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길 없는 대지 - 길 위에서 마주친 루쉰의 삶, 루쉰의 글쓰기
고미숙 외 지음 / 북드라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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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우연이 꼭 우연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15년 봄 내가 공부하는 규문에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음들은 산산이 부서졌고, 믿음은 깨졌다. 나 자신을 너무 믿었고, 꼭 만큼 상대도 나를 믿어야 한다고. 나도 상대를 믿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절망으로. 믿음은 환멸로 되돌아왔다. 그때였던 것 같다. 루쉰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닥쳐' 온 것은" <루쉰, 길없는 대지 p97>

 

이 책의 저자 중 한분은 이렇게 루쉰을 읽게 되었고, 읽으면서 재차 확인했다고 한다. "내 절망은 세계와 타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 기대의 붕괴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리고 루쉰의 텍스트는 나의 우울함을 삼켰고... 그리고 이렇게 가르쳤다. 인간은 인간에게 절망하지만 그 인간이 바로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고 ."

 

내가 루쉰을 만나게 된 계기는 말 그대로 '우연히' 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같이 공부해보자고 해서 그냥 이끌려 갔던 것 같다. 루쉰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 아무것도 없이 말이다. 그게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후, '루쉰'은 문득, 그리고 불쑥 내 삶 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즐겨보던 tv 뉴스 프로 앵커 브리핑에서도, 가족과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마주할 때도 루쉰이 쏟아냈던 글과 말들이 떠오르곤 했다. 내 삶이 루쉰을 읽겠금 이끌었던 것은 아니지만 루쉰을 읽고 난 후, 내 삶은 종종 루쉰을 소환하곤 했다. 그러던 중  루쉰을 오랫동안 공부하신 선생님들이 출간한 '루쉰, 길없는 대지'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루쉰 공부를 할 때는 매주 읽어야 할 분량과 글쓰기 과제 때문에 여유를 갖고 깊이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좋아했던 루쉰의 글과 다시 만나고, 명쾌한 해석까지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중에서도 '조화석습'에 실린 몇몇 작품은 서정적이면서도 절제된 문체로 나를 사로잡았었다. 물론 이 작품들을 집필할 당시 루쉰은 3.18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당국의 수배대상이 되어 쫒기는 신세였다. '민국 이래 제일 슬픈 날'이라고 본인 스스로 명명했을 만큼 잔혹무도했던 3.18 앞에서 어떻게 이런 서정적이고 절제된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병환>과 < 판아이눙과>과 같이  뼈아픈 이야기를 어떻게 물 흘러가듯  써내려갈 수 있었을까?  나는 당시 루쉰의 상황과 작품의 서정성, 그리고 글의 내용과 문체,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책(루쉰, 길 없는 대지)에 의하면 조화석습은 '옛일'을 대하는 특별한 품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루쉰식의 과거와 마주하기라는 말이다. " 옛날의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나', 그리고 두 명의 차이를 바라보고 있는 글을 읽는 나."<루쉰, 길 없는 대지 p301> 그러므로 <조화석습> 속의 옛일들은 루쉰 자신의 옛일이지만 정작 루쉰 자신에게조차 낯선 옛일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각기 다른  루쉰을 바라보게 된다. "아침 꽂은 저녁에 줍더라도 아침 꽃은 아침의 그 꽃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고 아침에서 저녁까지의 시간들을 지나면서 더 예쁘게 혹은 흉측하게 변해 버린 꽃으로 기억해 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게 아침 꽃을 아침 꽃으로 만날 수 있어야, 비로소 지금 나는 그때의 그 일에 대해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이 책 p304>

 현실을 반영한 기억으로 과거를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 그대로를 소환하는 방식이 루쉰이 과거를 대하는 특별한 품격이라는 것이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방식, 그때 옳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아침 꽃 속의 나와 저녁의 나는 이미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르다고 보기라는 것이다.

저자는 적어도 루쉰의 과거 소환은 추억팔이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는 아침과 저녁 사이에 겪은 나의 변화, 아침에 저녁의 어둠을 저녁에 아침의 밝음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2년전 루쉰 공부를 시작할 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하지만  때로는 과거에 파묻혀 현실의 원인을 찾으며 지옥속을 헤매이기도 한다. 때론 과거를 지금의 눈으로 해석하여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되기도 '내'가 이 모든 잘못된 일의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루쉰의 조화석습이 그렇게 물 흐르듯 느껴진 이유는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이, 현실에서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까' 를 대변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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