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 디 아더스 The Others 8
에두아르도 라고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브루클린에게. 

 

브o루o클o린!

과연 그렇구나. 네 엄마 말처럼 브루~클린,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내 입 속에선 서로 다른 크기의 영롱한 비눗방울들이 음악처럼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구나. 너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이름이고 네게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당연히 너는 나를 전혀 모르겠지. 나 역시 너의 존재를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러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어? 설마.. 혹시.. 하는 기대가 생겼고 드디어 네가 스스로를 드러냈을 때 참 낯설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일었지.  


특히 네 엄마의 과거를 마주한 너의 놀라움 - 코브라가 든 상자를 열었다가 깜짝 놀라 다시 닫아버린 후의 두근거리는 심장 같다던 - 그 충격을 지켜보면서 너와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은 거고.
 

브루클린.
사랑을 해 본 적 있니? 어쩌면, 잊지 못할 치명적 사랑에 빠지기엔 아직 이른 나이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얘긴 너에게 꽤 불편할 수도 있어. 하지만 갈이 네 엄마와 처음 사랑을 나누고 난 후 묘사한 문장은 내가 읽어 본 그 어느 러브신보다도 황홀하고 사실적이고 아름다워서 여기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 순간 나는 공중에 붕 떠올랐다. 그녀의 피부에서 나오는 열기와 내 피부의 열기가 합쳐졌다. 세포와 세포, 표피와 표피마다 각기 달랐던 체온이 하나가 되었다. 그때였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내 운명이 영원히 그녀에게 매이게 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p. 169)

이건 비록 갈의 표현이긴 하지만 네 엄마도 똑같은 교감을 나눴을 거라고 확신해. 왜냐하면 이런 감정은 혼자만이 가질 수 있는 착각이 아니거든. 테크닉적인 오르가슴은 혼자서도 가능하고 그 어떤 상대와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순간, 아니 갈의 표현처럼 소위 '세포와 세포'가 만나는 듯한 벅찬 희열은 상대와의 완벽한 교감 없인 절대 일방적으로 맛볼 수 없는 거거든.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한 번쯤 그런 상대를 만난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고 그러니 어쩌면 네 엄마 나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다간 여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네 아빠를 만났잖니. 아까 편지 서두에 내가, 너의 존재가 몹시 낯설었다고 말한 거 기억하지. 그래. 네가 알다시피 네 엄마는 계속되는 유산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포기한 상태였어. 그래서 나도 네가 태어났을 거라곤 예상을 못했던 거고. 그런데 네 말처럼 나디아는 네 아빠에게서 그토록 갈구하던 안정감과 평화를 느낀 거야. 그런 게 가능하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적인 고요까지도. 안정감과 평화, 내적인 고요, 이런 모든 것들이 단순히 물질적인 무엇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브루클린 너도 알겠지.

나는 네 엄마가 시달렸던 태생적인 불안감과 무의식적인 파괴본능을 이해할 수 있어. 그건, 나디아의 경우 거듭되는 유산, 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거든. 일정한 내적 경계선을 침범하는 보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파괴본능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둘러싼 평화와 안정에 대한 기질적인 반동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들은 애써 쌓아 올린 신뢰나 애정, 관계의 탑을 어느 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너뜨려 버리지. 마치 고여 있는 썩은 물 속의 물고기처럼 그 평화와 안정감이 그들에겐 죽음처럼 숨막히거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만이 드디어 그들은 다시 도전의 의지가 생기고 관계 복구의 희망에 불타오르고 생명의 투지가 생기는 악순환인 거야. 

그 끔찍한 악몽을 끝내 줄 한 사람을 만났고 (그건 앞서 말한 갈과의 관계와는 또다른 의미의 희귀한 축복이지)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너라는 선물이 태어났으니 얘야, 브루클린, 너는 자신을 한껏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해도 된단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를 맘껏 그리워하고 사랑하렴. 사려 깊은 넌 이미 그녀의 삶을 오롯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만, 엄마의 기질을 많이 닮았다는 너, 나디아의 딸 브루클린, 언젠가는 그녀의 삶과 고통, 사랑 그리고 그녀의 '투쟁'이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것'처럼 절실하게 와닿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다. 그럼 네 속에 다른 형태로 살아 있는 나디아를 혹은 갈을, 브루클린을 느끼게 되겠지. 

뭐? 나에게도 세포가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있었냐고. 네 아빠 브루노 구비 같은 남자를 만났느냐고. 후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 엄마 나디아는 참 복도 많은 여자다. 그 모든 사랑에 더해, 한 남자의 소설에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되기까지 했잖니.

음악가가 바치는 아름다운 선율의 주인공이 되는 것, 화가의 화폭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모델이 되는 것, 작가의 창작의 원천이 되는 쓰린 사랑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 여자들이 꿈꿀 수 있는 로망이긴 하지. 하지만 때에 따라선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노망'이 되는 슬픈 경우도 있단다. 그 얘긴... 여기까지.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 브루클린

 
서울, 2011년 11월 27일

알,

당신에게도 브루클린 같은 도시가 있나요?
이처럼 많은 사연을 품고 있고 이처럼 깊은 애증이 배어 있는, 생명체 같은 도시 말예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게 브루클린은 그저 브루클린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록달록한 실뭉치가 가득 든 바구니같이 느껴져요.
에두아르도 라고가 내 마음속 회색빛 도시에 색채를 입힌 거지요.

당신도 이 소설을 읽으면 분명 반할 거예요.
당신 덕분에 알게 된 여러 가지 소설 형식이 이 안에 들어 있거든요.
소설 속의 소설, 서간체 형식,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 아닌 각각의 독립된 단편들의 병렬 배치, 그 어수선함을 나중에 크게 하나로 아우르는 끈.

올해 읽었던 쿤데라의 작품들과 내가 열광했던 라클로의 소설도 떠올랐는데
그것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헝클어져 있고, 친절하지 못한 책이었어요.
처음엔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고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중구난방 뒤섞여 보이는 거대한 털실 바구니 안에서 어느 새 내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는 거예요. 굳이 실뭉치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려는 노력도,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로 다만 각각의 색채에 빠졌을 뿐이에요.
[아마도 당신은 이런 나를 게으르다고 질책하겠지요]

어쨌든 그래서 소설은 연애 얘기도 됐다가 열애 얘기도 됐다가 지독한 이별 얘기도 됐다가 정치 얘기도 됐다가 한 사내의 기이한 죽음에 대한 얘기도 됐다가 브루클린의 역사 얘기도 됐다가 한 남자의 출생에 얽힌 비밀 얘기도 됐다가, 됐다가, 됐다가, 를 반복했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한 작가의 이야기' 아니 '두 작가의 이야기'로 귀결되고 말았지요.

 
그래요, 알.
당신이 그러한 것처럼 나 역시 한시도 당신이 작가라는 걸 잊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난 당신이 갈이기보다는 네스터이길 빌어요.
아니, 갈인 동시에 네스터이기를 빌어요.

비록 내가
당신의 나디아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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