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 - 5백년,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
이수광 지음 / 일송북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시절이 하수상한 요즘들어 더욱 세상에 만만한 일은 없다고 절감하는 바이지만, 나 개인에게 있어 시대와의 불화 또한 그러하다. 일개 무부에 불과한 내가 시대와의 불화를 논하는 게 어불성설일지 모르나, 어쨌든 이 책은 조선시대 시대와의 불화를 탁월한 문장으로 표현한 명문들로 구성돼 있다. 일개 유림에 불과한 선비에서 대간, 대신, 신도, 임금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다양한 인물군상들이 시대와의 불화 혹은 조화를 타개하고 갈망하기 위해 그들은 피끓은 문장을 남겼다.   

이 책에 소개된 문장들은 마치 무당이 칼날 위에 서서 언어라는 신들림을 받아 목숨을 걸고 칼날 위에서 춤을 추며 한판 굿을 벌이듯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 문장의 밑마탕에 깔린 정서는 분노요 슬픔이고 회한과 좌절이다. 그러나 슬픔이 묻어난 문장들일지라도 탁하지 않다. 마치 한 잔의 맑은 술처럼 글쓴이는 문장을 통해 분노와 슬픔을 토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또한 그 문장으로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는 듯하다. 아니, 책 속에 글을 쓴 이들은 마치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지금 만약 당신이 슬픔과 분노에 젖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그것을 다스리라고!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 책 제목도 참 좋다. 왜 이런 제목을 지었나 싶어서 책을 한 번 더 읽어보았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랄 수 있는 것은 몇번을 되읽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두번밖에 안읽어봤지만...

영조가 손자인 어린 정조에게 임금의 도리를 묻는 내용이 나온다. 영조는 나라의 곡식을 횡령한 관리를 징벌하는 것을 두고 모든 신하들이 엄벌에 처하라고 아뢰었지만, 영조는 그 관리들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영조가 손자 정조에게 묻는다.

"......왕법은 굽혀서는 아니 되고, 국가에 저축한 곡식도 졸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십수 명의 아전들을 살려주신 것은 진실로 호생의 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구포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그 해가 가까운 인척들에게까지 미쳐야 하니, 신은 견감시킨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노나라의 임금이 부세를 더 거두려고 하자 공자의 제자들이 '백생은 풍족하게 되면 임금된 이가 어찌 풍족하지 않으리요?' 하고 도리어 세금을 적게 거두려고 하였는데, 그 생각이 어떠한가?" 세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백성이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자 제자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할아비(영조)는 틈틈이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데 민생은 오히려 군궁하니, 어떻게 하면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겠는고?"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게 도면, 저절로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가 어찌하는 것이냐?"

"응당하여야 할 부역 외에 무익한 일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백성을 때에 알맞게 부리는 일이 됩니다."

"장하다. 내가 노쇠한 나이에 이와 같이 수응한 것은 당나라 태종이 이른바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반드시 살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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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임금과 세손의 문답법이지만, 좁게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이다. 이런 식의 대화법, 즉 사회정의를 논하는 이런 식의 대화법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고사하고,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도 요즘 시대에는 이런 대의명분에 대한 논의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을 개인적으론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내게 아주 의미있는 책이다. 사람은 여러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어떤 것도 정답이라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의 저마다의 생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올바른 삶인가. 이 책을 두번 씩이나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마치 벼락처럼 내게 다가왔던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 라는 이 책의 제목처럼 나를 희생해서 이 사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야위지 않고도 천하를 살찌게 하는 보다 영악하고도 현명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천하가, 세상이 살찌거나 말거나 오직 내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나는 며칠 간을 그 질문에 시달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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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asura 2006-08-09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봤습니다. 우후힛. 근데 나한테는 좀 어려웠어요. 조선의 명문장이라서 그럴까욤? 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