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는 지금까지 어떤 폭력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1)이라 비난하고, 학생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이내 극렬 학생운동권들의 적이 되었다. 이들에게 ‘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하버마스는 더 이상 대학에 머물며 학생들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하버마스는 연구소에 파묻혀 10여 년간 오직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이런 오랜 세월의 사색과 탐구를 거쳐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