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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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제목이 맘에 들었다. [악당]. 강렬하고 효과적이며 심플하면서도 명료하게 다가온다. 이보다 더 쉽고 간략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순 없을 것이다. 야쿠마루 가쿠의 새 소설 [악당]은 제목 그대로 악당에 대한 얘기다. 하지만 악당이 그 흔한 주인공이 아니고, 악당이 참 뻔한 나쁜 놈도 아니다. 이 소설에서 악당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내 친구일수도 있고, 내 이웃일수도 있고, 내 핏줄일수도 있다. 그들은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대놓고 세계정복을 노리거나, 정의를 파괴하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찾아온 욕망에 방향을 잃고 실수를 저지른, 평범한 사람들이다. 혹은 그렇게 삐뚫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야쿠마루 가쿠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잘 파고드는 작가다. 소년범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던 데뷔작 [천사의 나이프]부터, 불법적인 범죄 모의에 가담하게 되는 [하드럭]이나, 정신감정을 통해 살인죄에서 벗어나는 [허몽],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감을 다루고 있는 이번 [악당]도 모두 통쾌한 정의 실현과 공정한 법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의 빈 틈과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화두를 던지고 일순간 고심하게 만든다. 이 사회가 과연 옳은 걸까. 내가 생각한 것이 맞는 건가. 정의는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불편하고 답답한 문제들을 건드리며 독자들을 괴롭힌다. 아니, 잠깐 잊고 있던 현실을 다시 똑바로 바라보라고 가리킨다. 쓰리고 아픈 사회의 통증이 스멀스멀 덮친다.

 

 범죄가 휩쓸고 지나간 간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 가해자는 과연 모든 죄를 참회하고 여전히 잘못을 빌며 살고 있을까. 그 피해자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새 인생을 부여 받았을까. 그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가족들은, 친구나 동료, 이웃들은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악당]은 어떤 하나의 사건보다는 그 사건 이후의 일들에 대해 주목하고 관찰해간다. 때론 먹먹하고, 때론 쓴웃음도 짓고, 때론 주먹마저 쥐게 만들 만큼 분노도 생기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던 후일담에 대해 짧게 다루며 사회에 내제되고 만연한 '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만든다. 7편의 독립된 단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연작의 형태를 통해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씁쓸함을 배가시킨다. 용서와 복수, 그 간극 사이에서 길 잃고 헤매는 잔인한 해답만이 현실의 무게감을 전달한다.
 
 "악당은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기어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마는 인간, 그게 바로 악당이라는 거다."라는 대사를 통해 악의 모호하지만 정확한 실체를 건드리는 야쿠마루 가쿠는 누구나 묻는 궁극적인 질문을 화두로 삼지만, 정확한 답을 요구하거나 제시하진 않는다. 그저 세상엔 이런 질문들이 있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냐? 혹은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되려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답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그 답을 원한다. 아마 현실의 무겁고도 추한 이면 속에 가려진 한줄기 빛과 같은 인간성만이 구원이 될 것이다. 증오로 불을 지르는 20대가 있는 한편, 사람을 살리려 소리를 지르는 20대가 있다. 그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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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더스 키퍼스 - 찾은 자가 갖는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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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따끈따끈한 새 책 [파인더스 키퍼스]가 손에 들어왔을 때, 로스스타인의 18년만의 신작을 손에 넣은 ‘모리스’의 심정을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작년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은 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뭐 물론 그래봤자 1년 남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제왕의 새 책이니까 모리스가 작중의 책 ‘러너’에 대해 애지중지하던 심정(!!)에 한껏 몰입해 아껴 읽었다. 아니 아껴 읽으려 했다. 물론 그건 불가능에 그치고 말았지만. 쉴 새 없이 넘어가는 페이지를 잡기란, 또 번개총알 같이 흘러가는 시선을 막아보기란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여자친구’들의 마음과 비슷했다. 킹의 마수에 사로 잡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끝장이었다. 마지막의 작지만 압도적인 인물들의 교차 진행에 책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책이 다 눅눅해져 있었다. [파인더스 키퍼스]를 덮었던 대다수의 독자들처럼 동그랗게 떠진 눈과 머릿속에 새겨진 의문부호(인지 충격의 느낌표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를 제거하지 못한 채 어느새 자연스레 다음 권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한탄! 미국에선 얼마 안 된 6월 초, 삼부작의 마지막인 [엔드 오브 왓치 End of Watch]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런 망할. 또 1년을 기다려야 돼?! 모리스처럼 역자님 댁으로 책 들고 찾아가야 하나.

 

[파인더스 키퍼스]는 작고 야무지다. 전반적인 세계관과 인물들을 소개, 탐색해가며 천천히 시동을 거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달리 거두절미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킹만의 장르가 뒤틀린 하드보일드를 펼쳐보였던 전작과 달리 고전적이지도, 장중한 대결을 향해 내달리지도 않는다. 대신 대단원을 향해가는 중간 기착점이자 작은 소품으로서 그 야심과 목적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등장하던 ‘소설에 대한 소설’인 동시에, 메르세데스 월드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빌 호지스와 홀리, 제롬 삼인방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오히려 극을 이끄는 건 새로운 인물들인 모리스와 피트의 대결이다. 둘은 서로 같은 공간과 취향을 공유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극과 사건에서 발버둥치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서로가 닮았음을 알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맞부딪친다. 40년의 격차를 오가며 촘촘히 직조된 그들의 불행진 삶을 벗어나기 위해 둘은 각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모리스의 비극이 지극히 개인적이었다면 피트의 비극은 현재 미국 사회구조적인 영향 하에 놓여 있다는 게 조금 다르다. 그 두 시대를 바라보며 살아온 킹은 시대가 변하며 개인에게 닥친 공포와 두려움의 무게가 어떤 건지 충분히 비교해가며 전달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전작에 언급된 메르세데스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킹은 전혀 인물들을 그 제한 속에 가둬두려 하지 않는다. 이전의 세 주인공 달리 자유스럽게 美문학사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으며 소설의 마력에 대해 설파하는 그들의 주장이 - 피가 난무하는 처절함 속에서도 -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미저리] 이후 가장 무서운 ‘문학 강도’라 할 수 있는 모리스의 집착과 광기는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를 이해하고 동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독자이기 때문이다. 피트도 그걸 알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도 닮아가게 될까 두려워하는 공포가 대결 내내를 지배한다. 재미를 독식하고 자신만이 그 가치를 알고 있다는 문화의 상대적 우월감은 이 게임의 고삐를 쥐고 있으며, 아울려 현재 정보에 눈이 먼 채 뒷담화와 가쉽에 매달리는 현재 엔터테인먼트의 세태를 짚기도 한다. 앤디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런 속됨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는 작품 내에서 가장 과격스럽게 응징(!)당하고 있다. 살짝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빌 호지스를 포함한 ‘파인더스 키퍼스’ 삼인방은 매력적인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분(?)의 영향력이 소설 내내 깔려 깔깔한 뒷맛을 남긴다. 사실 이 소설 역시 [미스터 메르세데스]처럼 플롯은 복잡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전작과 유사한 단순한 양자 대결담을 메인 기둥으로 삼았다. (이건 삼부작을 마무리 짓는 [엔드 오브 왓치]도 마찬가지일 거라 예상한다.) 전작에 비해 단서들도 쉽고 인물들이 교차돼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하나의 결말을 향해 쭉 내달리고 있다. 극적인 장면을 넘어가는 방식도 사실 상투적이다. 하지만 킹의 화술은 그 상투성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어떻게 진행될 지 뻔히 알지만 알면서도 꼼짝 못하고 당하는 오승환의 공처럼 독자들은 그 수법에 철저히 당하고 만다. 영상화된 킹의 얘기들이 대다수 재미없어지는 건 바로 그의 놀랄만한 필체가 휘발돼 버리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무나 재밌게 말 할 수 없듯, 킹이 다루는 이야기는 킹이 직접 말해야 재밌다. 그가 쓰는 제품 설명서도 아마 재밌을 거라 단언한다.

 

빌 호지스 삼부작은 어떤 식으로 마무리 될까. 일종의 ‘오두막’ 슬래셔(Slasher)로 시작해 스플래터(Splatter)로 변화한 [이블데드] 시리즈처럼 킹만의 하드보일드로 시작했던 이 이야기는 완벽한 킹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지 모른다...는 망상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그 결과는 대망의 삼부작 마지막 권인 [엔드 오브 왓치]가 오롯이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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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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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부장판사 출신의 도진기 작가가 쓴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는 [붉은 집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정신자살]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진구 시리즈"와 크로스를 시도한 [가족의 탄생]을 거쳐 상/하 2권 분량을 자랑하는 [유다의 별]까지 무려 5편이나 이어질 정도로 작가가 오랜 기간 공을 들인, 국내에선 보기 드문 본격 추리소설 시리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작품이 계속 되며 조금씩 스타일이 변하는 게 퍽 인상적인데, 본격추리물을 표방했던 [붉은 집 살인사건]과 알라바이 격파와 범죄 심리에 공을 들이는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이 트릭풀이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정신자살]에선 숙적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사이코패스 스릴러 톤을 덧입히고, [유다의 별]에선 일제강점기 때 실제로 일어났던 백백교 사건을 들고 와 현재 사건과 교묘히 결부시켜 한국형 팩션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고진 시리즈의 최신작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역시 기존 작품들과 달리 또 다른 시도를 꾀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작가 자신의 나와바리(縄張り)인 법정물이었다.

 

판사직을 내던지고 법의 테두리 안팎을 넘나들며 암약하는 변호사지만, 사무실도 없고 법정에 출석하지 않으며 오로지 뒷골목에서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 싶은 자들의 법률의뢰를 받아 자문과 해결을 해오던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드디어 다섯 편만에 법정에 데뷔하게 된 셈이다. [굿 와이프]나 [로 앤 오더], [앨리 맥빌] 등과 같은 미드나 존 그리샴으로 대표되던 법정물을 국내 실정에 가장 잘 맞게 쓸 수 있는 작가로 현직 판사만큼 잘 어울리는 직업이 또 어디 있을까. 도진기는 법정과 80년대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세 가지 이질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본격 추리와 법정 다툼이 주가 되는 법정 미스터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고진이라는 캐릭터의 특징과 소설적 재미를 위해 몇몇 부분들이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황들과 다르게 전개되는 면도 있지만,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현직 판사의 눈으로 그려낸 법정 장면들의 생동감 넘치는 디테일과 전문적인 용어들은 제법 신선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익숙하게 보았지만 정작 국내 실정과는 너무도 다른 영미권 재판 장면과 달리 그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와 판사-검사-변호사 간의 생리를 적절하게 담아낸 터치도 인상적이다.

 

배심원제도가 아직 확고히 정착되지 않은 터라 한국식 국민 참여 재판을 도입해 극적이고 설명적인 부분을 해결했으며, 80년대 학번 세대의 ‘로망’으로 잘못 비춰진 시대적인 잔인성을 담아낸 남녀 관계에 대한 접근법도 현재 남성혐오, 여성혐오가 이슈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다. 살인이 벌어진 공간 자체가 국내가 아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설정돼 트릭을 구사한 점은 전작들에 비해 조금 평범하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지엽적인 사고에 갇혀 사건을 바라본다면 놓칠 수 있는 허점을 건들고 있어 구성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다만 용의자의 수가 워낙 적고, 연쇄살인이 아닌 단 하나의 살인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에 다소 단조롭고 무난하게 느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현재와 과거의 교차, 법정과 일상의 비교, 한국과 러시아라는 공간적 특색으로 심플한 구성에 변곡점들을 부여하고 있다. 또 그간 조력자로서 왓슨 역할을 충실히 해오던 이유현 경감의 역할이 다소 줄어들고 고진의 원맨쇼가 된 점도 조금은 아쉽지만, 법정물이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본다면 딱히 이경감이 감상을 늘어놓는 부분 말고는 현실적으로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긴 하다.

 

앞으로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까. 작가의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이 쉬 변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스타일에 대한 접근법은 지금과 같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도전했으면 좋겠다. 추리 변방으로 비춰지는 한국 장르물 풍토에서 시도할 가치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하게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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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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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드리스켈의 [그레타의 일기]는 자뭇 흥미로운 설정으로 시작한다. 히틀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태인 정부가 있었고, 그녀가 히틀러의 유태인 사생아를 낳았다는 기록이 담긴 일기가 발견된다는 것.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짜라면 그 기록에 대한 관심사와 그 핏줄에 대한 관심사가 폭발적으로 쏟아질 건 자명한 사실. 일기를 발견한 우리의 주인공 게이지 하트라인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때마침 그의 주변에선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유전공학을 활용해 맹글러 박사의 야욕을 다뤄 충격을 주었던 아이라 레빈의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나 역시 나치즘의 끔찍한 미래를 세팅해 반전의 묘미를 주었던 앨런 폴섬의 [모레]처럼 이 소설 역시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세팅으로 독자들의 구미를 확 끌어 당기는데 성공한다.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동시에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이런 흥미로운 설정을 두고 게이지 하트라인이라는 전직 첩보원을 등장시켜 썩 읽을 만한 스릴러를 완성시켰다. 물론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독자들을 당황시키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우직하니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은 전직 군인 출신의 이력을 가진 작가답게 스트레이트하고 확실하다.

 

문제는 이 기가 막힌 설정을 플롯에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녹는 점이 다른 물체들을 마구 섞어놓은 것처럼 따로 따로 도는 감도 없지 않다. 히틀러가 사생아를 가졌다는 놀라운 설정임에도 주요 악당인 니키는 新나치 열혈 숭배자도 아니고, 舊나치 잔당의 후예도 아니고, 심지어 독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악질의 프랑스 갱단 두목일 뿐이다. 다른 세력으로 주인공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장 제노아 역시 프랑스인. 독일은 그저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배경으로만 활용된다. 팩션에 가까운 야사나 가상 역사의 설정이 일기에서 넌지시 암시되며 현재 유럽연합 상황과 결부된 거대한 무언가의 세력이 등장해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기대하고 상상했다면 큰 오산. 그런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착상을 비웃기나 한 것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일기를 조사해나가던 중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갱단의 우연치 않은 방해로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잃게 되고,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그동안 봉인해두었던 살상용 전투머신으로서 본성을 깨우치고 충실히 보복의 무서움을 전달하는데 혈안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그레타의 일기'는 다소 뒷전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후반부는 복수담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짙다. 가끔 일기를 들춰보며 히틀러의 색다른 모습을 언급하고, 그레타의 심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복수에 지장을 끼칠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건 이 소설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게이지 하트라인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생생한 묘사와 구축에 있다. 독일에서 오랜 기간 근무를 했던 전직 군인 출신이라는 이력이 더해져 생생한 독일에 대한 묘사와 체험이 담긴 노하우라고 해도 무방한 지식과 생동감 넘치는 전투 묘사는 피를 끓게 만드는 무언가가 숨어있다. 조금은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진행되는 복수담은 과도한 폭력 수위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복수담이라는 내용에 걸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해당하는 카타르시스와 만족감을 안긴다.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는 클링곤의 속담에 딱 해당할 것 같은 과묵하고 행동감 절정의 게이지 하트라인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가득 안은 사내다. 테스토스테론이 아프리카 축구장에서 울려퍼지는 부부젤라 소리만큼이나 마구 분출되는 그의 카리스마는 과거 80년대 하드 바디로서 인기를 끌었던 액션스타들이 나오던 첩보물 같은 매력을 담고 있다. 다소 유약하고 감성적이며 우유부단하던 소설에 질렸다면 묵묵히 결말을 향해 내딛는 [그레타의 일기]는 또 다른 대안을 안겨줄 수 있을 듯 하다.

 

표지 오른쪽 구석에 박힌 조그마한 로고로 봐선 이 작품을 필두로 다른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도 소개되지 않을까 싶은데, 리 차일드나 빈스 플린의 스릴러들처럼 알음알음 알려졌으면 싶다. 가슴 아픈 그의 과거에 대해 살짝 언급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곳을 비워둔 게이지 하트라인이란 인물이 일당백 전투력 만땅으로 다른 악당들도 시원스레 확 쓸어버릴 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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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부 2016-06-0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장을 넘기기도 전에 드러나는 형편없는 번역이 이 시리즈를 망칠것이 분명하다는 압도적 예감과 책을 던지고픈 갈등 때문에 두통이 온다는 점이 함정입니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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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사해지고 꽃내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날, 꽃그림이 아름답게 박힌 책 한권을 받았다. 그 이름하여 모리 아키마로의 [이름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술과 사랑, 수수께끼에 취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된 일상계 미스터리다. 어린 시절 아역 배우로 활동했던 사카즈키 조코가 안경을 쓰면 평범해진다는 '안경 미소녀'의 기믹을 가진 채 재수를 거쳐 들어간 도야마 대학에서 '추리'연구회에 가입한다는 것이 취하면 이치가 보인다는 '취리'연구회에 덜컥 입부하며 벌어지는 짤막한 소동극들이 기둥 얼개다. 청춘 연애 미스터리라고는 하지만 사실 미스터리라고 보기에는 다소 약한 감이 없지 않고, 그렇다고 정통 청춘 연애물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큰 밀당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간질간질하기만 한데, 이 두 요소가 적당히 균형을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게도 아주 재미지다.

 

이런 재미의 근간은 무엇보다 모리 아키마로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문체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1인칭 시점을 고수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곧이 곧대로 털어놓지 않는 츤츤(ツンツン) 요소가 주인공 사카즈키 조코의 매력치를 극대화로 끌어올린다. 평상시 냉정하고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정작 자신의 속은 잘 모르는 '안경 미소녀'의 컨벤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물론 거기에는 주인공이라는 가산점도 포함된다) 맘껏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 눈에 비치는 상대자이자 명탐정(?) 미키지마 선배도 쿨하고 쉬크한 매력이 가득한 괴짜로 그려지는데, 술과 수수께끼에는 강하지만 정작 로맨스엔 다소 순정적인 측면을 가진 반전남의 이미지도 멋지게 투영된다. 이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이 그려내는 케미가 가히 일품이며, 삐죽거리면서도 취리연구회에 (무려 너무나도 잘!!) 적응해 가는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 보는 재미가 이 소설의 매력이다. 거기에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과 같은 주변 인물들의 활약도 눈에 띄는데, 얄짤없이 그들을 조역(?)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조코의 시선을 훔쳐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피가 난무하는 끔찍한 살인이나 복잡하고 과도한 트릭으로 구성된 사건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인간사(라고 쓰고 사실은 주로 술과 엮인) 소소한 수수께끼에 주력하는 각 단편들은 상당히 아기자기하고 나름 유기적인 짜임새를 갖춘 단편들이다. 단서들도 충분히 깔려있고, 우리네 보편적인 정서로 해석하면 금방 답이 나올 사건이기도 하지만, 나름 깜찍한 반전과 이유들이 감춰져 있어 어머! 어머! 감탄사와 웃음을 연발하며 후딱 후딱 페이지가 넘어간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에 비하면 난도가 낮고, 하츠노 세이의 '하루치카 시리즈'의 특색 넘치는 소재들에 비하면 좀 얌전하다 싶기도 하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의 아기자기한 사랑 느낌도 있고, 일본 특유의 청춘 라이트 노벨스러움도 있어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읽다보면 왜 제목이 '이름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인지를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첫번째 단편에 나온다), 자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청춘들이 막 대학에 들어서며 비로소 깨달아가는 미래와 사랑(그리고 술!)에 대한 의미도 살짝 내포한 듯 하다.

 

작가인 모리 아키마로가 영화감독을 꿈꿨고, 이 소설에서 미키지마 선배 역시 감독을 꿈꾸고 있으며, 전직 여배우가 주인공인 만큼 읽다보면 만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적인 이미지도 살짝 떠오르는데, 이미 애니 시리즈로 재미를 봤던 [빙과]나 [하루치카] 그리고 오타 시오리의 [사쿠라코 씨의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처럼 애니로 만들어지거나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처럼 일드나 마츠오카 케이스케의 [만능감정사 Q]처럼 영화화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의 '검은 고양이' 시리즈와는 또 다른 재미에 방점을 찍은 이 소설은 작년에 바로 속편 [花酔いロジック 坂月蝶子の恋と酔察]이 발표됐는데, 여기선 뭔가 진척될 거 같았던 사카즈카 코조와 미키지마 선배 사이를 방해할 연적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어떤 수수께끼와 로맨스 그리고 술에 취해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들려줄 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당연히 블랙 로맨스 클럽에선 이 작품도 계약하고 번역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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