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악마 새움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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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아침 미사를 마친 교구의 신도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몇몇 사람들은 울타리 근처나 흰 돌담 뒤의 오래된 보리수나무와 단풍나무 아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축일답게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다정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이 도시의 사람들은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아가 유쾌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p.1

러시아의 상징주의 작가 표도르 솔로구프의 대표작품 <찌질한 악마>.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망한 이래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 작품으로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외에는 읽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흔히 러시아 소설이라 하면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에 애를 먹는다. 하지만 이 책의 인물들을 구별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각 인물들의 특성이 자세하게 묘사된 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한다. <찌질한 악마>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었지만, 숨은 메시지를 해석하기엔 어려웠다. 단순히 시대적 상황만을 반영한 작품일까 하는 생각도 품어봤으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작품 내에 의미심장한 구절들이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곱씹어보며 결말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어려웠다. 일단 주인공 페레도노프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했고, 작품 전반적에 깔린 그로테스크함이 그 저변에 깔린 의미를 묻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가치관 자체가 나와 너무 달라 더 이입이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시대상이 빚어낸 편집증적 인물들

그날 역시 흐린 날이었다. 이따금 바람이 휘몰아치며 거리에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마치 햇빛이 들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이 구름 낀 안개 사이로 희미하고 구슬프게 빛나고 있었따. 거리는 애잔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고, 벽 안에 감추어진 가난하고 지루한 삶이 은연중에 드러나 보이는, 아무 희망도 없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누추한 집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따금 눈에 띄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것처럼, 그들을 끌어당기는 고요한 꿈속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오직 아이들만이 신의 기쁨을 지상으로 흘려보내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송수관처럼 생기 있게 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무력감이라는 괴물이 그들의 어깨 뒤에 둥지를 틀고 앉아, 어느날 갑자기 생기를 잃을 그들의 얼굴을 위협적인 눈초리로 엿보고 있었다.

p.155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비틀린 성격을 가지고 있다. 페레도노프는 말할 것도 없고, 남을 쉽게 흉보는 바르바라, 그녀의 부탁을 받고 공작부인의 편지를 조작하는 한편 순전히 흥미를 위해 소문을 내는 그루시나, 멍청한 볼로딘, 그리고 우둔한 군중의 전형을 보여주는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음습한 캐릭터들은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 같다. 작품 속에는 페레도노프가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들을 과도하게 신경쓰고, 이로 인해 신경쇠약이 왔다고 추측할 수 는 부분들이 많다.

어디에나 페레도노프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의 몇 사람은 앞으로 그에게 못된 짓을 꾸밀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는 페레도노프가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딘가를 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페레도노프는 누군가가 자기 뒤를 밟고 있고,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다멘코 아가씨를 뒷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사회주의자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그녀 본인도 사회주의자랍니다."

p.334

그때 갑자기 벽에 걸린 미츠키에비치가 페레도노프에게 눈을 찡긋했따.

'밀고를 할 수가 있어.' 페레도노프는 깜짝 놀라 초상화를 얼른 떼어 내고, 그 자리에 푸시킨의 초상화를 가져와 대신 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푸시킨은 궁정과 관련된 인물이니까 염려 없겠지!'

p.346

페레도노프의 살인은 단순히 사회상의 비극 외에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작가가 의도한 일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美를 통한 세계의 구원

책에 실린 작품해석 이야기를 간단히 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많지만) 먼저, '미를 통한 세계의 구원'이 <찌질한 악마>에 반영되어 있다는 이야기. 이것은 사샤와 류드밀라를 통해 상징화된 것 같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책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부분이다.

"그럼, 어린 장미 좋아해?" 류드밀라가 웃음을 참느라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물었다.

"좋아해요." 사샤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류드밀라가 깔깔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바보! 어린 장미를 좋아하다니. 꺾을 수도 없는데." 그녀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불가항력적으로 생겨나는 순수한 흥분은 류드밀라에게 그들 관계의 가장 중요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흥분했지만, 어리석고 타락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p.298

김나지움 남학생인 사샤는 미소년으로, 류드밀라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숙녀이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류드밀라는 종종 사샤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책 후반부에 류드밀라는 사샤를 게이샤로 분장시켜 무도회장에 보낸다. 여기서 사샤는 가장 인기있는 여성으로 뽑히는데, 광기에 휩싸인 군중이 사샤의 옷을 찢으려고 한다. 유일하게 사샤를 도와주는 인물 또한 남자 배우이다. 사샤-류드밀라-남자배우가 비정상적인 작품의 분위기와 대비되며 '미의식을 가진 인물이 집단적 광기에 휩쓸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였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타락하지 않게 돕는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예술작품은 우리 주변의 자연이나 인간사회를 끌고와 변형한 것들이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그 특별한 감정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즉 궁극적인 미의식은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쟁과 현대의 삭막함을 극복하고 인간의 가치를 되찾게 도와준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 나와 다른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내 세계로 확장하여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가 책의 감상 포인트를 잘 잡지 못했는데도 술술 읽은 걸 보면 책 자체의 매력은 충분한 것 같다. 이 번역본에서는 역자가 슬로구프와의 인터뷰 형식을 빌어 작품을 해제하기도 한다. 슬로구프의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성장기, 러시아의 상징주의 사조, 작품의 분위기 등.... 꼼꼼하게 읽었지만 내가 러시아 상징주의와 근현대사에 조예가 없어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또 이 작품에 예수와 관련한 기독교적 상징이 많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해설을 읽어도 내가 종교적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중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배경지식이 깊지 않아 디테일한 부분을 놓친 것 같아 아쉬웠던 책이다. 러시아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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