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 이론신서 55
심광현 지음 / 문화과학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심광현 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교수로 영화, 미술, 대중문화, 예술교육, 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월경하고 넘나들며 폭넓고 깊은 사유를 해온 지식인이다. 또한 문화연대,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영화인회의, 민중의 집 등의 최전선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해 온 실천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유비쿼터스'와 '통섭'이라는 열쇳말로 새로운 사유의 한 보폭을 또 한번 보여주었다. 이 책은 그가 오랜동안 문제시 해 온 분과학문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도래한 기회이자 위기의 기술시대에 어떻게 진보적인 입장에서 적응하고 견인할 것인지의 고민을 풀어낸 것으로 읽힌다. 전작에서 다뤄왔던 벤야민, 비트겐슈타인, 칸트 등을 뉴테크놀로지의 유물론적 사유로 전유하면서, 동시에 GNR 혁명 등 지식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개념과 (과)학자, 혁신가들을 소개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중립적인 듯 보이는 새로운 기술의 도래를 어떻게 사유하고, 받아들여 새로운 사회와 세계를 위해 재전유할 것인지를 한번이라도 고민해 본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유비쿼터스'와 '통섭'의 개념화와 그 적용을 양보하지 혹은 타협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사실 필자도 예술, 지식, 문화 등의 개념에 유비쿼터스가 붙는 것이 어색했었다. 하지만 IT로 대표하는 뉴테크놀로지가 삶 곳곳에 일부 혹은 전부로 존재하고 있는 시대에, 더군다나 과학기술과 예술의 통섭을 말하는데 유비쿼터스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진의 발명을 말하지 않고 근대 예술의 변화를 말하는 것과 같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통섭은 또 어떠한가. 누군가는 융합, 또 다른 이는 학제간 연구, 어떤 이는 통합 등 이미 익숙한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효율적' 대안을 주장한다. 하지만 융합, 학제간 연구, 통합과정 등이 없었기에, 또 그 개념적/이론적 전개가 부족했기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문제제기 그자체에 있다. 어느 한 분과나 분야를 우위에 둔, 혹은 어설프게 기웃거리며 타분야의 장점만 취하는 접근 자체, 그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 자체가 새로움을 파열하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통섭은 '점핑 투게더', 곧 손을 벌려 맞잡고 함께 뛰어 나아가는 형상을 말한다. (책에서 인용한 마티스의 그림이 이 형상을 대표한다) 어느 한쪽으로 매몰/함몰되거나 포섭되지 않은 연구와 교육과 실천.  

그렇다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러한 통섭이 가능한가? 그 질문에 대한 길찾기가 바로 이 책의 목적이라 기대한다. (필자도 이제 한번 훑었을 뿐이다.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미궁같은 문제제기의  길잡이기 되길 바라고 있다.)  

 

뱀다리. 

'유비쿼터스 Arts & Technology' 의 연구와 교육사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이는 국회와 정부의 정당한 심사와 검증을 거친 사업이라고 한다)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유비쿼터스, 통섭 등의 개념화를 어설프게 타협하지 않는 태도. 이런 그의 학문적 자세와 실천이 어쩌면 지금 그에게 닥친 위기를 초래 했는지 모르겠다.  올곧은 선비가, 학자가, 활동가가 제대로 살기에는 너무도 힘든 세상아니던가. 새로운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상급기관(장)의 마음에 들지 않은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교수가 대학에서 쫓겨난다면, 그 사회는 정말 희망이 없다. 최소한 파시스트도 그런 짓은 안 한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얕은 생각에서라도 말이다. 겨자씨만한 건강성이 있는 나라라면, 비판적인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2009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정말 위기인지 가늠할 수 있는 또하나의 지표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문광부 등 관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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