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에마논 1
츠루타 겐지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츠루타 겐지는 알 사람은 알만한 나름 알려진 일러스트레이터 겸 만화작가인데, 그의 작품들이 여태껏 잘 소개되지 않다가 작년에 드디어 그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 이 작품이 정식발매되었네요.

 

 그림을 보시면 알수 있듯이, 세세하고도 여리여리한 펜선으로 인물을 그리는데 일단 그림실력 자체도 상당하고 개성도 뚜렷해 좋은 평가를 받는 작가입니다. 또한 그림뿐 아니라 만화에서의 정적인 연출을 통해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 작가이기도 하죠.

 

 이 만화 <추억의 에마논>은 특히, 정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냅니다. 스토리도 좋지만 츠루타 겐지의 그림, 연출면의 공로가 크죠. 

어느 정도냐면, 스토리를 제하고 그림만 감상했어도 만족스러웠을 만한 만화였습니다. 그만큼 츠루타 겐지는 그림 하나하나에 성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 표현하는 장인이며, 이 책에선 특히 그랬습니다. 인물의 눈빛, 뚱한 표정, 희미하게 변하는 입꼬리 등으로 인물의 성격을 대신 설명하는. 그게 가능한 작가입니다.

 

 


 

 인류의 30억년간의 세월의 기억을 모두 담고 있는, 에마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가가 전개됩니다. 

 

 

 오직 두 사람간의 대화, 혹은 대사 없이 그림만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극히 잔잔한 책인데, 이상하게 감동이랄지 마음에 울림을 남기는 장면이 많습니다. 배경의 활용, 인물의 미묘한 표정만으로도 작가는 그 속에 많은 것을 깊이 담아낼 줄 압니다. 또한 대화와 적막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며 그림의 분위기만으로도 애틋함과 그리움을 모두 그려내죠. 

 

 츠루타 겐지 작가의 빈티지틱하고 수수하지만 표정과 눈빛을 담아낼 줄 아는 작화와, 묘하게 신비스러운 내용의 분위기가 환상적으로 잘 맞아떨어집니다. 기법상의 참신하거나 획기적인 연출은 딱히 없었지만, 연출력이 기본적으로 훌륭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유지시켜 끌고 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스토리텔링 또한 단순하지만 담백하고요. 만화의 한 컷 한 컷이 작품의 분위기를 시시각각 형성해갑니다. 모든 컷이 군더더기 없이 모두 중요하고, 이야기의 밀도가 높다는 겁니다. 

 

 오래 걸려도 30분 정도면 다 읽어내려갈 수 있는 한 권짜리 책인데도, 책을 덮으니 한 편의 영화를 봤다는 느낌이 듭니다. 만화라기보단 영화대본같은 느낌이 강해요. 책의 분위기에, 그리고 에마논이라는 인물에 우리를 순식간에 빠져들게 합니다. 수십억년 동안의 시간의 기억을 담고 있는 존재라는 설정을 참으로 감수성있게도 풀어냅니다. 

 

 


 

 

 

 이 책에 대해 또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단행본의 퀄리티. 책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느낌이 참 좋습니다. 색감도 좋고요.

 표지부터 방랑자의 냄새가 느껴지죠. 겉표지를 들춰내어 보이는 속표지도 참 예쁘고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표지의 보라색 '추억의 에마논' 폰트가 정말 멋져요. 단순하고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서체인데도 책 분위기에 어찌 이렇게 딱 맞는 느낌을 잘 살렸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특히 책꽂이에 꽂아 두었을 때 이 책은 다른 책들보다 고급스럽고 훨씬 빛을 발합니다. 뭐 저만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왼쪽이 속표지, 오른쪽이 겉표지입니다. 다 찍지는 못했지만 뒷부분에도 속표지 그림이 따로 있습니다.


 

 

 

 

 길지 않은 한 권의 만화이기 때문에 스토리는 그닥 길지도 않고 특별히 세세하게 짜여져 있지도 않습니다. 만화에서 치밀한 스토리나 다양한 인물들이 벌이는 다이나믹한 상황의 재미를 찾으시는(추구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만큼 스토리보다는, 그림과 분위기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책이니 말이죠.

 

 <추억의 에마논>은 짧지만 잔잔하고 담백한 만화를 찾으시는 분들께는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하얀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담배를 꼬나문 불량소녀. 그녀에겐 몇 시간도, 몇십 년도 그저 찰나의 시간일 뿐입니다. 30억년간의 모든 기억을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외롭고도 괴로운 길이죠. 그녀는 어떤 기억도 잊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추억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죠. 그녀를 보고 있자면 인간의 삶의 원동력은 추억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추억'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지 않나요?

 

 어떤 작품, 어떤 작가의 메시지는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제게는 <추억의 에마논>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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