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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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독재와 아감벤의 비판 (이재남. 남도일보.2021.7.1)


이탈리아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작년 코로나 초기 때부터 각국의 정부들의 코로나 대응 태도에 강력한 비판을 전개해 왔다. 하루아침에 모두가 감금되어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맨 앞장서서 ‘이것은 팬데믹 독재다’라고 주장한 이가 아감벤이다. 최근 그의 글을 모아 『얼굴 없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어떠한 이유로도 통제할 수 없으며,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목적과 유일한 회복 수단을 상실하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다는 과학적 위선으로 팬데믹 독재가 진행되고 있으며, 과학종교의 제단 앞에 인간들이 얼굴을 빼앗긴 유령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 코로나 감염병 현상이 감기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정부의 사망자발표가 질병 사망자와의 통계비교가 정확하지 않으며, 의학자들 사이에서도 통계에 대한 이견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나치 치하에서도 야간통금은 있었지만, 전면적인 이동금지는 없었으며, 어떠한 공포정치 아래에서도 가족의 죽음을 방치하지는 않았으며, 거리두기 사이로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 없는 유령들을 조정하는 디지털 기술이 과학을 종교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기존의 종교는 과학 앞에서 사랑과 헌신을 포기했으며, 생명을 담보로, 모두를 위한다는 과학의 위선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거라는 메시지다.

스스로 의사도 과학자도 아니라고 하면서도, 범유행 현상을 감기정도로 인식하는 초기 그의 인식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과연 모두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과학적 근거를 찾아서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비판이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사랑의 폐지’다. 접촉 금지상태는 결국 관계의 떨림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폐기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랑도, 얼굴도 없는 디지털 유령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토양에서는 아감벤같은 주장은 금방 우익의 논리로 둔갑하여, 코로나균 살포 같은 괴담이나 음모론의 배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런 주장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며, 인문적 성찰의 힘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순방 과정에서 각국의 언론들이 K방역의 성공적인 배경을 묻자 두 가지를 제시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했고,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팬데믹 상황에서 적어도 우리가 아는 의사들에게 운명을 맡길 수 있는지, 전문가는 맞는 것인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전문가 집단이 진영논리에 따라, 의사단체별로 입장이 분분하고, 아감벤의 표현대로 집이 불타고 있는 상황에도 이를 담보로 파업을 감행하고, 일국의 총리가 국회에 나와서 의사들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걱정하며, 공공의료 정책을 후퇴시키는 것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진짜 전문가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초기 감염폭발 지역으로 달려간 의료진, 천방지축 학생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방역을 챙긴 돌봄 관계자들과 교원들, 신뢰 있고 신속한 정보유통으로 초기 대응력을 키운 선량한 의료보건 행정당국, 마스크 유통에 협조한 약국들, 드라이브스루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한 의료진, 온갖 통제로 생업에 타격을 받으면서도 협조한 자영업자들... 이들이 진짜 전문가인 이유는 위기 대응 역량을 스스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분야별 전문가들이 실력을 보여줄 때이다.

바이오산업을 육성하고, 공공의료 역량을 키우고, 위기 대응 사회체계를 구축하고, 그 과정의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시스템을 구축하고, 지속가능한 학습시스템을 구축하는 일들이다. 아감벤의 비판에 대해, 예고 없는 재앙에 대한 미숙함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감염병과 기후 위기 사태, 디지털 기술의 종교화, 사랑 없는 접촉, 얼굴 없는 인간의 유령화 같은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우리 곁에서 쳐다보고 있다는 79세 노철학자의 경고가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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