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여행 6 - 조선 시대 1 한국사여행 6
(사)감돌역사문화연구회 지음, 김혜경 기획 / 감돌역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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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인물로, 문화재로, 몸으로 역사를 느껴요!

역사야~!!!

 

 

 

집에서 엄마와 재미있고 즐겁게 배울 수 있는

 

감돌역사교실 <역사야~!!!>입니다.

 

 

 

역사가 흥미로워지는 이야기 한국사 교실...감돌역사교실!!!

 

감돌역사 역사야는 총9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번 달은  6권,,조선시대1를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1차시  조선 건국 이야기 

2차시  조선의 궁궐 

3차시  책 읽는 임금님, 세종대왕

4차시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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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시  조선 건국 이야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때 홍건적과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이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키우며 성장하였다.

1388년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우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토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신진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조선을 세운 후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포은 정몽주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호는 포은()이다. 성리학자로도 유명하다.

1360년(공민왕 9년) 관직에 임명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때로는 왜구나 여진의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성계정도전 등이 고려 말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왕조를 교체하는 혁명을 준비하자,

신하로서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해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

이성계도 정몽주의 학식을 존중해 그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태종)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후에 길재 · 이색과 함께 조선 시대 사림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2차시  조선의 궁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나라의 기틀을 다진 임금이다.

궁궐과 도성을 건립하는 한편, 국가 제도 전반을 개혁했으며 억불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3차시  책 읽는 임금님, 세종대왕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어릴 적 이름은 ‘충녕’이었다.

충녕 대군은 유난히 책 읽는 것을 좋아해 병에 걸려 누워서까지 책을 읽으려고 했다.

보다 못한 태종이 충녕 대군의 책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할 정도였다.

1418년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우선 학문을 연구하는 집현전을 만들어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 실력 있는 학자들을 뽑았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한밤중에 집현전에서 잠들어 있던 신숙주에게

임금이 입는 곤룡포를 벗어 덮어 준 일화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이 어려운 한자를 익히지 못해 글을 모르는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궁궐에 ‘정음청’을 세워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글자를 연구했다.

궁궐을 거닐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심지어 자리에 누워서도 세종은 늘 새로운 글자에 대한 생각을 했다.

밤낮으로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눈병에 걸려 신하들이 몹시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세종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글자가 만들어진다면 내 눈이 먼다 해도 괜찮소.”

그렇게 열심히 연구한 결과, 1443년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이 탄생했다.

세종은 3년 동안 궁궐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한 뒤 1446년에 이 새로운 글자를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최초로 한글을 사용해 조선 왕조 창업을 노래한 〈용비 어천가〉를 펴냈다.

또한 세종은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날씨를 연구하는 ‘관상감’을 두었다.

그리고 장영실, 이천 등을 통해 측우기와 혼천의, 간의, 앙부일구 등을 만들게 했다.

특히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다.

또 정초를 시켜 〈농사 직설〉이라는 책을 펴내 농업 기술 발전에도 힘썼다.

  

 

 

4차시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조선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되는 장영실.

역대 과학자 가운데 장영실만큼 이름이 회자되는 인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장영실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한국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장영실이 어떻게 출생하여 성장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즉 노비였다.

조선은 신분 제도가 엄격해 신분이 천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장영실은 관청의 노비 출신이었지만 과학자로서 눈부신 업적을 세웠다.

1423년, 평소 손재주와 눈썰미가 좋았던 장영실은 공조 참판 이천의 눈에 띄었다.

이천은 세종에게 장영실의 기술과 재주를 추천하였고 세종은 장영실의 실력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세종은 관노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신하들을 달래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뜻에 감사하며 과학 연구와 발명에 온 힘을 쏟았다.

 

 

역사중에 조선시대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고

이순신이나 세종대왕등 존경하는 위인들이 많아서

아들아이가 이번 감돌역사야 6권 조선시대1을 제일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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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알아가는 역사공부~

감돌역사교실의 역사야!!! 는 저학년 아이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되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는 역사시간입니다.

 

앞으로도 아이와 차근차근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며 익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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