찰청 주차장으로 오라는 걸 보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 텐데, 뭘까. 서울을 벗어나 멀리 경승지에 돗자리 펴놓고 술 마시는 야유회를 말하는 건 아닐 거다. 그냥 장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황 형사가 장난도 칠 줄 알았던가? 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또 이걸 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까.

아무튼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황 형사, 가끔 저렇게, 가뭄에 콩 나듯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니까. 재인은 마침내 그냥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버리기로 했다.

 

나 황 형사님이랑…… 그, 야유회 가고 싶단 말이에요. 꼴랑 둘이서 가는 게 야유회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지만…… 재인은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은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재킷을 집어 들어 툭툭 털더니 이내 그대로 사무실을 향해 발을 옮겨버릴 뿐이었다. 진짜 너무하네. 재인은 우거지상을 하곤 박하사탕을 아그작 씹어 먹었다.

"토요일."

그런데 그대로 쓱 사무실 안에 들어가 버리는가 싶던 은영이 문득 돌아서 재인을 바라보았다.

"네?"

"이번 주 토요일, 비번이라고요."

그리곤 다시 미련 없이 닫히는 문.

여름에 처음 왔을 때 그렇게 야속했던 저 지능범죄수사4팀의 문이 닫히는데도, 재인은 어쩐지 하나도 야속하지 않았다. 황 형사님! 재인은 그렇게 다시 한 번 그를 붙잡았다. 천천히 문틈으로 저를 돌아보는 은영을 향해 재인은 불쑥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꼭 가기로, 약속! 나 새끼손가락 거는 거 좋아한다니까요."

물끄러미 재인을 보던 은영이 또 피식, 코웃음을 치며 재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청에서 이게 무슨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 약속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말없이 빙긋 미소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마주 닿은 그 눈빛에 모두 담겨있었다. 재인은 가뿐한 마음으로 경찰청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청량한 박하사탕의 향이 목구멍을 시원하게 휘감았다. 요 며칠 무엇에서도 느끼지 못해 잊고 살았던 이 시원한 느낌에 재인은 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박하사탕 같은 사람. 재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경찰청을 나섰다. 제멋대로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본다.

경찰청 건물을 등지고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뒤를 돌아 은영이 있을 그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재인은 이번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겨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재인은 문득, 정말 문득,

지금 이 순간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을 두고 누군가는 '백합물'이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걸크러쉬 문학', 다른 누군가는 '워맨스물'이라고 말할것이며 어떤 사람은 '레즈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일반 대중들이 여성 퀴어 서사를 칭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얄팍한 단어들의 남용 속에서 실제 존재하는 퀴어들의 삶들은 가려지고, 가볍게 소비되어 마침내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한 대통령 후보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그에 맞서 여성 후보가 1분의 찬스 발언 시간을 할애하여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성 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이다. 저는 이성애자지만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또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다. 동성애 반대 발언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후, 토론회가 끝나고 다음날 오전까지 그 후보의 후원 계좌에는 일억 원의 후원금이 입금되었다고 한다. 일억 원이라는 돈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존재가 지워진 퀴어들의 '우리는 여기에 있다'는 외침이었다.

 

어떠한 용어가 사용될지라도 『소프트 보일드 키튼 1』은 퀴어문학이다. '백합물'도 '레즈물'도 '걸크러쉬 문학'도 '워맨스물'도 아닌, 퀴어가 등장하고 퀴어의 삶을 다룬 퀴어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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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블루 꿈꾸는돌 17
베키 앨버탤리 지음, 신소희 옮김 / 돌베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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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출[1] 소식을 들었다. 낯익은 비극이다. 나는 우리가 증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느낀다. 동시에 인간은 좀처럼 배우지 못하는 동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나치와 동시대를 살아간 유럽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도 증오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고 느꼈을까. 언뜻 나의 이야기인 듯 사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증오를 겪거나 보거나 전해 들으면서, 절망과 환멸과 안도와 망각과 기만 속에서 그럭저럭 살았을까. 지금의 나처럼 주로 멍해 하면서 생존에 집중했을까. 나보다는 덜 비겁했을까. 아우슈비츠로부터 약 70년, 그동안의 반성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다. (2017년에! 색출이라니!)

 

  어두운 말로 시작했지만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베키 앨버탤리의 <첫사랑은 블루>는 딱 봄처럼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내가 농담 삼아 ‘연애 권장 도서’라고 불렀을 만큼 두 게이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가 간지럽도록 좋다. 혐오 범죄, 아웃팅, 커밍아웃 같은 소재를 명랑하면서도 섬세하게 풀어내는 것도, ‘나 혹시 게이인가?’가 아니라 ‘나 게이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도 좋다.[2] 이 책을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표라는 키워드로 읽었다. 유표란 사회적 비주류 집단에 추가적인 기표가 붙여지는 언어학적 현상이다. 이를테면 의사, 교사, 작가 등의 기본 값(남성)에 여-의사, 여-교사, 여류-작가(여성)라는 추가 기표를 붙이는 것이다. 퀴어-문학도 유표화된 범주다.

 

  아시아인 시스젠더 유성애자 바이섹슈얼 성인 여성으로서 나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다른 정도의 유표화를 경험한다. 분명 바이섹슈얼 정체성은 아시아인 정체성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뤄진다. 많은 경우 성소수자 정체성은 말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레 삭제된다. 먼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시스-유성애-이성애자로 치부된다. 기본적으로, 성소수자들은 숨어 있다. 이 ‘보이지 않음’ 때문에 위계가 만들어진다. 색출(索出) 과정은 이 위계를 증명한다. 찾는 자는 숨은 자를 찾아내서 끄집어낸다.

 

  소설은 같은 학교의 마틴이 주인공 사이먼과 블루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봤다고 말하면서 시작된다. 첫 페이지부터 아웃팅 협박이다. 결국 사이먼은 학교의 괴롭힘과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마틴은 울면서 악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 수 있다. 그저 시스 이성애자 남성인 그는 숨겨짐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웃팅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권력이자,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미시마 유키오)이다. 이처럼 청소년들에게 특히 위험할 수 있는 아웃팅과 혐오 범죄를 다룸에도, 이 소설은 게이 정체성을 약자로서만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다만 사이먼의 말처럼, 퀴어 정체성은 “움츠러들게 되는, 동시에 너무도 드러나 있는 것 같다는 느낌.”(27쪽)을 들게 하는 양면적 억울함에 가깝다.

 

  소설이 아웃팅과 동시에 고민하고 있는 커밍아웃은, 그러면 어떤 의미일까? 일종의 전략적 유표화가 아닐까. ‘나는 너와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주류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

 

“여담이지만, 모든 사람이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생각 안 들어? 왜 이성애를 기본으로 여겨야 하지? 누구나 자신이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고 선언을 해야만 해.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거창하고 어색한 순간을 겪어 봐야 해.” (166쪽)

 

그렇다. 커밍아웃을 애초에 왜 해야 하는 걸까? 나는 퀴어 독자로서 사이먼의 억울함에 깊이 공감한다. 커밍아웃은 다분히 귀찮고도 현실적으로 위험한 과정이다. 문제는 집단 간의 위계다. 특정 집단에게만 부담이 가해진다. 나는 사이먼이 제시한 모두가 모든 정체성을 밝히는 씬scene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언을 해야만 해”는 지나치게 호기로워서 독단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다만 커밍아웃이 보다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고, 그렇게 각각의 커밍아웃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들다 보면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형태의 평등함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꼭 덧붙이고 싶은 말. 소설에서 사이먼이 색출되는 과정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사이먼이 첫사랑 상대 블루의 정체를 탐색해가는 과정이다. 두 사람은 이메일로만 연락하기 때문에 본명도 얼굴도 모른다.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사실만 알 뿐이다. 실제 현실에서 사이먼이 이런 저런 사람들을 블루로 추측하고 탐색해가는 것이 일종의 추리 소설 같은 재미를 준다. 위계에 기반한 색출과 달리 탐색은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맺음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두렵지 않다는 것(거트루드 스타인)이라는데, 퀴어 정체성의 숨겨짐을 공격하려는 세상 속에서, 사이먼과 블루는 각자의 벽을 넘어 서로에게 가 닿으려 분투한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열심히. 탐색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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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가면 - 성폭력 퀴어 생존자 이야기
노유다 지음 / 움직씨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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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조개 우물과 비슷한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이야기. 시간 속에 분명 있지만 없는 것처럼 된 이야기. 누군가는 이미 기억에서 지웠고 또 누군가는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 내가 말을 꺼내지만, 실은 많은 우리들의 이야기. 코끼리 가면 이야기는 너를 만나 시작되었다. 너는 이야기를 들어 준 첫 사람이다.  _ 본문 中

 

 

 

코끼리 가면은 목소리 소설로 소설과 다큐멘터리 그 중간 사이에  위치한 작품이다. 이야기들은 작가인 노유다 자신의 이야기이다.  작가 노유다는 실제 친족, 아동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 이 책은 그때의 아픈 기억을 일부 더듬어 간다. (참고 ; 코끼리 가면 텀블벅 페이지 : https://tumblbug.com/oomzicc) 작가가 여성 퀴어이고 그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기에 퀴어 문학에도 소개되었으나, 이야기에서 퀴어라는 것이 주된 내용을 차지하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야. 나를 이루는 여러 가지 부분 중 한 가지가 퀴어지. 라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는 나와 너가 합정에 있는 한 만두집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당시 나는 나의 애인과 함께 있었고 너는 누군지 모를 너의 일행과 함께 있었다. 먼저 알아본 사람은 나의 애인이었고 먼저 나와 그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너였다. 그날의 만남은 짧은 인사로 끝났다. 하지만 몇 개월 뒤, 나와 너는 다시금  만나게 되었다. 너와 함께 있으며 나는 이유 없는 편안함과 호감을 느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먹었던, 네가 덜어 준 만두의 온기. 며칠 뒤 나는 그 온기를 찾게 된다. 

 

며칠 뒤 나는 너의 온기를 그리워 하며 맨발로 합정 근처를 배회하게 된다. 지갑도 없었고 신발도 없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는와중에 나는 네가 덜어준 만두 만큼의 온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다 강 근처에 도착하게 된다. 왠지 네가 거기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강물 속으로 손을 뻗는다. 강물에 한 마리 코끼리의 얼굴이 비췄고 나는 그것을 보며 강이 꼭 깊은 우물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물 속에서 한 여자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들어 줘."

"뭐?"

나는 놀라 물었다.

"넌 내 얘길 안 듣잖아."

 

_ 본문 中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한다.  나를 코끼리라고 생각하고선. 그 어린 여자아이의 이름은 혜경이였고 후에 나는 알게 된다. 그 아이가 과거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 책은 지독히도 마음 아프고 또 잔인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기록하였다. 허나 작가는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을 매듭지었다. 다음은 본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우리는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탈 것이다. 다음여정에서는 나도 세렝게티 할머니 코끼리처럼 현명해질 것이다. 기억의 무게만큼 아는 것이 많으며, 함정이 있는 길은 굳이 걷지 않고, 포악한 맹수가 와도 소리를 내어 쫓아내거나 여차하면 머리로 치받을 수 있다. 경계를 벗어나 독립한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_본문 中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책은 이 구절로 끝을 맺었다. 그 말을 보는 순간 필자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낼 수 있었다. 책을 읽을 때는 벚꽃이 만발해 있던 때였고 지금은 벚꽃이 모두 다 떨어지고 푸른 싹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우리의 상처에도 다시금 잎이 필 것이다. 느리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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