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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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집어 들고 망설였다.

600쪽이 넘는 분량, 거기다 두 권. 읽어 말아.

머릿속은 시간투자대비 효용을 요리조리 재고 있었다.

첫 장을 넘겨 내려가면서, 좀 전 나름 합리적인 체하던 계산은 어디가고

책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화나고 슬펐다가, 기쁘고 가슴 벅차 코끝 찡해짐을 내내 반복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다보니 어느 새 마지막 장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승자가 있다는 건 패자도 있다는 얘기.

승자와 패자 중 어느 쪽에다 감정이입을 하냐에 따라 생각은 달라진다.

승자의 입장에 서면 칭기즈칸, 알렉산더, 나폴레옹은

영웅이고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아무 이유없이 처참히 짓밟혀 간,

이름 모를 수많은 민중의 입장에 서면 영웅이 아니라 살인마가 된다.

 

이 책은 그 패자들의 이야기.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미국 곳곳이 들끓었다.

한쪽에선 비난이, 다른 쪽에선 격려가 밀려들었다.

신대륙에 정착해 세계최강 패권국가 USA를 세운 저력,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던 이들의 민낯을 드러내 보이는 이 책이

미국인들의 심기를 사정없이 건드렸다.

감히 자랑스러운 미국역사를 비판하다니.

 

그러나 하워드 진은 처음부터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미국의 조상들이 얼마나 야비하고 야만적이었는지.

본래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내몰아 세운 나라 미국.

콜럼버스는 죽는 날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이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라 생각했다.

졸지에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인디언이 되었다.

조상대대로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들은 삶의 터전을 뺏기고

변방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미국을 세운 조상들은 다수 미국인들에겐 위대한 개척자고 정복전쟁의 승리자다.

하지만 인디언들에겐 침략자고 학살자다.

이렇게 하나의 사실을 놓고 어느 편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분노한 미국인과 격려와 고마움을 전한 미국인처럼,

이 책을 읽고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서로 다른 감정이입을 한 결과다.

 

만약 누군가 김구 선생님과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고

유관순 열사는 여자깡패였다고 말한다면,

대다수 한국 사람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낄 거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사실과 배치되는, 이런 말이 감정을 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단체가 실제로 있다.

뉴라이트(New Right)라는 단체다. 뉴라이트는 신우파란 뜻.

이들은 아마 피해자인 한국보다 침략자고 가해자인 일본에다 감정이입을 했나보다.

 

하워드 진은 역사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았다.

반인종차별과 반전운동으로 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종신교수 지위도 박탈당하게 된다.

노암 촘스키와 함께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며 시민불복종운동을 이끌어냈고

미국 여러 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강연을 위해 들른 어느 고교에서, 한 여학생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따지듯 묻는다.

그럼 선생님은 왜 이 나라에 사시나요?”

그러자 하워드 진은

내가 사랑하는 건 내 조국이지, 어쩌다 권력을 잡게 된 정권이 아닙니다.”

라고 답한다.

 

하워드 진은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가 아니라

힘없는 보통사람들의 편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누군가는 권력자의 위대함에 찬사를 보내지만

어떤 이는 피라미드를 위해 다치고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을 떠올린다.

세계최강 미국은 평범한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의 토대위에 세워졌고

미국의 오늘도 그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민중의 희생에 비해 권리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민중의 요구는 참 소박해 보이지만,

그걸 얻어내기까지 너무도 큰 대가를 치러야했고 인내해야했다.

 

남의 나라 민중의 역사를 보고 있지만 낯설지가 않다. 참 많이도 닮았다.

지금까지 민중의 역사는 실패와 좌절을 더 많이 맛본 역사였다.

그러나 그 어떤 힘도 끝내 좌절시킬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민중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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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너만 없었다면 - 나를 힘들게 하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
프랑수아 를로르.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최고나 옮김 / 책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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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힘들게 하는 사람들,

살다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 별로 마주칠 일 없다면야 까짓 거,

무시하거나 성질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어쩔 수 없이, 자주 부대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참는데도 한계가 있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러고 싶다는 희망사항이지

누구나 언제든 그렇단 얘긴 아닌 거 같다.

솔까, 우린 본래 다분히 감정적이지 않나?

대개는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지만,

감정을 절제하며 살려고 노력할 뿐이지.

 

우릴 피곤하게 하는 별난 성격들 땜에

스트레스 받거나 감정이 상하곤 할 때가 있다,

성질급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받은 거에 더 얹어 곧장 되돌려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차마 면전에서 같이 부딪치긴 좀 뭐하고

뒤에서 자기만의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한다.

이마저도 못하는 착한 사람이라면,

혼자 속으로 끙끙 앓을 수도 있고.

 

이 책에선, 우리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힘든 성격11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 사람성격을

이 범주에 묶는다는 게 좀 무리긴 하지만.

 

남들이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런 성격들은 어떻게 생긴 걸까?

유전인가, 환경 때문인가.

그리고 이런 성격은 변하지 않는 걸까?

우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어쨋거나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하니까.

 

우릴 힘들게 하는 성격들이라고 했지만,

반대로 내가 혹, 여기 중 어디에 해당하지는 않는지,

나 땜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진 않는지

한번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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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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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이라...

제목을 첨 봤을 때, 왠지 모를 이 불편함 느낌.

복종이란 말자체도 좀 거북한 데 자발적이라니.

 

사람은 스스로 누군가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며,

복종을 강요당해 불가피하게 받아들일지라도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될 거다.

때문에, 어떻게든 이 굴종의 상태를 벗어나려할 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다니, 무슨 소리.

하지만, 라 보에시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기었다고 한다.

마치, 첨엔 푸른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던 말이었으나

어느 새 길들여져 얌전해진 마구간의 말처럼.

 

그럼, 왜 우린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라 보에시는 습관과 자유에 대한 망각때문이라고.

인간은 원래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자유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애초에 자유란 없었던 것처럼.

첨에는 강요된 힘 앞에 눌려 굴종하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면 순응하게 된다.

이렇게, 앞선 세대를 이은 다음세대들은 현실의 종속관계를

세상의 순리라 받아들인다.

 

라 보에시는 권력자를 향한 복종을 불길로 날아드는 나방에 비유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화려함에 취해, 스스로 날아들어 죽음을 맞는 불나방처럼,

처음엔 두려웠으나 어느 새 동경의 대상이 돼버린 권력자를 향해

자유라는 땔감을 안고 그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복종을 감행한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스스로 사그라들어 초라한 한줌 재로 남을 것을.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떠오른 글 하나, 인터넷에서 우연히 봤던.

우리에게 <홍길동전>으로 알려진 허균이 쓴 글 <호민론>.

이 글에서 허균은 조선시대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눴다.

 

먼저, 항민(恒民)이다.

이들은 체념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억압받고 착취당해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아니, 당연한 거라 생각하기에 억압과 착취라는 인식마저 못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저 나와 내 가족 삼시세끼 먹고 살면 다행이지.

 

다음으로 원민(怨民)이다.

이 자들은 세상과 권력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

기대한 만큼 얻는 게 없을 때 뒤에서 투덜거리고 욕을 해댄다.

그러다가 떡고물이라도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권력자를 열렬히 지지한다.

남이야 무슨 부당한 일을 당하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내게만 이익이고 나만 성공하면 그만이다.

 

마지막은 호민(豪民)이다.

이들은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는 걸 직감한다.

잘못을 바로잡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소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앞장선다.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나는 어디쯤 속할까?

 

허균은 말한다.

항민과 원민은 지배계층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부류라고.

그들이 정말 두려워해야할 사람들은 바로 호민이라는 거다.

세상엔 언제나 다수의 항민과 원민, 그리고 소수의 호민이 존재했으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항상 이 소수의 호민이었다고.

그때도 무임승차가 많았나보다.

 

허균은 이 글에서 권력층을 향해,

권력의 유한함을 깨닫고 이 호민들이 행동에 나서기 전에

정치 똑바로 하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동시에, 지배계층의 부패를 막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백성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깨어있는 백성, 즉 호민의 현대판 버전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쯤 될 것 같다.

 

라 보에시와 허균. 두 사람은 16세기에 태어났다.

동시대를 살다갔지만, 프랑스와 조선이라는 공간적 거리가 말해주듯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을 이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이 400여 년 전, 그 서슬 퍼런 왕조시대에

이런 발칙한 발상을 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선각자란 말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생긴 말인가 보다.

 

라 보에시와 허균의 글을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좋은 글을 남겨준 그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블로그에 좋은 글을자발적으로 올려 남들이 볼 수 있게 해준,

어느 이름 모를 불로거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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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
하승수 지음 / 한티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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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한테 가장 평등하게 주어지는 건,

아마도 시간이겠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하지만 어디에 얼마나 시간을 쓸 건지, 내가 결정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선 생존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일해야 하고

일하려면 시간을 써야한다. 시간은 돈이고 돈은 곧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돈과 바꿔야한다는 얘기.

이 조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간과 돈과 생존의 의미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영화.

앤드류 니콜 감독의 <인타임>.

영화 속 세상에선 돈 자체가 없다. 시간이 돈의 역할을 대신한다.

노동의 대가로 시간을 받는다.

생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을 벌려면 일해야하고 

일하려면 시간을 써야한다

생존에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면 타임은행에서 시간을 빌린다.

개인이 소유한 시간은 증여와 상속도 가능하다. 돈을 시간으로 대체한 설정만

다를 뿐, 여기까진 실제 자본주의 작동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팔에 타임칩을 이식한다.

25세가 될 때가진 현실세계와 같이 시간이 저절로 주어진다.

하지만 25세가 되면 타임칩이 작동하고 여기 표시된 시간만큼 생존할 수 있다.

남은 시간이 제로가 되는 순간, 생명은 멈추고

생명을 연장하려면 노동으로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이제 시간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재벌회장처럼, 부유층이 소유한 시간은 거의 무한대.

스스로 뻘짓만 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멈출 걱정은 없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겐 분배받은 시간이 얼마 안 된다.

임금은 자꾸 깎이고 은행이자도 높아만 간다.

 

하루 노동하고 번 시간으로 필요한 걸 사서 집에 돌아온다.

요리하고 씻고 자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타임칩의 시간은 무심히 흘러 생존시간은 얼마 남아있지 않고

시간을 벌기위해 직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일을 시작하기 전, 모닝커피 한잔 주문하고 결재단말기에 자기 팔을 갖다 대면,

결재된 시간만큼 생존시간도 빠져나간다.

 

만약 영화의 설정을 현재 대한민국에 적용한다면?

법정 최저시급이 6030원이니까 스타벅스 커피한잔 마시려면

자기 생존시간 중 1시간을 지불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점심으로 빅맥세트 하나 먹으려면 1시간이상 지출할 수도.

저녁때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기위해선 또 몇 시간이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본소득제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다가 나온 하나의 아이디어.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도 15년 가까이 돼가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겐 생소한 개념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즈음, 다음 아고라 토론게시판에서 

기본소득제로 뜨거운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지만

사이버공간에서만 시끌벅적할 뿐,온라인 밖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했다.

 

간단히 말해, 기본소득제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매월 일정액을 

통장으로 쏴주는 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지만 일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주는 건 아니다.

과도한 노동시간을 줄이고 삶의 질을 위해 쓸 시간을 더 갖게 해주자는 거.

또 소비를 촉진시켜 경기활성을 유도할 목적도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실제 시행되려면 넘어야할 산들이 있다.

당장, 놀고먹는 놈에게 왜 돈을 주냐는 반발.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는 말이 있다.

어느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멈춰 설 수 있다는.

둘 다 중요하지만 소비가 더 중요하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게 현실.

일하는 나보다 소비하는 나가 더 대우받는 사회다.

돈을 펑펑 쓰는 놈이 더 힘주고 다니는.

하는 일 없이 부모 돈으로 놀고먹는 놈도, 자본주의 체제에선 중요한 한축을

담당하는 쓸모 있는놈인 셈.

 

갓난아기는 생산활동은 못해도 소비로 경제에 큰 기여를 한다.

출산에서 보육까지 병원과 산후조리원, 분유와 유아용품, 돌잔치, 그림책 같은 

관련업종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덕분에 밥먹고 산다.

하루 종일 PC방에 죽치고 있는 백수도 PC방 사장과 중국집 사장에겐 중요한 고객

전국의 백수들은 이 나라 경제에 나름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다.

 

현재 인류가 필요한 모든 걸 생산하는 데, 전세계 인구의 1/4이면 충분하다고.

나머지 3/4은 없어도 그만, 잉여노동력이다. 그만큼 기술이 발달했다는 얘기.

실업난을 해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더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없는 데,

무턱대고 일자리만 늘릴 수도 없지 않나. 일하는 시간을 나누는 게 더 빠를지도.

필요없는 노동력이라고 그냥 다 죽으라할 순 없으니까.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게 기본소득제다.

물론 재원마련부터 적정지급액까지 세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지만.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브라질까지 이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얼마전 전국 최초로 성남시에서 시행에 들어간 청년배당제도 변형된 기본소득제

지금은 실험단계지만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건, 그리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기본소득제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될 날이

올 거란 거. 그때를 위해서도 이 책은 유용하다.

찬성이든 반대든 기본 개념은 장착해놓고 대하면 판단이 더 쉬워질 테니까.


오래전, CF에 추리닝차림의 백수가 등장한다.

지하철 안이건 어디건 간에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킨다. 실제로 저러면 밉상.

보는 나도 너무한 거 아냐?’ 싶다. 근데 이 백수가 반박하듯 하는 말.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딨니!”

 

왠지 이 말을 믿어보고 싶다.

지금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

창조적 상상력으로 간절히 원하면 혹시 아나? 우주가 도와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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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숫자의 교묘한 거짓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박지훈 옮김 / 더좋은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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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일 찜통이다. 이럴 때 쫌 시원하게 지내자고 설치한 걸 텐데,

이름값도 못한 채 거실과 벽 한켠을 장식하고 있는 에어컨.

내가 그의 전원을 켜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버튼을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가전이 되었다.

젠장, 이 무더위에도 보통가정집은 대개, 맘 놓고 켜지도 못할 듯싶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전기세폭탄 땜에.

 

전기요금 누진제가 연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70년대에 누진제를 도입할 땐, 서민들보단 부자들이 전기를 더 많이 쓰니

부유층 전기사용을 억제하고, 기업에겐 전기를 싸게 공급해줘

경쟁력을 키운다는 목적도 있었다지만, 글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아직도 그때 논리를 들이대며

40년도 넘어 유통기한 지난 누진제를 계속 유지하겠단 건,

시대착오적이거나 빤히 속보이는 짓일 뿐이다.

 

요즘처럼 전기사용량이 급증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게 전력위기다.

전력예비율이 위험해져 대규모 정전사태, 블랙아웃이 일어날 수 있으니

국민 니들 전기 좀 아껴 쓰라는 소리.

우리 국민1인당 전기소비량이 선진국보다 더 높네 어쩌네 하면서.

정부가 한마디 하면 언론이 열심히 받아쓰고 나발을 불어대곤 한다.

이 주장에 쐐기라도 박으려는 듯, 전문가 인터뷰도 살짝 곁들여주시고.

이 때 근거로 내미는 게 바로 숫자, 이런저런 통계수치들.

 

사실 숫자란 게, 신뢰감을 갖게 하는 묘한 힘이 있긴 하다.

구체적 수치를 들이대며, 니들이 분에 넘치도록 너무 헤프게 쓴다고 하니

진짜 그런 거 같고 왠지 손가락질 받을 짓이라도 한 거 같다.

설마 전문가가 없는 소리야 하겠어.

통계수치 자체는 팩트일 거다. 물론 조작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숫자가 주는 신뢰감 뒤에 왜곡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게 함정.

원하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적당히 마사지하고 해석한 그럴듯한 수치에

그만 깜박 넘어가 설득당하기 십상이다.

 

국민1인당 전력소비량이란 게, 전체소비량에다 인구수를 1/n로 나눈 평균값.

국가 전기소비량을 1인당으로 통계를 내면, 소비주체가 개인이 돼버린다.

기업이 쓴 전기도 개인사용량으로 전가되니 1인당 수치가 올라갈 수밖에.

전력위기 주범이 개인들인 거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나게 한다.

 

하지만 실상은 기업 전기사용량이 55%, 가정용은 13%에 불과하다.

울나라 가정집은 OECD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선진국의 1/3수준.

근데도 가정용에만 누진제를 적용해, 실제계산에선 40배 넘는 요금도 가능하다.

기업용은 시간과 계절별로 깎아주기까지 하면서.

지난 3년 동안 20대 기업한테 퍼준 전기료가 3조원 넘고, 삼성전자 하나에만

4천억이 넘는 혜택을 줬다. 결국 가정용에 누진세폭탄 때려 폭리를 취한 돈으로

기업용 전기요금 대신 내준 꼴, 50년 가까이나.

 

누진제 땜에 냉난방도 아끼며 사는 개인들 입장에선, 전기세폭탄도 열받는데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쓴, 이 무슨 골때리는 경우인지.

이건 마치, 국민1인당 소득이 곧 3만달러 돌파한다고 호들갑 떨면서

이 평균수치에 못 미치는 개인들을 향해, 니가 무능하고 게으른 탓이라고

뒤집어씌우는 것과 비슷하다할까.

3만달러면 4인가구 연소득이 1억을 훌쩍 넘는단 소린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소리다. 기업이 벌어들인 총수입이 늘었다고 해서

모든 개인들 소득으로까지 이전되는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푹푹찌는 날씨 땜에 열받는데, 교묘한 수치장난이나 해대며

전기 아껴쓰라고 하니 더 빡친다.

 

요즘 웬만한 가정집에서 쓰는 가전제품이 옛날보단 훨씬 많아졌다.

초등생들도 휴대폰 하나씩 들고 다니는 세상인데.

보통사람들이 전기를 사용하는 건, 생존과 생활에 필요해서지

사치를 과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전기사용량이란 게, 아무래도 식구가 많을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나.

1인가구가 아니고서야 1단계를 넘지 않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단 얘기.

부자들보다 전기를 더 적게 쓴다 해도, 서민들이 실제 느끼는

전기요금에 대한 부담감은 더 클 수 있다.

생계비 중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엥겔계수처럼.

 

도 닦는 수도승이나 길거리 노숙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만 같은

금욕적 생활을 강요하는 나라.

이걸 견뎌내지 못하고 1단계를 초과하는 전기를 쓴 헤프디 헤픈 가정에

징벌적 누진제로 단죄하는 대한민국만의 도덕적 요금체계에서 살아가려면,

보통사람들에겐 보통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범한 능력이 요구된다.

 

그 옛날, 천장에 매달아놓은 굴비를 바라만 봐도 혀를 자극하는

짠맛의 느낌만으로 밥 한그릇은 걍 뚝딱 해치웠다는 자린고비처럼,

정상적인 멘탈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그 신통방통한 능력.

에어컨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돋는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각과 촉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그 공감각적 능력이.

 

이 더위가 물러가고 추위가 찾아오면, 우린 또 한번 그 쩌는 능력을

발휘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조그마한 성냥불 하나에도,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떠올리며

추위를 잊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보일러 펑펑 돌린 듯

등짝에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려 준비해둔 내복 입어볼 기회는 언감생심,

웃통까지 벗어 제켜야할 것만 같은 후끈함을 느끼는 그 상상력을.

 

이런 상황에서도 혹, 정치가 나랑 뭔 상관이냐는

불굴의 신념과 강인한 멘탈을 소유하신 서민이 계시다면,

전기세폭탄 끌어안고 장렬하게 산화하시던가.

 

산산이 부서진 지갑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지갑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지갑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지갑이여!

 

것도 아님, 이담에 애국훈장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될지도 모를

영광스런 꿈을 위안삼아 사시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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