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피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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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은 왜 보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재미를 느끼고 감동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와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걸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쉬운 듯 하지만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하기는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그냥 재미있는 것이고 감동적인 것도 그저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이야기가 아주 박진감 있어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예요'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 작가가 만든 작품을 다수의 독자가 감상할 때 그 작품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뭉클한 느낌을 주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감동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므로 어떻게 해야 재미가 있는 것인지를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공장에서 만든 단순한 제품도 사용하는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가 제각각이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 심금을 울리려고 하는 예술 작품에 대한 반응의 편차는 클 수 밖에 없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와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은 그러한 면에서 갈라진다. 또한 신경숙의 '엄마를 찾아서'와 윤대녕의 '도자기 박물관' 역시 그러한 지점에서 다른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곽경택과 홍상수 그리고 신경숙과 윤대녕의 예술성에 우열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사가 강한 것 즉 리얼리티가 살아야만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동네에는 심리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선호하는 독자를이 있다. 상상력을 훨훨 날리어 환상의 세계를 펼치는 작품에 환호하는 축들도 있다. 감각의 유전자를 달리 타고난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을 해 본다.
소설가 은희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소설은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해야 재미가 있다. 그러니까 이 경우 소설의 재미는 미학적 성취가 있어야 하고 창조적이며 생의 허무함이나 절망감을 보여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 제목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보라. 아름답지 못한 자의 아픈 독백 혹은 아름다움을 희구하는 강렬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소설 속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삶의 파열선을' 보여주고 독자가 그 선이 어떻게 우리 삶의 지도를 그려주는 지를 감지할 때 소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삶의 파열선'은 삶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 있을 때 찾아낼 수 있다. 삶의 파열선이란 정신을 차려 이 선의 존재를 알아버렸을 때는 이미 내 삶을 균열시켜 버린 선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 삶을 뚫고 들어온 선이다.
빼어나게 잘 만들어진 트렌치 코트나 구두 혹은 가방을 우리는 명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물건을 소유하기 바란다.
문장의 사이 사이에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되살리어 그 허망함과 낯섦과 파열선을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소설을 나는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가끔 그 소설을 쓰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도 나와 같은 하나의 나약한 인간일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하고 자잘한 세상사에 연연해하며 살아갈 것이다. 크고 작은 병에 걸리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리라.
하지만 그가 지어낸 소설의 문장에 밑줄을 치고 싶은 순간 나는 그가 달리 보인다. 흐르는 세월의 강 물에 배를 띄우고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 자맥질을 하는 삶의 해녀. 그가 낚아올린 물고기를 먹으며 우리는 우리의 삶에 밑줄을 긋게 된다.
그가 쓴 글에 밑줄을 그으며 나는 잠시 읽기를 중단하고 그 순간을 음미한다. 조금 뻥을 섞어서 이야기 한다면 아마 나는 그 순간을 행복하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내 일상 속에서 그만큼 즐거운 느낌을 주는 순간들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하루의 장사를 마치고 매상을 집계할 때 다른 날보다 30퍼센트 정도 매상이 많이 오른 날은 기분이 좋다. 평일의 두 배정도 매상이 오른 날은 가슴이 뿌듯하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어쩌다가 맛 볼 것이다. 원시인들이 커다란 멧돼지를 한 마리 잡은 날의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즐거움은 내 의지만 있다면 이러한 느낌을 비교적 자주 느낄 수 있지만 매상이 평소에 비해 두 배로 오르는 기쁨은 매우 희귀하고 또한 불특정하게 맛보게 된다. 게다가 즐겁게 읽은 책은 다시 꺼내 읽어도 즐거우나 매상이 두 배로 오르는 일은 다시 꺼내서 재현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이 가장 구체적인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과 진실되게 소통을 할 때이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타인과 온전하게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에게 써놓은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제게 가능한 가장 큰 행복을 선사했지요' 라고. 하지만 그녀는 옷 속에 돌맹이를 집어넣고 강 물속으로 걸어들어가 자살을 했다. 그만큼 인간은 소통하기 어렵기도 하고 또 근원적으로 고독한 것이다.
고독을 심화시키고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하게 되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책이 주는 재미와 감동일 수 있다.
어쨌거나 이러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작가 중에 독일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책 읽어주는 남자'이다. 케이트 윈슬릿이 한나 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책 읽어 주는 남자'도 좋은 작품이지만 오늘은 그의 단편 소설집 '사랑의 도피'에 수록된 '외도'라는 단편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2.
이 작품은 독일의 통일 전후인 1986년부터 1992년 사이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동서 베를린 사람들이 동부와 서부 베를린을 오갈 수 있는 조건이 변한 시기이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룬 시기이다. 소설이 시작하는 1986년은 동부 베를린 사람이건 서부 베를린 사람이건 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오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1989년 국경제한이 풀린 뒤로는 양 쪽 사람들이 자유롭게 동서 간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1960년 대에는 국경 제한이 엄격하여 국경을 탈출하려는 동독 사람들에게 국경 수비대가 총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의 화해 정책이 성공하여 1974년에는 상호 간에 외교 관계가 성립되었고 서로 교류를 늘려 1990년에는 통일에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기간은 동 서독 사람들의 구체적 삶이 만나게 되는 시기이며 그러한 역사의 흐름이 그들의 삶에 변화를 주게되는 때이다.
화자인 '나'는 1986년 여름에 베를린으로 이사를 한다. 베를린에 아는 사람이 없는 화자는 베를린의 동부와 서부를 오가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화자는 한 술집에 들어가 체스 구경을 하다가 그 판에 끼어들어 체스를 두게 된다. 그게 계기가 되어 서독의 복지 담당 재판관인 화자는 동독인인 스벤과 친구가 된다. 스벤에게는 파울라라는 아내와 율리아라는 딸이 있다. 스벤은 불가리아어와 체코어로 된 책들을 독일어로 옮기는 번역가이고 파울라는 그리이스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유치원생이던 율리아는 금세 화자와 친해지게 된다. '율리아와 나는 첫눈에 사랑의 불길이 일었다'라는 대목이 간결하게 그들의 친화감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스벤의 아내인 파울라와 화자는 처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스벤과 율리아와 나를 진지하고 엄격하게 대했다'에서 볼 수 있듯이 파울라는 쉽게 친해지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을 언급한 김에 스벤의 성격을 이야기 해보자면 그의 성격은 조금 소심하고 자기애가 강한 편이었다. '나중에 가서 나는 스벤이 너무 오랫동안 수를 생각하는 것이 지겨워졌다'고 체스를 두던 화자가 언급을 한다.
그들이 교유를 한 지 일 년 쯤 된 1987년 여름에 그들은 함께 불가리아의 해변으로 여행을 간다. 이 때 쯤 되면 서로가 격식에만 어울리는 대화를 나누는 단계가 지나 서로의 속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드러낼 수 있는 단계가 된다. 그러니까 일정 기간을 교류한 동독 사람이 서독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파울라와 화자가 나누는 대화의 몇 구절을 보자. 파울라의 언급이다.
'당신들은, 당신들 중의 한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지 알지 못할 거예요. 그것은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것을 뜻해요. 정신적으로 그리고-뭐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물질적으로요. 우리는 당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당신들에게 질투어린 눈길을 두지 않을 수 없어요.'
파울라의 말은 그들의 세계가 서로 다르고, 서로가 서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맞바꾸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후 동부 베를린 사람보다는 더욱 자유롭게 서부 베를린을 오고 갈 수 있는 화자에게 스벤과 파울라가 어떤 은밀한 메시지를 서독에 있는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화자는 그후 국경제한이 풀리는 1989년 가을까지 서독의 저널리스트에게 동독 정부의 억압적인 조치들에 대해서, 동조자들에 대한 수색과 체포에 대해서, 파울라와 친구들의 활동에 대해서 보고를 했다. 화자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그들과 유대감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그 시절 동독은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겪은 것이었고 화자는 동독 사람들과 함께 그 변화의 물결 위에 있었던 것이다.
나무 가지의 한 켠이 담장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이야기를 잠깐 곁 길로 넘겨보자면, 이 소설과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 중에 '타인의 삶'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슈타지라는 비밀 경찰이 동독 사람들의 삶을 철저히 감시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려 하는 영화이다. 이 시절 동독의 독재체제와 한국의 유신시절은 형제간처럼 닮아있다. 예술 활동은 통제받고 정보기관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의 체제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시켜야 한다. 권력은 부패하고 부패한 권력이 개인의 삶을 왜곡시킨다.
슈타지 요원 비슬러로부터 도청감시를 당하던 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 부부는 경찰의 수색을 당하고, 남편의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위해 문화부 장관에게 몸을 허락하던 크리스타는 조사와 수색의 와중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이야기 이다. 슈타지 요원 비슬러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영화 '타인의 삶'도 시간적 배경이 1985년부터 1992년 까지 이다. 얼어붙은 겨울의 밑에서 봄 기운이 그 단단한 것을 조금 씩 녹게 하는 계절의 끝에서 두 작품이 탄생을 했다. 역사의 변혁은 인간의 삶을 큰 폭으로 변화시킨다.
스벤과 파울라는 통제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그 바람을 몰고가는 정치에 취해 살며 그것에 적극 참여한다.
결국 독일의 통일은 이루어지고 스벤과 파울라의 삶에도 변화가 온다. 정치적인 자유로움을 누리는 것과 함께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그들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들은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직장을 얻는다.
1992년 가을에 스벤은 그가 강사로 일하던 자유 베를린 대학에서 종신직 강사가 된다. 동독인 중에서 최초로 그 대학의 종신직 강사가 된 것을 스벤은 무척 기뻐한다. 스벤은 이것을 스스로 축하하려고 화자를 집으로 초대한다. 스벤은 요리를 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한다. '그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화자가 언급할만큼 그는 매우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날 파울라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파울라는 말이 없었고 율리아의 재롱을 보고 미소를 짓거나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그녀는 한 잔 두 잔 포도주를 마시고 있을 뿐 스벤이 춤을 추자고 해도 거절을하고 그의 애정 표현에 이리저리 몸을 빼면서 그 자리에 동참을 하지 않는다.
화자는 율리아를 침대에 데려가 재우고 그들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비디오 영화를 두 편 보았다. 화자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안 뜰 쪽의 방에서 잠을 잤다.
꿈 속에서 교회의 종소리를 들은 듯했고 얼핏 잠이 깨었을 때 뜻 밖에도 파울라가 침대 매트리스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쉿' 하면서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두 사람의 머리를 뒤덮으며 흘러내렸다. 불과 서너개의 방문 너머에 친구 스벤이 있고 친구의 아내와 동침을 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짓이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형식적인 의무감은 그가 하고 있는 행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만큼 가깝기도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의 가까운 감정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차분하게 섹스를 했다. 경쾌한 두 발걸음이 어우러져 두 육체가 하나처럼 춤을 추듯이 그들은 내밀한 느낌으로 섹스를 했다. 이윽고 둘을 합쳐주었던 침묵이 둘을 갈라 놓았을 때 파울라는 목욕가운을 여미고 방을 빠져나갔다.
외도란 무엇인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동침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이 느끼는 죄의식은 상대방을 배반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라는 왜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사고와 사건은 어떻게 다른가? 개가 사람을 물면 그것은 사고이다. 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우리는 그것을 사고라고 하지 않고 사건이라고 한다. 부부가 격렬한 동침을 하다가 복상사를 했다면 사고이지만 똑같은 경우가 배우자가 아닌 사이에서 벌어지면 그것은 사건이 된다.
그러니까 사건은 의외성을 담보로 한다. 그런데 그 의외성이 단순한 의외라면 그것은 서사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의외의 이야기가 서사를 이루어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려면 거기에는 의외성과 함께 인과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파울라의 외도에는 인과성이 있어야 한다.
우선 소설의 스토리를 조금 더 따라가보자.
다시 잠을 청했던 화자는 스벤과 파울라가 다투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다. 화자는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밖에서 듣다가 그들의 자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들의 다툼 중에서 화자는 파울라가 스벤에게 커다란 실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파울라는 스벤이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통일 전에 비밀 경찰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장벽이 허물어진 후 이러한 사실이 파울라에게 알려질까봐 늘 노심초사했던 스벤의 걱정이 현실화 된 것이다.
통일 전에 파울라는 열정적으로 동독 사회의 모순을 외부에 알리고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파울라 몰래 비밀 경찰과 내통을 하던 스벤은 그의 동료들에 관한 정보를 비밀 경찰에게 넘겼고 파울라의 행동을 폄하시켰다. 공개된 기록에서 스벤은 비밀경찰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당신은 내 아내가 집회에서 말하는 내용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쉽게 받고 쉽게 말려드는 편이거든요.'
또한 스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고 그를 비밀경찰의 손에 넘기기도 하였다. 스벤의 노력으로 파울라는 사흘 동안 신문을 받고 훈방이 되었고 동료는 일곱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서독으로 추방이 되었다. 파울라의 행위는 스벤 덕분에 멍청한 여자의 철없는 장난이 되었다. 게다가 스벤은 친구인 화자까지도 비밀 경찰에게 팔아먹었다. 스벤은 그를 서독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반체제 인사로 만들었으며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였다.1985년에 처음 파울라가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고, 스벤이 화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화자에 대한 보고를 하고 그 대가로 파울라의 선처를 얻어내려고 하였다.
스벤이 주장하듯이 그의 행동은 전적으로 파울라를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내를 위험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은 정직하고 용기있게 살아야 하지만 과연 우리의 삶은 그렇게 살아 질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것인가? 반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부정직하고 용기없이 살 만큼 세상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스벤의 대척점에 있다고 선뜻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을 보면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또 반대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세상에 그렇게 연연해 한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은 얼마나 찌질찌질한 것인가?
파울라는 스벤에게 몹시 실망을 한다. 그녀는 흥분하여 몸을 떨며 그에게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내 본래 모습대로의 나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미에 맞는 나를 구한거야. 어쩌면 그런 내 모습이 당신의 구미에도 맞는지 모르지. 무해한 여자. 잠자리에서 최고인 여자.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여자. 그것이 당신이 구해낸 내 모습이야. 실제의 내 모습이 어떤지 따위는 당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
이제 파울라가 외도를 한 사건의 인과 관계가 조금 잡히는 듯 하다. 하지만 남편에게 실망을 했다고 한들 그 분풀이가 하필 가까운 친구와의 외도여야 하는가?
파울라에게 화자가 묻는다.
'왜 나하고 잤어요?'
'그가 당신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랬나요? 당신이 불륜을 저지르고 나서도 그와 화해할 수 있는 지 알아보려고요?'
'내가 스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나요? 그렇게 해서 그가 나를 배반한 사실을 내가 마음에 두지 않게 만들 속셈이었어요?'
이에 대한 파울라의 대답이 함축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준다.
'당신은 당신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요?'
파울라 마음 속에 스벤에 대한 사랑은 이미 제철이 지난 논처럼 텅 비고 황량해진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에 더해 그를 향한 존경의 마음까지 솟아날 때 우리는 그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다. 조금 양보를 해서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대를 존중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아이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내 자식이라는 프레미엄을 얹은 존중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늘 게으르고 하는 말마다 거짓말을 일 삼는다면 부모도 그가 사랑스럽기는 커녕 무거운 짐이나 발에 박힌 가시와 같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파울라 행위의 인과 관계를 들여다 보자. 파울라는 스벤에게 큰 실망을 했다. 그래서 스벤에 대한 사랑에 회의를 느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화자의 침실을 찾아간 것일까?
화자는 율리아를 자상하게 보살펴주고 그들을 늘 온화하게 대해온 사람이다. 파울라와 화자 사이에는 호감이 쌓여왔다. 동독의 여자가 서독의 남자에게 느끼는 낯섦과 익숙함이 관계의 화학적 성질을 각별하게 만들었을 것도 같다. 스벤에게서 잃어버린 존경심의 비중이 화자에게로 넘어왔을 것도 같다. 그리고 또한 분노의 감정이 스스로 제어의 밸브를 열어 버렸으리라.

 3.
그 뒤로 세 사람은 연락을 끊은 채 살아간다. 화자는 파울라와 자신의 실수를 스벤에게 고백했다. 스스로와 파울라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화자는 스벤이 보고싶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화가났다.
그 뒤 화자는 음악회에서 파울라를 한 번 만났다. 하지만 둘은 서로 멀리 다른 층의 객석에 앉아 각자 음악을 듣고 만다.
화자는 율리아를 통해서 스벤과 파울라가 계속해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스벤에 대한 실망이 파울라의 마음에 사랑을 희석시켰더라도 스벤이 파울라를 구하려 했던 가족의 유대감이 그녀를 머무르게 했을까? 아니면 삶이란 그렇게 그냥저냥 흘러가기 때문에 그 관성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파울라는 결국 스벤을 떠나지 않았다. 작가가 여기에 친절한 설명까지 덫붙여 놓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러한 부분을 독자의 상상 속에 맡겨 놓은 듯하다.
파울라가 스벤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면 이야기를 쉽게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울라가 스벤을 떠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포함시킨다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촛점이 흐려질 수도 있다. 
사진의 프레임에 견주어 이야기하면 한 장의 사진에 담을 것에 한계가 있듯이 한 편의 단편 소설에서도 그 안에 집어넣어야 할 것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사랑의 지속성인 것 같다.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한 삶의 자세도 한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사랑이란 존중과 대등의 관계를 통해서 온전히 성립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일방적인 보호의 관계 속에 사랑을 집어 넣으려 할 때 그것은 이미 구겨지고 찢어지게 된다는 것. 서로가 당당하게 서 있도록 만들어 줄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다는 것. 누군가 그것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것에 너무 집착을 하면 오히려 그것은 깨진다는 것. 그러므로 진실함에서 이탈된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의 환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환상이나 집착은 우리의 삶을 불행으로 이끈다는 것.
인간의 지층에 스며있는 감정의 유물을 캐어내듯이 사람의 마음을 깊이있게 파헤치기 때문에 '감정의 고고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슐링크의 이 소설은 역시 그의 평판에 걸맞게 섬세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그 지층의 조건에 맞게 설정하고 그 지층의 접점이 어긋나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도'라는 소설은 훌륭한데, 이에 대한 감상이 이 소설의 겉 핥기나 오독의 결과물로 삐져버렸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설 '외도'를 부끄럽게 '외도'한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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