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98년은 "공산당 선언"이 '선언'된 지, 꼭 150년이 되는 해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마르크스를 주제로 많은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그와 관련된 서적의 출판도 예상 밖의 성시를 이루었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던 지성의 유산이, 때아닌 유령이 되어 출몰하는 형국이었다.
  사실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추모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유형·무형의 유산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고, 그렇게 평가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는 특별히 기념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평가와 의미 부여의 기준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과거 지성사의 구성은, 곧 현재 지성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은 그래서 중요하다. 더구나 근래에 일어났던 마르크시즘에 대한 예상 밖의 호응은 150주년이라는 어중간한 기념 주기와 결부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의아한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사라진 마르크시즘이라는 거대한 성벽이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금 축조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사라진 과거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 사이의 거리로부터 생긴 애틋한 향수일 뿐인가? 아니면 현실에서 패한 사람들이 반격을 위해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인가? 혹시라도 다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과거의 모습에 대해 성찰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든, 그 대답은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실 세력은 사라졌지만, 마르크스의 사상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심화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의의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라는 시대적 배경을 밟고 나타난 이상, 그러한 배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특정한 배경을 바탕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벌린의 책은 의미를 가진다. 그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나타난 배경을 면밀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엥겔스의 말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의 고전 철학과 푸리에·프루동 등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그리고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거치며 정립된 영국의 정치경제학 등에 대한 탐색을 포함한다. 이러한 탐색을 중심으로 그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만들어진 배경을 더듬으며, 그런 배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서히 정립되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조망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기 위해 벌린이 택하는 방법은 마르크스의 생애를 따라가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탄생에서부터 청소년기, 대학 시절과 파리 거주기, 그리고 런던에서의 망명 생활과 제1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크스의 전 생애를 추적한다. 그러한 추적의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가외로 위대한 사상가의 일상적 모습을 훔쳐보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벌린에 의해 묘사되는 마르크스는 보통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도도하고 오만하며 자존심 강한, 어찌보면 지독하리만큼 이기적이고 놀라우리만치 유치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대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이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대다수를 바보 아니면 아첨꾼으로 보아 그들을 드러내놓고 의심하거나 경멸했으며, 대개의 위대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부와 완전한 복종을 좋아한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성격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혁명적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가 보여준 반혁명적 생활 모습이다. 라쌀레의 귀족적 생활 경향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마르크스 역시 부르주아적 생활 습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혁명의 와중에서도 클래식을 찾아 듣고, 자녀들에게 부르주아적인 교육을 시킨 것은 물론, 평생동안 함께 지낸 하녀 데무스에게 노동 착취와 성적 착취를 행했다는 것은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타파하고자 했던 인물이 취한 행동으로서는 부적절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심하게는 기만적인 모습으로까지 파악되기도 한다. 하지만 벌린이 주목하고자 한 것이 마르크스의 개인적 성격이나 사소한 생활 습관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가 마르크스의 지적 오만을 기술한 것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겪었던 수많은 지적 도전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마르크스의 사소한 생활 습관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오히려 웅대해 보이는 혁명가의 당대적 그늘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하기에 벌린은 마르크스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시대를 서술한 것이 된다. 벌린 자신의 지적대로 마르크스의 삶을 한 개인의 삶으로서가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에 반응하는 혁명적 사상가로서 파악했으며, 마르크스의 개인사를 통해 사회주의의 역사를 짚어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시대를 다루는 벌린의 작업은 세 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대학 시절을 중심으로 한 헤겔 철학의 탐독 과정, 프랑스 망명 생활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기본 골격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리고 영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고전적 정치경제학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헤겔 철학을 통해 마르크스가 체득한 것은 변증법적 사유라 할 수 있다. 이성적인 것만이 실재적이라는 헤겔의 명제를 토대로 현실 세계가 모순과 맹목으로 가득찬 허위라는 인식에 이름으로써, 마르크스는 모순의 지양이라는 변증법적 법칙을 자기 사유의 한 축으로 삼게 된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경제관을 정립하게 되며, 그 위에 계급 투쟁이라는 한 축을 더함으로써 혁명적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정초하게 된다. 고전 경제학의 틈새를 노리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는 계급의 역사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 곧 당대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를 철저하게 해부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거대한 사상적 구조물을 완성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벌린은 이렇게 사상적인 변화를 겪는 마르크스의 개인사를 추적하는 중간 중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자연스럽게 삽입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사상 체계를 일별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벌린의 이러한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어서,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사회주의의 역사와 연관지어 일관되게 파악하는 장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러한 벌린의 서술 방법은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르크스의 삶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이 그의 삶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파악하고 그가 겪었던 개인적인 일들과 그가 진행한 많은 사건들을 알아두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며, 때에 따라서는 필수적이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에서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특성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프루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제1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주의자들에게 보인 마르크스의 태도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르크스 사상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라쌀레에게 보인 개인적인 경멸에 방점을 찍는 순간,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영웅적 혁명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한번도 혁명을 이끈 적이 없었다. 그가 대중 선동의 중요성을 인지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에게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재주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가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엄숙함으로 마르크스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기에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적 취향에 대한 비판은 그다지 의미 있는 비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의 삶과 그가 남긴 사상을 동일한 선상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도도하고 오만하며 독단적이기까지 한 사상가 마르크스와 그가 남긴 혁명적 사상은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놓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는 이같은 오류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혁명가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을 적용해 그의 사상적 의미를 깎아 내린다든지, 혹은 혁명적 사상가라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를 해 왔던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벌린의 서술에도 그러한 잘못된 인식으로 독자를 이끌 위험이 어느 정도 내재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바라보는 벌린의 시각에는 매서움이 있다. 그것은 파시즘도 복지 국가도 예상하지 못한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함께, 마르크스의 사상 이후 그 어떤 것도 결코 이전 것과 동일한 기준에 따라 이야기될 수 없었다는 진실한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 회자되는 것 역시 마르크스의 사상이 만들어내는 전복적인 사유 과정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는 아직까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활동할 수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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