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길 없는 대지 - 길 위에서 마주친 루쉰의 삶, 루쉰의 글쓰기
고미숙 외 지음 / 북드라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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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이란 단어만큼 루쉰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을까.

루쉰은 20세기 초, 중국에서 살았던 지식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힘에 맞서 자국의 오래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걸었던 길은 반전통주의나 국수주의,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절충주의 정도였다. 그러나 루쉰은 이런 상식적인 길을 걷지 않았다.

그가 걸은 길은 우리가 흔히 표상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루쉰은 희망과 절망, 과거와 미래 등 기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해체해버린다.

그래서 루쉰은 “길 없는 대지”에 선 자이며, “길 없는 길”을 걸어 간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루쉰, 길 없는 대지>는 여섯 명의 저자가 루쉰이 밝아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보며,

거기서 그의 작품과 사상, 생활을 반추한다.

그가 머물렀던 곳에 가서 그곳의 하늘과 대지를 음미하고 그의 텍스트와 다시 만난다.

그 속에서 루쉰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가 만나고, 그의 “길 없는 길”이 다시 사유되고

거기서 우리의 “길 없는 길”이 새로히 만들어 진다.

 

<루쉰, 길 없는 대지>에서 저자들이 사유하는 루쉰의 “길 없는 길”은 두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먼저 루쉰은 역사, 민중, 계몽, 혁명 등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을

벗어나서 사고했다.

루쉰에게 역사는 ‘식인’이고, 민중은 ‘아Q'다.

무엇보다 루쉰의 남다른 면은 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루쉰은 신해혁명을 경험하면서 혁명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중국의 혁명세력은 신해혁명을 일으켜서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제 국가를 새로 세웠다. 그러나 루쉰은 그러한 혁명은 ‘지옥의 통수권’을 둘러싼 투쟁에 불과함을, 그래서 거대한 판타지일 뿐임을 깨닫는다.

그런 혁명이 과연 노예의 습속에 젖어있는 아Q를 바꿀 수 있을까?

신체와 정신에 새겨진 습속을 바꾸지 않는 아Q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권력을 틀어 쥔 노예와 권력을 빼긴 노예들이 밀고 당기는 세계”일 뿐이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루쉰에게 혁명은 정치체를 바꾸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루쉰에게 혁명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모든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통절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혁명은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을 선택해서 가는 길이 아니다.

매 순간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하지?’라는 질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언제나 미완이고 현재형이며 영구적”인 혁명이다.

    

다음으로 얘기할 수 있는 루쉰의 “길 없는 길”은 그가 “현실은 늘 자신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배반당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루쉰이 마주한 현실과 일상은 너절하고 치사한, 상처받고 상처받는 폐허이며,

“지옥과 축생계를 오가는 아수라장”이다.

루쉰은 이러한 현실에서 구경꾼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 있는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루쉰은 벗들과 그리고 적들과 함께 여기서, 생활하고 싸우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붓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 마저 독살할 수 있음에 끊임없이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그러나 머뭇거리면서 걸어가며 길을 내는 자가 루쉰이다.

 

살다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 지점이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종착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어 막막함만이 몰려오는 때.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이들에게 루쉰의 “길 없는 길”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줄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이 품은 환상이 깨져서 절망하지만, 한편 상상력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속아서 절망하지만, 살아가는 것도 속이기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부셔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새로이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루쉰, 길 없는 대지>는 이런 간단치 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좌절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가야하는, 질 수 밖에 없을 때에도 싸움을 해야 하는

루쉰의 뜨거운 삶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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