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37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까치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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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상징



햇님 달님에서 오누이가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과 잭과 콩나무에서 잭이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장면이 유사한 것은 단지 우연일까? 이 책의 대답은 아니다.’ 이다. 이 책의 저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인도의 신화에서부터 기독교에 이르는 넓은 분야를 분석했고, 그 결과 인류는 주술적, 종교적 분야에 있어서 비슷한 상징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중심, 시간과 영원, 결박의 신과 매듭, 조개의 상징을 통해 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모든 새로운 가치부여의 작용은 항상 이미지의 구조 자체에 의해서 조건 지어졌다.”고 말한다. 즉 모든 종교를 포함한 신화는 보편적인 상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인이 받아들이기에 약간 불쾌한 내용일 수 있으며, 저자도 이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종교서가 아니다. 차라리 이미지에 대한 논문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고로 종교적인 부분 하나하나보다는 커다란 상징의 원형을 따라가면서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커다란 상징들을 알아보자. 먼저 중심의 상징이다. “동양의 모든 도시들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산이나 나무, 기둥의 상징은 매우 널리 퍼져 있다.” 보통의 거주지는 모두 중심에 속해있다. 성역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중심은 우주 삼계(하늘, , 지옥)를 연결하는 축이 된다. 중심은 존재의 각 차원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심의 상징은 승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위에서 얘기했던 햇님 달님과 잭과 콩나무도 중심의 상징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두번째로 시간과 영원이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간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요가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요가 수행자는 우리가 사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산다는 점이다. 요가 수행자가 호흡 리듬을 통해서 우주적 대시간, 우주의 주기적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고 재생시킨다.” 시간과 영원은 인도, 특히 요가 수행자에 집중되어 있다.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인도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요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가는 시간을 초월함으로써 우주적 조건을 초월하고 이를 통해 시간을 이탈한다. 이것을 흔히 해탈이라고 한다. 지속을 정지시키고 영원한 현재에 투입시키면 번개처럼 순식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결박의 신과 매듭이다. 저자는 고대 인도의 결박의 신을 통해 매듭의 상징을 설명하고 있다. “질병이 바로 올가미이므로, 죽음은 최고의 결박인 셈이다. 질병과 죽음, 이것은 거의 전세계에 가장 대중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결박의 주술적-종교적 복합체를 구성하는 두 요소이다.” 동아줄, , 밧줄, 올가미, 그물, 낚는다, 함정 등은 모두 매듭의 상징과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또한, 매듭은 질병을 불러들이는 동시에 질병을 치유하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결박하는 행위에 존재하는 방향성이다. , 결박이라는 행위는 방향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으며 공격일 수도 방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은 조개의 상징이다. “조개껍질은 육체적 탄생을 보장하고 용이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영적 재탄생(부활)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조개는 음()을 가지고 있다. 음은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육체적 탄생과 연결되는 이미지 이다. 이렇게 탄생을 의미하는 조개에서 생겨난 진주도 이에 따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주는 여러 주술과 의술에서 사용되며 모든 중독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또 진주는 사랑과 결혼의 표상이며 풍요성을 부여하고 이상적인 사후 세계를 보장하는 호운의 원천으로서 장례 의례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물이다. “물은 잠재성의 보편적 총체를 상징한다. 물은 근원이자 원천으로서, 모든 존재 가능성의 저장소이다. 또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받쳐준다.” 물은 떠오르는이미지와 침수의 이미지 둘 다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창조해체를 의미하며 죽음재생을 모두 내포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세례는 이러한 물의 이미지를 사용한 좋은 예시이다. 세례는 상징적인 시련(=괴물과의 싸움), 죽음, 부활(=새 사람의 탄생)이라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취한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인간은 죄를 정화하고 선택 받아 신과의 유사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위와 같은 상징들을 통해 넓은 분야의 주술과 종교를 분석하고 있다. 필자는 이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어떤 방법으로 해석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이미지에 대한 논문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래서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른 사람이 쓴 서평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었다.

 

역사를 신성현현으로 변용시킨 신화가 과연 유대-크리스트교 뿐인가? 다른 곳은 정말 없는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역사적으로 신성화된 영웅들이 너무 많다. 예수도 결국 그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유대-크리스트교에서 신성현현으로 변용시킨 역사가 과연 진실로 역사인가? 아니면 역사화된 신화인가? 실제로 예수의 기적이라거나 죽었다 부활하는 사건같은 것은...솔직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봐도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역사화된 신화에 불과할 것 같다.


도제徒弟의 아지트, http://rayearth4907.blog.me/90151811998 (검색일 2013. 12. 14. 기준) 


이 글을 읽고 이 책의 맨 처음 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서문 부분에서 유럽적인 것과 비유럽적인 것을 나눈 부분이다. 저자는 실증주의, 경험주의, 이성을 유럽적인 것으로 규정하였고, 비이성, 무의식, 상징을 비유럽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를 나누는 사고와 유대-크리스트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조금 더 우월한 위치에 두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약간의 제국주의적인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약일 수도 있겠으나 유럽인이 더 이상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민족이 아니게 되었던 그 순간이라는 부분이나 일개 지방사(유대-크리스트교)가 어떻게 신의 현현 전체에 대한 모델이 될 수 있냐는 물음에 신성한 역사는 비록 외부의 관찰자가 보기에는 지방사에 불과하지만, 초시간적인 이미지를 회복시켜 완전화한다는 점에서 규범적 역사가 될 수 있다.”고 답변한 부분을 보면 이러한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저자는 문화를 열어놓는것은 이미지와 상징의 존재인 셈이다.”고 말한다. 어떤 문화이든 문화는 상징에 의해 완전하게 드러나며, 이 정신적 토대를 무시하면 문화에 관한 연구는 그저 형태적이고 역사적인 연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문화의 상대성에 관한 문장이라고 해석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신화, 종교, 문화는 서로 다르지만 처음 이러한 것들의 출발지점으로 갔을 때 모든 것들은 같은 상징의 원형에서 시작될 것이고, 결국 이러한 점은 모든 문화를 동등한 가치로 두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한 책에서 모순된 입장을 보인다는 것인가? 필자는 조셉 콘래드의 대표작 암흑의 핵심을 떠올렸다. 몇 달 전 암흑의 핵심에 대한 서평을 쓸 때 필자는 이 책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이면서도 필자 스스로는 아직도 제국주의의 신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아프리카를 정복하는 그들의 대의명분이나 이념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으나 결국은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상징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다. 각각의 신화나 종교를 단순히 지방사로 여기지 말고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완전한 의미의 비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면서도 유럽적인 것을 나누고 기독교를 상대적인 우위에 두는 것은 문화적 상대성과 제국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이유는 이 책이 나온 시대 때문일 것이다. 사실 1952년에 지어진 이 책이 제국주의의 신념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렇다면 이 책을 2013년인 지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책의 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100대 명저 중 한 권으로 선정 ― 「런던 타임스처음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문구를 봤을 때는 그저 이렇게 세계 100대 명저로 선정될 만큼 유명한 책이구나.’라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문구의 진짜 의미가 보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100대 명저 선정이라는 문구보다 2차 세계대전 이후라는 문구가 더 선명해진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 각각의 문화들은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어떤 문화는 우월한 것, 어떤 문화는 열등한 것이었고 그것은 이내 민족 전체의 우위를 나누는 것으로 커졌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의 우위를 따지는 것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과 문화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세계 100대 명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 시대야 말로 저자의 의도대로 책이 읽힐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문화적 상대성을 이해하고 있고 그에 대한 타당성도 수긍하고 있는 지금 이 책이 더 높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미지와 상징의 원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처 알지 못 했던 여러 문화에 대해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이미지와 상징에 있어 대부분의 연구를 포괄하는 책이며, 이미지와 상징의 원형 그 자체를 탐구하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자가 쓴 각 상징의 원형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는 감히 반박하거나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서평의 중점을 문화의 상대성 쪽으로 두었다.

 

이 책은 교수님의 말대로 광고나 언론 등 을 사용해야 하는 직업을 가질 사람들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단지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이미지와 상징을 알아가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더 넓은 분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에도 도움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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