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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철학 - 김상봉과 고명섭의 철학 대담
김상봉.고명섭 지음 / 길(도서출판) / 2015년 7월
평점 :
무릇 철학자라면 설득력 있는 자기만의 철학적 개념이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고, 철학사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며, 주체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도 '철학자'라는 직함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조건을 골고루 갖춘 한국의 철학자들을 나는 그동안 열심히 관찰하려 했고, 지금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지만 내가 과문한 탓인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에 김상봉이라는 철학자는 한국 지성계에 우뚝 솟은 지적 봉우리 중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김상봉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교원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였다. 그 분이 쓰신 <호모 에티쿠스>라는 책은 도덕윤리 임용고시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었던 까닭에 자연스레 접하게 된 것인데, 서양 윤리학에 대한 명쾌한 서술에 감동하며 공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서양윤리학을 교양수준으로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다른 책보다도 꼭 호모 에티쿠스를 참조하시기를)
그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윤리교육과에 입학하고 1학년 때 그 분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고, 그 책이 내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내가 도덕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문제의식과 질문 앞에 서게 해 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도덕교육이 어떠한 노예적 굴종의 역사를 지나왔으며, 그 뿌리가 현행 도덕교육과 교과서에까지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는지 그 진실을 철학적으로 깨우치게 된 것은 대학시절의 어떠한 독서경험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김상봉 선생에게 꾸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3년부터 2년간 나는 파견으로 대학원에서 철학교육 석사과정을 밟았는데, 내 학위논문의 주제는 '동학'이었다. 그런데 김상봉 선생께서 작년 5월쯤 '동학이야말로 한국철학사의 시작이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는 기사가 한겨레에 실린 것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38538.html).
바로 다음날 <‘우리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수입철학과 훈고학을 넘어서’>라는 학술대회가 조선대학교에서 열렸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김상봉 선생의 발표를 듣게 되었다. 김상봉 선생에게 평소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날 발표를 통해 어째서 칸트철학자가 동학이라는 우리 역사에까지 그 학문적 관심이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만남의 철학>이라는 이 대담집만 읽어도 그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본다.
‘기레기’라는 말이 고유명사화 되어가는 언론 불신의 시대여서 더욱 빛을 발하는 기자들이 있는데, 한국의 기자들 중 가장 지적이고 성실한 사람 중 한 명인 한겨레 고명섭 기자께서 이러한 김상봉 선생과 대담으로 만났고, 그것의 결실이 이 책 <만남의 철학>이다.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김상봉 선생의 철학, 세계관에 육박해 들어가는 이 대담집은 훗날 한국 지성사에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물이 될 것이다.
김상봉 선생의 깊고 번뜩이는 철학적 통찰들이 고명섭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들과 만나 가슴 뛰는 사유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체철학의 첫걸음(1부), 만남 철학의 심화(2부), 공동체 철학의 전개(3부)라는 순서로 대담이 이어진다.
1부에서는 김상봉 선생이 생각하는 '주체'의 개념과 서양 정신사에서 노정되는 주체성 개념의 한계(이른바 '홀로주체성')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2부에서는 이러한 (김상봉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불임의 서양정신'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서로주체성'이 어떤 개념인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만남'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데에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
3부는 1,2부의 대담내용을 바탕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우리 역사(5.18)를 통해 말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한국 기업경영의 모순과 그에 대한 해법, 한국사회 학벌문제에 대한 간단한 대화내용들이 나온다.
그동안의 김상봉 선생의 철학저작물들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대담집을 통해 큰 얼개와 밑그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큰 가치가 있다. 대화록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한결 수월하다.(리영희 선생과 임헌영 선생의 <대화>이후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대담집이다.)
그리고 작금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이 치열한 정신의 노동, 즉 철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상 결코 변화할 수 없다는 깨우침을 이 책을 통해 통렬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에도 이러한 걸출한 철학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장점은 충분하다.
하버마스, 지젝, 네그리, 아감벤, 바디우...다 좋다. 하지만 우리 가까이에 이렇게 우리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고민하면서, 치열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철학적 해석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철학자를 먼저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제 아무리 세계적 석학이고 사상가라 한들 과연 우리 현실에 우리만큼 처절한 문제의식에 '즉'해서 깊이 있게 볼 수 있겠는가?
김상봉 선생은 자신을 함석헌의 뒤를 잇는 철학자로 자처하고 있는데, 한국의 철학사는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이렇게 빛나는 지성들에 의해서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의 주요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다. ‘고통’, ‘만남’, 그리고 ‘서로주체성’...
고통과 만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쓰는 용어이지만 김상봉 선생의 철학적 해석은 그 단어들이 어떻게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규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서로주체성이라는 단어는 김상봉 선생의 독창적 개념으로, 서양 정신사를 '홀로주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서로주체성'을 제시하며 그 의미를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고 서로주체성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만남'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5.18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해석은 그야말로 독창적이고 주목할만 한데, 국내 어떤 학자도 제대로 그 진수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5.18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5.18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철학의 헌정>이라는 책은 기념비적인 5.18 연구서라고 생각한다.)
그는 칸트철학을 공부한 철학자이지만 그 동안의 철학 3부작(자기의식과 존재사유, 나르시스의 꿈,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통해 칸트철학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끊임없이 질문해들어가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구성해왔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토대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저술들을 내놓아왔다(도덕교육, 학벌주의, 노동, 5.18). 이 대담집은 김상봉 선생의 학자로서의 그동안의 연구성과들과 문제의식에 대한 중간 결산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간만에 정말 깊이 몰입하고, 가슴 뛰는 독서를 한 것 같다.
이 대담을 기획하고 진행한 고명섭 기자에게 정말 감사하다. 그는 이 대담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김상봉 선생의 많은 논문과 단행본들을 완전히 숙독하고 모조리 소화하여 군더더기 없는 훌륭한 인터뷰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철저히 독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맥락들을 짚어가면서 김상봉 철학의 정수를 안내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교사로서 어떻게 우리 역사와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교육철학을 구성해나가야할지에 대한 철학적 지혜와 실마리를 제공해준 탁월한 철학자 김상봉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