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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ㅣ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을 통해 <체 게바라 평전>을 주문하고, 책이 도착할 때까지의 이틀 동안을 나는 다소 흥분된 상태로 지냈다. 80년대의 엄혹했던 시절에 조악한 복사 문건으로 처음 접했던 마음속의 영웅을, 이제 내 나이 3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러나 정작 책이 도착했을 때는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며칠을 책장 구석에 던져놓고 거들떠보지도 못했다. 아마도 두려웠던 것이리라. 20대의 젊은 나이에, 보장된 부와 안락한 삶을 박차고 불의한 세상과의 싸움에 온 몸을 던진, 오직 자신의 신념과 이상의 명령만을 따르던 사내의 삶을 마주 대하는 것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한 영웅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동안, 이미 지나가 버린 내 젊음과 고비마다 주춤거리며 물러섰던 부끄러운 과거가 모조리 떠오르고, 소시민으로 안주해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날텐데, 누군들 견딜 수 있으랴.
그리하여 책을 받은 지 보름이 더 지나서야 포장을 풀고 햇볕을 보게 된 `체 게바라'는, 읽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의 폭압을 물리치고 아바나까지 진군하였도, 4일째에는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의 밀림 속에서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는 순간까지 나아갔다.
그의 용기와 헌신적 희생과 지혜가 민중적 낙관주의와 결합하여 쿠바혁명에 성공하는 순간에 내 심장은 거세게 쿵쾅거렸고,실제로 쿠바 민중들의 환호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볼리비아에서의 최후.
생포된 이후 마지막 순간까지 적(CIA와 볼리비아 정부군)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그가 총살당하는 대목에 이르자, 내 눈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흘렀다.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을 괴롭힌 천식으로부터 벗어나서 홀가분했을까.
이 책은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토목기사인 아버지의 맏아들로 태어난 체(본명은 에르네스토)가 라틴아메리카 기층민중의 열악한 생존조건들이 제국주의와 결탁한 소수지배계층의 억압구조와 관련된 것임을 깨닫고, 이에 대항해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투쟁하던 과정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다.
지은이(장 코르미에)는 약 15년간의 방대한 자료조사와 연구, 인터뷰를 통해 그의 짧은 생애의 흔적을 사소한 부분까지도 환벽하게 재현해낸다. 덕분에 그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평가는 상당부분 바로잡히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가 TV 일일연속극 속의 주인공처럼 친근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체는 의사인 동시에 맑스주의자요, 혁명가이며, 뛰어난 게릴라전사이자 행정가였으나, 그 어느 명칭도 그를 올바로 표현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책을 읽고 나면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한사람의 박애주의자였으며, 궁극적으로 그가 남긴 메시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형제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내 아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쯤 읽히고 싶다. 왜냐하면, 내 아들의 시대에도 여전히 체가 지녔던 신념과 용기는 역사에 꼭 필요한 덕목으로 남아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