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학 도감
쿠리하라 신이치 외 지음, 김선숙 옮김, 정석오 감역 / 성안당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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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보다 약간 이상 수준의 흩어져 있는 통계학 관련 지식들을 총집합해서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편리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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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놓아줘 - 디그니타스로 가는 4일간의 여정
에드워드 독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달의시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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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환상이 아닐까.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정말 이전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사실 정해진 운명이고, 인과율은 정해진 것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영사기 속 필름의 잔상이 아닐까.

다만, 이른 죽음을 맞는 길에 나선 인간의 결정은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얻은 자유로 세계에서의 단절을 시행하려는 아버지의 자가당착에 붙일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이 선택은 손을 맞잡은 아들들의 삶의 망을 울렁거리게 하여서 운명을 맞이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책을 덮으며, 이 파문이 꽤나 인간의 마음에 오래동안 퍼질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이 환상일지라도, 때론 기적이라는 현실로서 존재하며 간혹 감탄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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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과 발달 - 통합적 접근
Susan Goldberg 지음, 주은지 옮김 / 학지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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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비문도 존재하고, 이해없이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심지어 간단한 영단어도 다르게 옮겨져서 전체 주제를 파악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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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는가 스켑틱 SKEPTIC 22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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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COVID-19로 전 세계가 난리다. 팬데믹 상황에서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고, 그마저 그 단위가 개인으로 줄어들면 생활 방역으로 겨우 현상유지를 해내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이때 본 잡지는 과학적 사고에 관하여 언급한다. 현재의 두려움과 난관을 이겨내고 더 나은 세계를 살아가려면, 직관 따위의 '감'보다는 정확한 지식과 정보에 의거한 과학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주로, 지구에 불어닥친, 아니 정확히 하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 상황을 타개할 여러 과학적 대안점을 논한다. 면역학, 생리학, 심리학만이 아니라 음모론이나 미래학과 같은 사회 문제와 관련한 내용도 다룬다.

특별히 이 분기 SKEPTIC부터 '엣지Edge'와 기사 제휴가 되었기에 독자들은 더 풍성하게, 다양한 글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이 말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관한 몇 가지 칼럼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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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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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독자는 <국화와 칼>이 일본과 전쟁을 치르던 미국인의 입장에서 쓰였다는 점에서 독서의 관점을 매 번 새롭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미국(인)은 일본을 동양이라는 틀 안에서, 또한 전쟁에서 패한 적국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틀 안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는 말이 된다. 때문에 한국인 독자는 저자, 루스 베네딕트(이하 베네딕트)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서평을 쓰며 이러한 주관적, 독자적 관점을 제안하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핍박을 받은 쓰라린 아픔이 있으며,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과 미국 모두에게서 영향을 받아 온 근현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국과 나눈 과거사는 매우 다층적이고 심층적으로 분석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말하건대, 일본인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하는 저술이 '한국인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하고 되물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국화와 칼>은 매서운 책이기도 하다.


재차 언급하자면, 베네딕트는 미국인의 관점, 곧 서양인의 관점으로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양을 이해하려 애썼다. 놀라운 것은 중국 대륙을 발원지로 하는 충, 효, 인, 의 같은 개념들을 서양인인 베네딕트가 이해하고 매우 자세히 서술했다는 점이다. 필자는, 특별히 그것이 중국에서 시작된 본래 의미와 어떻게 다르게 발전되었고 일본 사회에 적용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지점이 탁월하다고 느꼈다. 대표적으로 그것은 일본어로 온(恩)으로 표현되며 미국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채무와 같은 것이라고 예를 든다.


이렇듯 베네딕트는 일본만의 문화를 설명하려고 자국인의 개념을 예로 들기도 했으며 중국, 태국, 인도의 사상과 불교를 비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시도에서는 한국의 전통사상과 일본의 문화가 어떠한 지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 읽어낼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는 베네딕트가 연구했던 시대적 상황(세계 2차 대전 종전 시점 근처)이 한계로 작용했을 거라고 본다. 한국이 당시 독자적인 국가로 인식되기에 부족했던 까닭이다.


수많은 독자 중 한 명의 의견으로서,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대표적 가치관을 '자리'지킴이라고 표현했다고 본다. 평등사상을 기본으로 여기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사람 관계에 존재하는 상하구조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을 것이나, 베네딕트는 상하구조를 파악하는 데서 연구를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일본인이 자신의 자리를 국가,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체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중요히 여긴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또한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그것과 관련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아시아와 세계 국가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유해야 하는지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다.


베네딕트가 주장한 두 번째 중요한 개념은 '여러' 세계에 겹쳐 살아가는 일본인 고유의 특성이었다. 여러 세계에 속한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여러 사회적 상황과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에 맞는 가치관을 따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이는 베네딕트가 본국의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일본인의 사고 구조였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이를 수치심의 문화라고 대표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현재로선 부족한 설명이지 않을까 싶다(서양인이 죄의식을 따라 움직이고, 동양인들이 수치심을 행동양식의 근거로 삼는다는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인 현대에 와서 많이 희석되지 않았나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각 상황과 관계 속에 서로 다른 '(한국인에게 익숙한 말로 하면) 예의'를 촘촘하게 쳐놓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선과 악의 대립으로 세계를 보지 않고, 다층적으로 보았다. 따라서 덕이란 악을 무찌르거나 배척하는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자신이 이 순간 따라야 하는 '예의'를 분별하고, 예의가 품은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도 버릴 각오를 부리는 용기와 힘이었다.


이러한 베네딕트의 연구 저작을 보면서 필자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의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광복 이후 미국의 문화 전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영향력 때문에 한국인 독자는 분명 의도치 않게 <국화와 칼>을 읽는 두 가지 시선을 가질 것이다. 일본의(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인의 시선에서) 이중성을 보면서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곧바로 그것을 비판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일본인 못지않게 공동체에 존재하는 상하관계를 중요히 여기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능하다. 이를 '눈치'로 번역할 수도 있을 텐데, 이것을 필자는 아시아의 공통된 문화로 봐야 할지 혹은 일본의 영향으로 봐야 할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자리'지킴과 비슷하고, 겹쳐진 '여러'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일본인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러한 현실을 보았을 때 과연 한국은 일본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일본 문화의 모순(이중성)은 상대주의로 읽힐 것이 아니라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글을 마무리하며 필자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이는 글의 도입부에서 얘기했던 지점과 맞닿아 있다. 한국인 독자는 베네딕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다만 그러려면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일본학이 필요하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자신을 이해하려는 한국학이 더욱 요청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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