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특히 대학을 다니는 시기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가치 판단의 혼란과 사상의 갈등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방황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관념적으로만 한정되는지 아니면 행동으로까지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그 격렬함이 달라지겠지만.
기형도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마치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시 어구 하나 하나가 괴로운 나의 생각과 고민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만 감돌던 모든 관념적인 방황이 기형도의 언어를 통해서
절제된 형태로 토해내진 듯했다. 그래서 정말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그 후부터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마다 기형도를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서적', '대학시절'과 같은 시들을 통해서 나는 내 우울함을 달래곤 했다.
물론 기형도의 시들이 한결같이 음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울함은 더욱 사려 깊은 우울함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것.
그의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다 읽고 난 뒤에 그의 전집을 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전집을 읽는 데에도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언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시간은 배로 늘었지만.
전집에 실려있는 소설들은 모두 단편들인데, 가만 읽다보면 소설의 내용이 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굳이 말하자면 짧고 깊게 생각하게 하는 시와는 달리 차분하고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것이 소설이 가진 차이점이며 모든 문학적인 연원은 시와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소설에 이어서는 그가 쓴 기행문과 일기, 메모 등의 산문들이 실려있다. 짤막한 산문들의 이어짐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가진 고민, 갈등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며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여러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추상적인 시를 통해서만 그의 언어를 접하다가 구체적인 산문, 이야기를 통해서 시인을 접하다보니 그의 고민, 혹은 문제의식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시인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지고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전집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새로 산책들에 밀려 책꽂이 저 한 편에 기형도 전집을 밀어 놓았을 때도
나는 마음이 심란할 때면 언제나 기형도를 찾았다.
그의 짧은 글들을 통해서 수많은 영감들을 얻었고 책을 덮을 때면 한결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젊었고 나도 젊었기에
고민의 영역은 같을 수밖에 없는 동지라고나 할까.
많은 사람들이 기형도를 만나서 마음깊이 그를 느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