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대륙기 2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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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말랑말랑한 판타지 로맨스를 예상했다가 내심 당황했다. 은림의 [나무대륙기]는 생각보다 장대하고 복합적인 상징과 은유를 갖춘 의미심장한 텍스트였다. 게다가 심지어 많이 어둡고 먹먹해서 로맨스의 무게는 쉬 휘발되고 다크 초콜릿처럼 깊고 짙은 풍취와 쌉싸름한 맛만 남아 여운을 증폭시켰다.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낯선 세계관과 이인종들의 배치도 다소 생경한 편이었는데, 이를 소개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예의 전통적인 컨벤션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서미’ 공주와 시녀 ‘무화’의 뒤바뀐 신분에 대한 소소한 비밀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나무대륙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거대한 비밀로 확장되는데, 캐릭터 저마다 갖고 있는 사연과 운명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고설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해내고, 세계수와 같은 한편의 신화로 완성된다. 명쾌하게 줄거리를 딱히 하나로 정리하기 힘든 다층적이고 모호한 요소를 갖고 있지만, 두 소녀의 사랑과 우애, 시기와 질투를 다루는 섬세한 심리와 풍부한 감정 묘사가 소설의 중심축을 잡고 이끌어간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현재와 과거, 화자의 시점과 의식이 혼용돼 구사되는 서사다. 다음 장을 넘겨도 이전 장의 상황이 다른 시점으로 겹쳐져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장과 장뿐만 아니라 단락 안에서도 두 여성 캐릭터들 간의 기억과 상황, 시점이 넘나들며 반복돼 독자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기는데, 이는 초반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중반을 넘겨 결말부에 이르면 비로소 그 층위가 읽히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는데, 두 인물들 간의 결속과 반발, 유사와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이런 관점과 내면의 변화를 활용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수려하면서도 까끌까끌한 문체 또한 인상적이다. 이른바 대여점 문고로서 폭발적인 수요를 자랑했던 한국형 판타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가볍고 상투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곱게 씹어 삼켜야 의미가 안에 꽃을 피우는 은림의 문장은 천천히 음미하며 받아들여야 했다. 중간 중간 화자가 모호해지며 누구의 내면인지 알기 위해 집중하게 만드는 한편, 생경한 개념과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기 위해 한 발짝 떨어뜨리게 만드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굉장히 빨리 읽는 편이라 자부했음에도 이 소설만큼은 천천히 거리 두며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아닌 ‘여자’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이야기들을 계속 해보겠다는 작가의 말처럼 험난한 여정을 겪고 가혹한 운명을 맞는, 이 소설 속의 여성 캐릭터들에 대해 작가가 설정한 부분들도 눈여겨 볼만 하다. 대다수 판타지나 로맨스 소설에서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그려지는 여성과 달리 이 소설 속에서 ‘서미’와 ‘무화’는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부딪치고 투쟁하는데, 그 방식이 서로 다르면서도 결국 유사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판타지 로맨스에서는 보기 힘들게 ‘무화’는 동녀로 홍등가에 팔려간 과거를 가지고, 왼팔을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며, 때론 남장을 통해 성정체성을 모호하게 흐리고 있으며, ‘서미’는 공주로서 입궐을 압두고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선보이고 전시되며 정경의 수작으로 흥정(?)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는다. 이보다 앞선 ‘녹옥공주’ 또한 이러한 시련과 한번 좌절된 쓰린 상처를 지녔을 거라 추측되고, ‘클로버’나 ‘아몬드’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여전히 세월이 변해도 비슷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씁쓰름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잔혹한 전설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제2인류로 살아온 여성의 억압되고 (유흥으로) 소비되며 정체된 삶을 담아내는 동시에 그와 다른 길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조금은 변화된 사회를 바라는 작가의 바램을 읽을 수 있었다.

 

아쉬운 건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된 것처럼 보이는 후반부다. 훨씬 더 나무대륙에 대한 전사와 세계수에 관한 미래를 풀어줄 수 있는 단서와 인물을 가졌음에도 서둘러 휘몰아쳤다. 오랜 기간 구상하고 담아왔던 이야기답게 가진 재료와 주제가 명확하고 장대한 세계관과 인물들도 생생했기에 풀어서 매만졌으면 어땠을까 아쉽다. 물론 지금 쓰지 못하면 영원히 못 쓸 거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품고 있는다고 이야기가 자라고 캐릭터들이 얘기해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어차피 지금 나왔어야 할 이야기였다. 여자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말하고 자유로워지고, 또 때론 다른 존재로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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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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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테러로 세상 모든 것이 멈춘다면? 혹독한 겨울 추위와 눈폭풍에 갇힌 채 전기, 난방, 수도가 끊긴 도시에서 얼마나 버텨낼 수 있는가?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받아본 책 [사이버 스톰]의 뒷장에 적힌 문구다. 우연인지 아님 예언인지 마침 책을 받은 날부터 한파가 불어닥쳤다. 심지어 서울이 (여름이긴 하지만) 남극보다 추웠다. 영하 18도. 전통적으로 추운 윗쪽 중강진, 삼지연은 영하 37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주변은 얼어붙었고, 남부지방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제주도에 3일간 고립된 사람들만 수만명이었다. 때마침 이 소설의 무대가 된 美동부에도 진짜 도시가 고립무원이 될 만큼 어마어마한 스노우질라(Snowzilla)가 불어닥쳤다. 책을 펼치기도 전부터 분위기 조성이 끝내줬던 셈이다. 너무나도 실감이 나서 몇 장 읽다 한기에 도로 덮었다. 우선 몸과 마음부터 녹이는 게 중요했다. 최대한 나갈 일을 줄이고, 미리 잡혔던 몇 건의 약속들과 소개팅까지 연기해 가며 추위를 원천봉쇄했다. 아니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엎드려 미드만 뒤졌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끝난 후라 마침 화제가 된 건 [미스터 로봇]이란 작품이었다. 사이버 테러를 감행하고자 하는 언더그라운 해커들의 사연을 다룬 드라마였다. 재밌게도 그리고나서 읽게 된 이 책엔 폭설과 강추위 같은 기상이변과 사이버 테러, 그 두 요소가 모두 섞여 있었다.

 

매튜 매서라는 생짜 신인이 자비를 들여 출판한 이 소설은 흥미로운 컨셉과 구미를 당길 만한 태그라인을 가졌음에도 블록버스터급 막장 전개나 황당할 정도의 SF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현혹하지 않는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핵전쟁이 발발하고,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거나 기상악화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는 스펙타클하고 버라이어티한 종말 소설과는 다르다. 대신 소시민들의 일상을 기반으로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묘사와 디테일한 기술적 설정을 덧붙여 진짜 있을 법한 재난과 그에 대한 공포를 전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가뜩이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만 가는데, 이 최첨단의 상징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만물의 영장이 어느날 갑자기 바보 먹통이 되어가는 현실을 아주 담백하게 그러나 처참할 정도로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이 무기력한 상황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언제고 무너질 바벨탑을 바라보던 그 시기의 인간들처럼 같은 과오를 되풀이한다. 거기에 기상이변과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 같은 현실적인 위협이 더해지며 복잡다단하게 상황이 꼬여만 가는 재난의 삼중고는 강렬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이 과정을 지극히 일반인의 시점으로 담담히 고백해가는 이야기의 밀도감은 초반엔 다소 지리하고 장황스럽지만, 중반 이후 급속도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무너져버리며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꿈틀될 급박한 생존에 대한 위협과 마주하게 되면서부턴 페이지터너로 손색없는 짜릿한 흥분과 가벼운 긴장을 안겨준다.

 

물론 단점도 없지 않다. 고립된 지역 안에 갇혀 한정된 인물들로 극적인 플롯 없이 일상적인 부분들을 나열해가는 과정들이 느슨하고 반복된다는 점이다. (편견이겠지만 데뷔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화려한 문체나 위트 있는 대사빨로 독자를 마취시키지도 못한다. 게다가 주인공 화자 시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설명하고 있기에 이 무시무시한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무리가 있고, 능력치도 주인공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산치를 준 게 아닌 전형적인 일반인 모드인지라 매력치가 심히 떨어진다. 그렇다고 주변 캐릭터들에게 울트라 사기 능력치를 부여한 것도 아니고, 실제 이웃에게서 볼 수 있을 법한 찌질하고 편협하며 변덕스러운 모습들을 과감없이 그려내고 있어 오히려 감정적인 피로도를 높혀주는 경향도 있다. 인종에 대해 편견이나 고정관념, 지역별 편차들도 고스란히 노출되고, 계급이나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나 스탠포드 감옥실험과도 유사한 분위기도 조성되는 터라 어느 정도 불편한 리얼함을 감내해야 한다. 이런 극사실적인 디테일들이 취향적인 호불호를 가져올 수 있는 것 같다. 색다른 SF, 테크로 스릴러라기보단 리얼한 관찰 카메라에 더 가까운 재난 기록물에 해당한다. 생존과 직결되는 중후반 분위기는 그 생생함으로 인해 거의 공포물에 가깝고.

 

처음 책을 받기 전에 가졌던 느낌은 사이버 테러+기상이변에 대한 컨셉 때문에 [폭로]나 [공포의 제국]을 썼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테크노 스릴러 류를 떠올렸는데, 읽고 난 후엔 그와 전혀 다른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를 떠올렸다. 맥스 브룩스의 소설이 위트있고, 사회적이며 거시적인 르포르타주에 가깝다면, 매튜 매서의 이 데뷔작은 보다 냉정하고 개인적이며 미시적인 르포르타주에 해당한다. 둘 다 종말로 치닿을 수 있는 어떤 사건에 대해 기록하지만,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보다는 진행 과정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단 점에서 극적인 플롯은 크게 중요치 않다. 단지 그 과정의 생생함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부분들이 요새 유행하는 체험형 작품에 가깝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들의 추위와 배고픔, 불신들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그들의 시선과 편견, 사상에 갇혀 세상의 정보를 해석하게 된다. 그 좁은 시야가 바로 공포이자 불안이며, 얼마나 문명이 하찮고 우스울 수 있는지 짧게나마 경험하게 해준다. 작가는 이 상황들을 설계하고 들여다보게 한 후 현재 극대화되고 있는 '스마트한 세상'에 일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과연 지금 인류의 편리가 진짜 편리와 맞닿아 있는 걸까. 한순간에 무능과 마비로 꼼짝없이 퇴보해버리고 마는 시한폭탄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때다.

 

현재 20세기 폭스사에 판권이 팔려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니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하다. 현실적이고 답답해서 그 분위기가 배가 되었던 소설과는 분명 다른 방식이 될 텐데, 그 리얼한 미덕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판 몇 개를 눌러 해킹하던 차원을 넘어 아두이노를 설치하고, 실제 리눅스와 유닉스의 네트워크 과정을 담아 진짜 같음에 놀랐던 [미스터 로봇]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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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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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인 1919년 미국.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에선 6명의 사람들이 도끼로 살해되는 잔인한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아직까지 실제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이 미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레이 셀레스틴의 데뷔작 [액스맨의 재즈]는 허구와 실제 사건을 교묘하게 섞어낸 독특한 상상력과 정교한 구성을 뽐내는 추리소설이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가늠할 수 없게 사건 배경에서부터 인물들까지 탄탄하게 교차해낸 이 소설은 건조한 문체에 생생한 배경묘사를 곁들여 마치 실제 사건을 기술해낸 범죄 논픽션을 읽는 듯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앤드류 테일러, 마이클 콕스, 스테파니 핀도프의 소설들처럼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막 발전해가는 미국을 무대로 제임스 엘로이 스타일로 건조하며 차갑게, 그리고 다층적으로 진행시키는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숨겨진 사건의 복잡하고도 추잡한 일면을 상상하고 새롭게 구상해낸다. 더욱이 인상적인 건 그가 본토박이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이라는 사실.

 

[액스맨의 재즈]는 세 명의 주인공들을 씨실과 날실로 엮듯 도끼 살인마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주된 플롯이다. 이런 이야기로 가장 대표적인 건 앞서 얘기한 제임스 엘로이의 범죄소설 걸작 [LA 컨피덴셜]을 들 수 있는데, 그와 유사한 듯 또 다르게 풀어낸다. 서로 깊은 사연들로 엮이고 상처 받고, 도움 얻는 그들과 달리 이 소설에선 마이클과 루카, 아이다 세 명의 주인공들은 거의 마주치지 않고 자신만의 단서를 찾아 도끼 살인마와 그에 얽힌 사건들을 재구성해 나간다.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도끼 연쇄 살인사건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하나의 사건이 세 명의 시점을 통해 다 다른 면모들을 들춰내고 부각시킬 수 있게 만드는 입체적인 구성을 취한다. 그래서 굉장히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작가가 뿌려주는 단서들을 재조합하기가 쉽지 않은데, 결말쯤에 이르러선 그것들의 아귀가 맞아 딱 떨어지며 사건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빅 재미’를 던진다. 초반엔 조금 산만하고 뻑뻑한 전개라 쉽게 몰입되기 어려운 점은 있지만, 중반 이후 단서들이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탄력을 받아 촘촘한 구성을 쫓아 쉬이 달려간다.

 

더욱이 주요 등장인물들 중 실제 유명인인 루이 암스트롱을 배치해 눈요기를 끄는 점도 있으며, 야만과 이성이 공존했던 100년 전의 혼돈기 상황들이 생생히 담긴 배경들과 크레올을 비롯한 美남부의 전형적인 인종차별에 대한 악습들, 미국 현대사와 범죄 기록에 대한 치밀한 고증들이 결합돼 잊을 수 없는 잔향을 남기기도 한다. 실제 미제 사건을 토대로 작가의 아이디어가 결부돼 가공의 이야기로 재탄생된 탓에 많은 독자들이 기대할 것 같은 시원스런 결말로 이어지진 않지만, 후일담에 주인공들이 루이지애나에서 시카고로 이동해 만나며 알 카포네라는 전설적인 갱과의 대결을 암시하는 엔딩은 [배트맨 비긴스]에서 조커 카드를 보여주며 속편 [다크나이트]에 주된 악당을 암시했던 것 만큼이나 소름 끼치고 기대하고 만드는 효과가 있다. 다소 유머나 활력이 부족하고, 묘사나 전개가 빽빽한 맛은 있지만, 처녀작임에도 이런 대단한 내공을 보여준 레이 셀레스틴의 솜씨는 매우 인상적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쓰던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 장면이나 구성이 매우 극적이고, 여러 단서나 맥거핀의 활용, 미장센을 강조하는 비주얼적인 묘사들도 인상적이다. 

 

무대가 음악의 고장 뉴올리언스고, 앞서 언급했던 대로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로 루이 암스트롱이 나오는 만큼, 더욱이 제목에조차 재즈가 드러나는 터라 재즈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물론 아직 대가가 되기 전의 젊은 루이가 나오고, 재즈의 인기 또한 정점에 오르기 직전이여서 직접적인 셋 리스트들을 소설 중간 중간에 살펴볼 순 없지만, 연주자로서의 고뇌라던가, 루이 암스트롱에 대한 사생활의 일면들, 재즈가 이 고장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배경으로서의 세팅이라던가, 이런 세밀한 부분들의 재미들이 소설을 읽는 내내 크게 작용한다. 따라 루이 암스트롱의 앨범을 틀어놓고 읽는 것도 상당히 독특한 풍취를 안겨준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곡은 [악의 교전]에서도 삽입돼 섬뜩한 인상을 던졌던 - 흥겹지만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맥 더 나이프 Mack the Knife’로, 무시무시한 칼잡이 맥이 돌아왔다는 가사와 (허구이긴 하지만) [액스맨의 재즈]에서의 루이의 젊은 시절 경험담과 겹쳐져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한다.

 

레이 셀레스틴이 이 작품의 후속작을 준비 중이라니, 다시 한 번, 아니 이번에야 말로 본격적으로 주인공들이 협력하며 사건과 마주하는 모습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액스맨의 재즈]는 프롤로그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시작이었다. 영국추리작가협회 존 크리시 대거상 수상이 이를 증명한다. 앞으로의 시리즈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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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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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쓴 첫번째 추리소설이라기 보단 '스티븐 킹이 바로 장르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 언제나 그랬듯 스티븐 킹은 쉽고 익숙한 재료들로 전혀 듣도 보지도 못한 자신만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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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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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책과 먼 생활을 해왔더니 문득 글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쓴 거 말고, 인터넷 기사나 댓글 말고, 실용서적 참고서적 말고, 새롭고 아주 긴 이야기가. 그런 바람을 들어주기나 한 듯 마침 기회가 돼 읽게 된 건 무지 두껍고도 이제 갓 출간된 소설이었다. [파리 대왕]의 [헝거 게임] 버전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태그라인이 붙은 이 소설의 제목은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의 장편 데뷔작이라 했다. 신선한 이야기에 목마른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달라붙어 영화화한다는 소식보다 사실 더 끌렸던 건 SF 성장담이라는 장르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니까 SF라고 부르기는 다소 민망하지만, 성장담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 이야기는 한참동안 인기를 끈 [해리포터]를 위시한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다이버전트], [메이지 러너], [섀도우 헌터] 등과 같은 영어덜트 소설 범주에 놓여있다. 아직 스무 살이 채 안 된 십대 아이들의 전광석화와 같은 그 시기의 질풍노도 투쟁과 로맨스를 담아낸 이런 소설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구성을 가지면서도 색다른 캐릭터들과 사연, 그리고 독특한 컨셉으로 변주돼 계속 찾게 만드는 마력이 숨어있다. 김용의 무협지를 끝내면 와룡생, 고룡, 양우생 등으로 넘어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의 갈증과 허기를 풀어주는 무한한 장르의 보고인 셈이다. [레드 라이징] 역시 선배들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공식과 과정을 착실히 밟아나는 모범적인 후배 역할을 해내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파리대왕]의 [헝거 게임]이라는 태그라인과 달리,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의 [화성의 프린세스]와 올슨 스콧 카드의 [엔더의 게임]이었다. 전자는 무대가 화성이라는 점에서, 또 지구에서의 자기 자신을 벗어나 화성의 새로운 이방인으로 다시 살아가는 모티브가 레드에서 골드로 변모하는 주인공 대로우의 운명과 비슷하게 느껴졌다면, 후자는 어른들을 상대로, 또 약점이 많은 하위 계급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롤이 겹쳐보였다. 물론 기관에서 모의 전쟁을 치루는 중후반부는 영락없는 [헝거 게임]과 [메이지 러너] 등의 근래 디스토피아적인 영 어덜트 소설들의 유행과 규칙을 따라가고 있지만, 신화적인 명칭과 이름,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계급과 차별적인 신분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묘미도 갖고 있다. 가장 하위 신분인 레드가 최상위 계급인 골드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가 혁명을 꿈꾼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재미를 갖는 동시에, 언제 정체가 탈로나지 않을까에서 오는 긴장과 스릴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를 도와주는 세력 중에 하나인 ‘아레스의 아들들’에 대한 호기심과 골드 세력에 대한 결말부의 강력한 떡밥 등이 얽히며 시리즈 전체에 대한 기대감과 스케일을 키우게 만든다. 무엇보다 [레드 라이징] 전체에 깔려 있는 주인공의 동기는 강력한 복수심이고, 그 복수를 이루기 위해 적의 탈을 뒤집어 써야한다는 아이러니를 감내해야 된다는 점에서 [페이스오프] 식의 딜레마를 전반에 깔아 시종일관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단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독자와 가장 거리감이 적어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쉽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가독성이 떨어지는 껄끄러운 문장들이 우선 가장 아쉽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과거형 시제와 현재형 시제를 적절히 혼용하며 감정과 배경들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반해, 거의 대부분이 현재형 시제로 진행되는 [레드 라이징]의 문장들은 낯설고 기이하다. 대략 이런 식이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진다. 나는 댄서가 준 칼 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호흡을 해 격분을 가라앉힌다. 나는 순교자가 아니다. 나는 복수가 아니다. 나는 이오의 꿈이다. 그래도 이오를 살해한 자가 고소해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투박하고 직설적인 어투의 단문들이 많아 아무래도 까끌까끌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 대로우가 가장 하위 계급의 천박하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상스러운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상위 신분인 골드가 되어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게 맞는 추측 같진 않아 보인다. 이런 생경한 화법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 분량이 700페이지에 이르니 익숙해지기엔 꽤나 넉넉한 시간이긴 하다 – 영화 시나리오를 읽듯 생생한 묘사와 박력을 느낄 수 있긴 하다. 또한 생소한 용어들에 대한 주석이라던가, 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간략하고도 친절한 소개 정도가 첨부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 라이징]은 재밌다. 뻔하고 식상한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젖는데 페이지는 야속하게 줄어만 간다. 무협지나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재미를 보장하는 성장담이 투박스럽지만 튼실하게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협지에서 하나의 무공을 획득하고 내공을 늘려갈 때마다 쾌감이 들 듯, 여기서 대로우가 동맹을 맺고 동료를 얻으며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단순한 혁명이나 반역을 넘어 복수극을 기저에 깔고, 새로운 위장 신분으로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세력과 규합해 역모를 도모해야 하는 주인공의 고독한 선택과 결단을 지켜보는 일이 꽤나 즐겁다. 살아가기에 또 변화했기에 그 속에서 다시 사랑과 우정을 마주쳐야 하는 대로우의 얄궂은 운명을 바라보는 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게 바로 독자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등장에 이전 다른 시리즈들처럼 또 후속작을 목 빼고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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