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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숀 - 나의 친애하는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임지은 지음 / 새서울 / 2023년 6월
평점 :
봉천동에서 태어나 석수동에서 유아기를 보내다가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과천으로 이사 왔다. 엄마는 공업용 도로에 트럭이 쌩쌩 지나는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기 싫었는데 우연히 친구 따라 과천에 와보고 한눈에 반해 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과천에 와서는 쭉 주공 아파트에 살았다. 처음에는 3단지였다. 15평 정도 되는 저층 아파트의 1층이었는데 창문을 넘어다니며 아파트 화단을 개인 정원처럼 썼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평수를 넓혀갔다. 결과적으로 같은 동네에서 25년 간 세 곳의 주공아파트를 경험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7년 정도는 송파구에서 살았는데 그곳에도 비슷한 아파트가 있었다. 몇몇 친구가 그곳에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아파트는 올림픽파크 포레-온 아파트로 재탄생했다.(구 둔촌주공) 우리 가족이 과천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주공 3단지 아파트도 신축 아파트로 재탄생했다. 지금 그곳에 내가 살고 있다.
과거 구소련 시절의 건축물들을 찍어 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 하고 있다. 피드들을 보자면 경험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압도된다. 릭 오웬스가 주는 직관적인 그런지함을 시대 레벨로 증폭하면 그런 느낌일까. 아무튼 그것들은 'authentic'하다. 비슷한 이유로 한국의 오래된 아파트가 멋있다. 구소련 시절의 건축물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시절과 건축물들을 만들어 냈던 생각들과 사람들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오래된 아파트도 그러하다. 성공 시대와 가족 신화는 사라졌고 아련한 노스텔지어만 남았다. 아마 나는 그 시기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살다가 점잖게 나이든 아파트들을 만나면 주변을 산책하며 시간을 되돌린다. 이 책은 그런 아파트들에 대한 책이다.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풍부한 사진과 함께 아파트 마다의 작은 역사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 식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도 40년, 50년이 지나면 책의 소재가 되고 누군가에게 아련하게 기억되겠지. 그런 생각들을 쫒아 가자면 안도감이 든다. 왜일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자면 서럽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면 서글픔이 조금은 가벼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위안도 제공 한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