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과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제발 거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백 살 넘게 살지도 모르고, 재발한다면 내년에 다시 병동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친다. 그리고 많은 결심들을 한다. 나는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 P25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관계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명확한 건 오직 시작과 끝뿐이다. 나머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다. 거기서 선명한 원인 한 가지를 찾아내겠다고 애쓰는 건 이미 먹고 있던 국수 그릇에서 처음 삼킨 면과 마지막에 삼킬 면의 시작과 끝을 찾아 이어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국제 정치에서도 그렇다. 스스로를 변치 않는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러므로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정치의 근성은 이 시대의 가장 비뚤어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당장 이기기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망친다.
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오늘 밤도 똑같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진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내일은 차를 수리해야겠다. - P64
#만약에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당신이 <라라랜드>에 무너져 내렸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라라랜드>는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만큼이나 빈 구석이 보이지 않는 영화다. 고전 뮤지컬 영화들에 대한 존경으로 점철된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선택해 옆으로 길어진 꼭 그만큼이나 더 많은 ‘봐야 할 것들‘이 기분 좋게 들어차 있다.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스코어가 끝나는 순간 고가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차들의 꼬리를 따라 끝까지 시선을 이동해보면 스크린의 마지막 한 뼘에 이르기까지 배우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몸짓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최선이 담긴 흥겨움은 반드시 전염된다. 시작부터 관객은 무장해제 당한다.
데이미언 셔젤은 잘 조율되고 통제된 영화를 만들면서도 관객이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유 또한 확보해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말이다. 진짜 재능이란 이런 것이다.
<라라랜드>는 이 영화가 1950년대가 아닌 2016년에 개봉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대적인 뮤지컬 영화로 정체성을 확실히 한다. 현실감각과 진중함, 그리고 사유의 가능성마저 모두 챙기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그들이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 버전의 ‘만약에‘가 화면을 채운다. 즐겁고 행복해보이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다. 주인공의 가정은 완전무결한 환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논리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은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시공간은 수시로 허물어져 뮤지컬 스코어와 함께 어우러진다.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다. 모든 선택의 순간 가장 최상의 결과만이 존재했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 판타지다.
그럼에도 이 아무 의미 없는 상상은 관객을 무너뜨린다. 우리 모두가 그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잔인무도함을 이기기 위해 만약에, 라고 만 번쯤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매번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아름답고 아련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그럴 리 없다는 자괴감과 행복을 빌어주는 선의가 섞여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의 힘을 빌려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를 살아간다. 라이언 고슬링의 마지막 모습처럼 말이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고 다시 건반을 치자. - P69
# 당신 인생의 일곱 가지 장면
시간을 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 - P86
#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의 전쟁
예민함은 더 많은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꼭 그만큼 공연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 P135
#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맞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신을 파괴한다.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배신과 실패를 직면하게 될 일이 반드시 생긴다. 이에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비슷한 일이 한두 번 반복되다 보면 평상시에도 자연스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결국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다양한 양태의 문제들에 있어서 단 한 가지 방식의 대응만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억울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관계없다. 그저 무조건 매사에 방어적으로만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니체가 말한 심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 P164
#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 P191
#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우리가 죽으면 똑같은 인생이 다시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시간 여행이 아니다. 평행 우주도 아니다. 완전히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그대로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고 이해한 뒤 토할 뻔했다. 우리가 과거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영원히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한 생각이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관 없다고,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삶을 사랑하라 주문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그 순간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아모르파티와 결합한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 P201
#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 ‘평온을 비는 기도‘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없다며 인내하고 받아들이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꿔야 한다며 이미 벌어진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니부어의 기도문은 구조상 이 마지막 구절을 위해 쓰인 것이나 다름없다.
니부어는 그러므로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사고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데카르트카 <방법서설>에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 했고,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이 평범한 것은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thought-defying)이라며 강조햇던 바로 그 생각-사고 말이다.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혹은 우리 편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태도만이 오직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으로 이어진다. - P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