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봉과 분홍 제복 - 세일러 문부터 헬렌 켈러까지, 여주인공의 왜곡된 성역할
사이토 미나코 지음, 권서경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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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979년 시작된 건담 TV 시리즈 최초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가 나왔다. 유의미하고 바람직한 변화다. 하지만 이처럼 소년 왕국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캐릭터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 왔을까.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는 주로 남자들 사이에 있는 여자 한 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온 ‘홍일점’이라는 용어를 바탕으로 한 ‘홍일점론’을 펼치며 일본 ‘애니메이션’과 ‘아동용 위인전’이 ‘소수’의 여성 캐릭터와 여성 위인을 표현해 온 방식을 신랄하면서도 재치 있게 비평한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 <홍일점 왕국>에서는 애니메이션, 특촬 드라마, 위인전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여성상과 이 여성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짚어간다. 2부 <붉은 용사>에서는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속 소년 왕국과 소녀 왕국에서의 여성 서사와 왜곡된 여성상을 <기동전사 건담>, <세일러 문> 등의 작품을 예로 들어 해설한다. 3부 <붉은 위인>에서는 <헬렌 켈러>, <나이팅게일> 등을 예로 들어 애니메이션 속 왜곡된 여성상이 아동 위인전 속 여성 위인을 다루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며 아동용 위인전이 여성 위인을 그리는 방식을 지적한다.

이 책은 동시대성의 측면에서 장점과 단점을 각각 지닌 텍스트이다. 1998년 출간된 원서의 역서가 ‘2020년’ 한국에 발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22년 전의 텍스트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의 애니메이션과 위인전이 22년 전보다 여성의 성역할을 그리는 방식을 개선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작품이 여성 캐릭터의 역할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여전히 작품 속에서 홍일점으로 등장하며 주로 분홍색이나 리본 등으로 표현되는 ‘여성성’을 갖춘 채 주변 인물의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뽀롱뽀롱 뽀로로>의 루피, <로보카 폴리>의 엠버가 이러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한편, 원서가 1998년 발표되었기 때문에 특정 연령대의 독자들만 알 법한 작품을 다룬다는 점, 현시대에 차차 개선되고 있는 부분을 반영하지 못하는 점 등의 아쉬움이 있다. 또, 애니메이션에 한해서는 일본 작품만 다루기에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낯설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작품 속 여성 캐릭터의 왜곡된 성역할이 문제로 언급조차 되지 않던 시절 일본에서는 이미 주류가 된 작품을 신랄하게 비평할 만큼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지난날의 한국 애니메이션과 위인전 속 우리가 놓친 여성 캐릭터와 인물의 모습을 돌아보고, 20년 이상이 흐른 지금 발표되는 애니메이션과 위인전이 어떻게, 얼마나 변화했는지 그 현주소를 짚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린 시절 소년, 소녀 애니메이션을 보며 혹은 위인전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 불편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면 이 책의 ‘다르게 보는 방법’을 통해 그 불편함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해진 여성의 역할을 그리는 작품이 점차 늘어나며 긍정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만큼, 머지않아 사이토 미나코의 홍일점론이 유효하지 않은 날, 다수의 남성과 ‘다수’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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