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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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중요히 여기고 공부하지만, 정작 왜 중요한지를 명쾌하게 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역사가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아직 확 와닿지만은 않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말씀으로 잘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앞날을 살아 갈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살다가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한 시뮬레이션권을 쥔 것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르지요.

'옛날에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해서 잘 됐지.'

혹은,

'옛날에는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하다가 망했지.'

결국 역사라는 건, 인류가 긴 세월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남긴 오답노트인 셈 아니겠습니까.


수천년간 인류가 남긴 경험담 중에, 최악의 이야기는 단연코 '홀로코스트'일 겁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은 인류가 가장 잊고싶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입니다. 인류의 오점이자, 최악의 만행이지요.

홀로코스트를 다룬 이야기는 많습니다. 영화, 소설, 연극, 드라마, 뮤지컬....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홀로코스트를 비난하고, 이토록 오만한 잔인함이 재발하지 않을 것을 경고해 왔습니다. 마땅히 피해자들에게는 연민을, 가해자들에게는 분노를 느끼면서 말입니다.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역시 같은 상황에 놓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사뭇 다릅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아우슈비츠의 나치 약사 '카페시우스'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뜨거운 연민과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보다는, 차갑고 건조한 기술에 가깝습니다. 감정이 거세된 느낌이랄까요. 재판에 넘겨질 고소장 같습니다. 판사는 독자, 피고는 카페시우스지요.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 행 수감자들을 선별하고 각종 실험 약품을 제공한 카페시우스의 행적을 고발하는 동안, 그 차가운 시선이 서서히 독자들에게도 전염됩니다. 아우슈비츠의 실상에 대한 역겨움도 잠시,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독자는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냉담해집니다. 감정에 휩싸이면 눈가가 시리기 마련입니다. 또렷하게 바라보는 것이 낫습니다. 카페시우스도 비슷한 말을 했던가요,

"우울하고 구역질이 난다. 툭 건드리면 구토가 나올 것 같다. 처음에는. 그러다가 차츰 익숙해지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 전범재판에는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십만명을 죽인 악마의 얼굴이 어떨까?'

누군들 그 상판이 궁금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재판에 등장한 너무나도 평범한 일반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오히려 경악했지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카페시우스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그가 친절하고 활기찬, 좋은 이웃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 독약을 밀어넣던 순간 역시, 카페시우스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SS 나치들과 휴일이면 사냥을 하고 차를 마시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전범 나치들을 어떻게 평해야 할까요? '제가 무슨 죄를 저질렀죠?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제게는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습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자들을? 그리고 몇십년이 지난, 후대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역겨운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요?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조커>는 DC 히어로 유니버스의 간판 빌런인 '조커'의 기원을 설명하며, 불우한 시민 '아서 플렉'이 부패하고 잔인한 사회 속에서 점점 미쳐가 '조커'로 각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미적 성취와는 별개로, 영화 <조커>는 '사회가 범죄자를 만든다는 시선은 범죄 행위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것'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CGV 라이브톡에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만약 악이 태생적이라면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사회적인 제어장치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악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이해할 필요가 있고, 사회적인 조치 역시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모두 태생적인 사이코패스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눈뜨고 당할 뿐입니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그러나 사회적 시선과 합의, 교육, 관심을 통해서 이들을 예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여지'가 생기는 셈이지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 걸까요?' 같은 오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이토록 불쾌하고 끔찍한 역사라도 말입니다.

인류가 히틀러와 나치라는 또 다른 악마를 예방하기 위해서, 우생학이라는 오만한 판단 아래 대학살이라는 잔인한 결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 과거를 그저 과거로 남기는데에는, 불편한 마주함이 우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후대에 더 나은 유산을 남기기 위해 함께 진 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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