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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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다시 기자 이야기이다. 최근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참고: http://blog.naver.com/rhkdqkr0414/220158336492)은,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기레기'라는 신조어 역시 단순히 기자라는 특정 직업군을 향한 냉소와 야유가 아니다. 제대로 된 언론과 지식인을 갖지 못한 '불행한 우리' 스스로에게 짓는 씁쓸한 조소다.

 

  어쩌다 보니 기자를 여럿 알게 되었다. 개중엔 원래 친했던 친구가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경우도 있고, 이미 기자가 된 상태에서 친해진 경우도 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 그들은 생각보다 멍청하다. 과연 이 친구들에게 권력과 자본의 감시, 사회의 자정 작용 같은 엄청난 책무를 맡겨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이다. 내 주관적인 판단이라 위험하다고, 혹은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인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전의 정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는 경계하자. 내가 모든 기자들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내게는 그들의 지성 수준을 평가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만나는 기자 친구들(많아 봐야 경력 3~4년 차다)이 "차라리 입사 준비할 때가 더 똑똑했다"고 한목소리로 불평할 때는 이런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사실이다. 술 퍼마실 시간은 있으면서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술 마시는 게 정말 취재의 일환인가? 그렇게 친해진 취재원들이 하는 말 몇 마디 주 워섬기는 게 기자인가? 기자가 하는 기록이란 그저 받아쓰기에 불과한가? 당신들은 당신 스스로를 고작 그 정도에만 국한시킬 것인가?

 

  '한심한 기자들'(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기자가 없을 거라 믿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자신은 이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지나가시기를. 그리고 정말 아니시기를.) 속에서도 빛나는 기자들은 있다. 그들은 먼저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사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성역을 따로 두지 않고, 금기를 출입처로 삼아 쓰는 기사는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그런 기자야말로 진짜 기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인정하는 내용일 듯싶다.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다. 기자들이여, 책을 써라. 응? 책을 쓰라니? '무식한 기자들'(역시나 당신들과는 무관한 별칭이기를)을 '계몽'시키려면 책을 읽으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짜고짜 기자한테 책을 쓰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기자는 작가도 아닌데.

 

  꽤 오래전부터 어렴풋이나마 갖고 있던 이 생각은 최근 들어 확신이 되었다.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있는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다. 이 책은 서평의 형식으로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기자가 담론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다. 기사는 시의성을 띠어야 하지만 그 말은 곧 휘발성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혹자는 기사를 '시간이 낳는 쓰레기'라고 칭하기도 했다.)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나온 지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담론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특히 1부에서 다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3부에서 다룬 정치·사회 문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안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책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내가 애초에 이 책을 헌책방에서 집어든 이유,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란 바로 이 시대에 지식인(그리고 기자)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이 책(무엇보다 저자)에 기대 해보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에필로그_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서 지식권력의 긍정적이고 변혁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권력을 실천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역량을 넘어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니, 지식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용기를 지렛대로 삼아 비로소 성립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존의 부도덕한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비상한 용기를 냈던 지식인의 전형으로 언론인 리영희를 드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리영희의 삶은 지식과 지식인의 관계를 다른 어떤 사람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343~344쪽)

 

  에필로그를 지식인의 존재 이유를 묻는 장으로 결정했을 때, 그리고 그 장을 강준만이 쓴 리영희에 관한 책(<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개마고원, 2004.)에 관한 서평 형식으로 꾸몄을 때 저자는 다분히 자신의 의도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투영했을 것이다. 그 의도란 지식권력을 갖고 실천하는 지식인은 언론인, 즉 기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가 "'리영희라는 창문을 통한 현대사 읽기'가 이 책의 표면에 흐르는 주제라면, '리영희라는 인물을 통한 강준만 읽기'가 이 책의 이면에 담긴 주제다."(345쪽)라고 말한 것처럼 <지식의 발견> 역시 여러 담론을 통한 '고명섭 읽기'를 위해 쓰인 책이다. 리영희 선생이 그 많은 저서로 언론인에서 언론학자가 되었듯, 강준만이 왕성한 '출판저널리즘' 활동으로 언론학자에서 언론인이 되었듯(345쪽의 저자 표현을 변용함), 고명섭 기자는 기자가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역시 저술활동이다. 

 

  주로 문화부 출 판 담당 기자를 지냈던 저자와, 긴박한 사건·사고 기사를 주로 쓰는 정경사(정치·경제·사회) 기자들을 같은 처지로 볼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정경사 기자들이 매번 인문학 서적을 읽고 담론의 흐름을 꿰뚫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겨레 고나무 기자의 <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북콤마, 2013. 제목 진짜 잘 지었다. 물론 이 제목은 <미생-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를 비튼 것일 터이다.)이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저격수'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고 기자는 신문지면을 통해서도 전두환 일가의 비리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이 책은 그 끈질김의 산물이다. 때로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건 전두환이라는 문제적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증거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건기자도 이렇게 전문성을 띨 수 있다.

 

  이야기가 또 길어지고 말았다. 이제 이 글을 맺자. 기자에 대한 사회적인 실망이 크다는 건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다. 아무리 '지사적 기자'는 사라지고 '직업인 기자'만 남았다고는 해도, 여전히 기자가 사회에 해줘야 하는 몫은 크다. 기자가 자신의 역할에 자긍심을 갖고 전문성을 갖춰 나가야 한다. 기자가 제대로 기자일 수 있는 환경도 사회가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다. 기자가 언제까지나 지식인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쓰레기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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